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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또 그렇게까지... 하하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격의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었다.

제주도에 있었으면 보기 힘들었던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전계수가 삼거리 극장에서 밖으로 나왔다.

극장 안의 판타지에서 나와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좀 어색했는지 홍상수에 많이 의지했다.

한 유명한 화가가 도시를 벋어나 잠시 들른 춘천에서 미모의 여대생을 만나고

서로 호감을 갖고 야릇한 작업을 주고받고

감정을 드러냈다가 감추기에 적절하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진다.

홍상수에 의지해 춘천의 풍경과 여대생의 미모를 즐기던 감독은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세계로 나아간다.

예술가의 자의식!

그래서 후반부는 홍상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전위영화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곳에서 예술에 대해서 마음껏 지껄이고는 다시 현실로 나온다.

그리고 춘천을 떠나면서 홍상수에게 미소를 짓는다.

전계수가 “빌려줘서 고마웠습니다. 잘 썼어요”라고 하면 홍상수가 “뭘 또 그렇게까지...”라고 얘기할 듯하다.

한 평론가가 얘기한 것처럼 ‘경쾌한 홍상수’라는 식의 홍상수의 아류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홍상수를 빌려다 썼을 뿐이다.


그래서 어색했다.

남녀 주인공의 대화와 표정은 홍상수의 생생한 모델을 표현하기 위한 캐릭터로서만 작용했다.

현실 속의 생생한 사람이 특성화된 캐릭터로 변하는 어색함.

삼거리 극장처럼 캐릭터들의 판타지도 아니고, 홍상수처럼 일상 속의 사람들도 아닌...

그래서 노골적으로 예술을 얘기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봤지만

캐릭터도 아니고 생생한 사람도 아닌 주인공들은 감독의 자의식을 대신 얘기하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버렸다.

박찬옥의 ‘파주’보다는 덜 어색했지만, 역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캐릭터도 아니고 생생한 사람도 아닌 이들이 자유롭고 놀 수 있는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는가 보다.

그래서 감독의 예술에 대한 자의식만 남는다.


삼거리 극장의 캐릭터들은 박찬욱의 캐릭터들과 달리 경쾌하고 따뜻했다.

욕망이 지배하는 박찬욱의 캐릭터들과 달리 삼거리 극장의 캐럭터들은 욕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뭘 또 그렇게까지의 캐릭터들은 생생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욕망이 드러나지만, 박찬욱처럼 가상의 세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욕망에 지배되지 않는다.

홍상수의 길을 따라가서 다시 홍상수의 길로 나와야 했기 때문에 현실이 욕망을 눌러버린 것이다.

또 홍상수의 현실은 예술가의 자의식마저 감싸 안아 버리기 때문에 박찬옥의 파주처럼 자의식에 눌려 허걱거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경쾌하지만 작위적인 경쾌함이었다.


전계수는 당분간 실험을 계속 할 것 같다.

그의 실험이 캐릭터의 세계로 나아갈지, 생생한 현실로 나아갈지는 모르겠지만...


홍상수의 ‘하하하’는 홍상수가 이렇게도 경쾌해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줬다.

도시를 벋어나 잠시 들른 지방에서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남녀의 관계가 서로 얽히면서 야릇한 감정이 뒤섞이고...

현실도피적인 남자의 욕망이 현실적인 여자의 감정에 지고...

홍상수의 현실감각은 여전했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나면 느끼곤 했던 허무함이 이 영화에서는 사라졌다.

남녀의 설정도 그대로고

얘기를 이끌어가는 방식도 그대로인데...

결정적으로 남자들이 변해있었다.

하하하의 남자들은 현실도피적이고 욕망이 우선하는 것은 그대로였지만

현실적이고 감정에 우선하는 여자들 앞에서 끝까지 싸우려하지 않았다.

불륜의 사랑을 나누는 유준상은 불륜을 현실의 관계로 만들려하는 예지원 앞에서 고민을 하다가 지고 만다.

남자가 있는 문소리를 좋아하게 된 김상중은 현실도피적인 욕망을 앞세우기 보다는 현실적인 감정을 앞세우면서 문소리에게 빠져들게 된다.

결국 현실적인 감정에 우선하는 여자들이 이기는 식의 홍상수의 현실감각은 그대로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의 현실적 감정을 받아들임으로서 경쾌해졌던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김상중은 끝까지 여자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다가 여자의 집 문 앞에서 허무한 현실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하하하’의 김상중은 욕망보다는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더 감정에 충실한 문소리에게 끝내 차이지만 그 현실은 허무하지 않았다.

남자의 타협이 허무함 대신 경쾌함을 선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타협은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 감독의 타협이기도 했다.

허무한 영화보다는 경쾌한 영화가 대중에게는 편했다.

그러다보니 현실도피적 욕망과 현실적 감정의 대립은 어색한 타협을 위해 완화됐다.

그 타협의 결과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 속의 생생한 모습 그대로였던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뭔가 어색하고 짓눌려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의 차이가 아니라 감독의 연출력의 차이였다.

현실과 타협함으로서 남녀 간의 팽팽한 균형이 무너진 홍상수의 영화는 어디로 나아갈까?


홍상수식의 현실로 들어와 예술을 생각하고자 했던 전계수는 현실을 무대 세트로만 활용하면서 예술의 우월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홍상수는 정신 나간 거지를 놓고 벌인 예술가의 논쟁에 대해 거지의 구걸과 위협에 무서워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예술가의 관념적 허위를 조롱했다.

전계수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뭘 또 그렇게까지...”라고 얘기하면 홍상수가 “하하하”하고 웃는 모습이 엿보였다.

하지만 홍상수의 현실에는 무거운 짓눌림이 없다.

욕망과 감정의 대립에 따른 짓눌림은 있지만

살아가기에 허덕이는 현실의 짓눌림이 없는 것이다.

도시에서 잠시 벋어난 지방이라는 설정에서

도시의 남자는 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의 힘겨움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지방에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가는 여자 역시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할 뿐 현실의 힘겨움은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가 현실 속의 예술을 얘기하지만, 그 현실은 순간적인 감정과 욕망이 우선하기 때문에 예술을 위한 현실이 되고 만다.

다시 홍상수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뭘 또 그렇게까지...”라고 얘기하면 전계수가 “하하하”하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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