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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오일장을 찾았습니다.
날씨도 화창하고 일요일이기까지 해서 오일장에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금방 만들고 온 따뜻한 두부도 사고
어묵탕을 만들어 먹으려고 어묵도 사고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계란도 사고
생선들이 싱싱하고 싸서 몇 가지를 여유 있게 샀습니다.
그렇게 장을 보고 났더니 장바구니가 아주 묵직하더군요.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에로 배우처럼 차려입고 풍만한 가슴과 하얀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여성분이 걸어오더군요.
시골 노인들과 중년의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일장을 그런 모습으로 활보하니
당연히 돋보이기는 했지만 그 이질감이 살짝 역겨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버스정류장에는 장을 보고 집으로 가려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버스가 왔고 버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가 싶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먼저 탈 수 있도록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버스에 탔는데
먼저 타서 자리에 앉은 할머니들은 장에서 사들고 온 짐을 옆자리에 올려놓고 좌석 두 개를 차지해버렸더군요.
대여섯 명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지만 할머니들이 독점해버리는 바람에 저는 서 있어야 했습니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추해보이고 화도 나서 다음 정거장에 내려버렸습니다.
다음 버스는 금방 도착했고 이번에는 빈자리의 여유가 많아서 앉아서 갈 수 있었습니다.
여유 공간이 있는 뒤편으로 가서 자리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는데
뒷자리에 앉아있는 두 명의 중년남성이 큰소리로 대화를 하더군요.
그 와중에 아는 이들에게 전화도 하면서 술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날씨 좋은 일요일 오후에 술 한 잔 마시겠다는 것이 문제될 것이야 없겠지만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광고할 필요까지는 없는데도
그분들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얘기만 떠들어댔습니다.
다행히 10여 분만에 그분들은 버스에서 내렸지만 버스 안에 남겨진 불쾌한 기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더군요.
조용한 버스에서 어지러웠던 마음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근처에 사시는 분이 작업을 하시다가 저를 보고는 가볍게 인사를 나눴습니다.
감귤 선과장에 있는 강아지들도 저를 발견하고는 깡쭝거리며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습니다.
집에 왔더니 몇 시간 동안 혼자 있었던 사랑이가 반갑다며 꼬리를 흔들며 저를 맞아주더군요.
이 가벼운 인사들이 짧은 나들이에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2
10여 년 전 지하철에 출퇴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가면 기본요금으로 5시간을 그곳에서 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저는 매일 그곳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낮 시간에
사람들이 많지 않은 맨 앞 칸을 이용하고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 같은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요령껏 5시간을 보냈지만
서울에는 사람들이 무지 많았습니다.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쉼 없이 수다를 떨어대는 사람
스피커 소리를 크게 해서 동영상을 보는 사람
다리를 쫙 벌리고 앉는 사람
옆에 앉은 저와 어깨싸움을 벌이는 사람
남들 시선은 상관없이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람
5시간 동안 그런 사람들에 치여서 집으로 돌아오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또 다시 싸움을 벌이며 잠 못 드는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쳇바퀴 돌리듯 이어지던 그런 생활이 몇 년 동안 계속 되면서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괴물이 되 가던 제 자신이 정말 무서웠습니다.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 악몽 같은 기억들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르르 흘러가버려서
이제는 아련한 기억으로 살포시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 기억을 오래간만에 되새김하면서
과거의 저를 살며시 불러봤습니다.
“너를 잊지 않고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무덤덤한 얼굴 속에 체념만이 가득한 그 눈을 보니
너무도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하겠더군요.
3
가을답지 않게 포근한 날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아침에 사랑이와 함께 산책을 하는데 손이 시려서 장갑을 꺼냈습니다.
털장갑을 보니 겨울이 왔음을 실감하게 되더군요.
겨울은
추워서 몸이 움츠러드는 계절이고
할 일이 많지 않아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계절이고
많은 것들이 단절돼서 외로워지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겨울을 잘 보내는 것이 숙제가 되곤 합니다.
올 겨울을 잘 보내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육지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동생을 위해 조그만 선물을 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별거 아니지만 한 두 달 정도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마음을 전해보려고 합니다.
또 주변 텃밭에 평소보다 채소들을 많이 심었습니다.
이것들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삶의 온기를 느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 읽는 라디오도 가능하면 따뜻한 이야기들로 채워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이들에게
이 방송이 가닿아서 따뜻한 온기라도 잠시 전해주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되지 않음을 알기에
따뜻한 털장갑을 낀 손으로
그 마음이라도 사그라들지 않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조성빈의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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