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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농사를 짓고 있는 이곳은 지형이 경사진 곳이라서 앞밭과 뒷밭의 높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형이 낮은 곳에 있는 밭은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이 많습니다.
예전에 저희 앞밭에서 제초제를 뿌렸는데 지형이 낮은 저희 밭으로 날아와서 텃밭에 심어놓은 채소들에 피해를 준적이 있어서 항의를 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뒷밭에서 자꾸 물이 흐르는 문제로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하우스 뒤로 조그만 하우스를 지었는데 저희 하우스에서 넘친 물이 자꾸 흘러든다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 하우스를 지은 곳이 가장 지형이 낮은 경사지여서 물이 모이게 되는 구조적 약점을 갖고 있는데다가
저희 하우스에서 떨어지는 물은 물탱크로 모이거나 설사 넘쳐흐르더라도 별도로 마련된 배수구로 빠지는 구조여서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특별한 문제없이 농사를 지어오던 하우스에 갑자기 이의를 제기하니 황당하기도 하고, 평소에 저희 밭으로 각종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들도 있어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도 이웃끼리 언성을 높이며 지내고 싶지 않아서 조심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문제제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다소 신경질적으로 답변을 하면서 기분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대화로 해결하자는 마음으로 뒷밭을 찾아가 웃는 얼굴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차분하게 그분의 얘기를 듣다보니
제가 꼼꼼히 살피지 못한 문제들이 지형이 낮은 곳에서는 보였고
제가 알지 못했던 옛날 사연들도 소환됐고
그분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수 있는 문제들도 얘기가 됐습니다.
별다른 충돌 없이 얘기가 끝나고 돌아섰더니
역시나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고
제가 지적하지 않은 문제들도 있었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들이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저는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할 의무가 있는 법입니다.
서있는 위치에 따라서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좀 더 새심하고 폭넓게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더군요.
2
주위 사람들과 불편한 일이 생기면 제 마음의 동요가 좀 오래갑니다.
큰 마찰일 때도 그렇지만 별거 아닌 사소한 일인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별일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라”라고 하지만
제 마음은 자꾸 그 일을 곱씹으면서 머릿속에서 상황을 키워갑니다.
왜 그렇게 불편한 일에 집착을 하는지 제 마음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들어봤습니다.
성민이 : 지나간 일은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될까?
내 안의 성민이 :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자꾸 올라와.
성민이 : 뭐가 올라오는 거야?
내 안의 성민이 : ‘지난 번에 얘기했던 일이 또 벌어지면 더 상황이 나빠지지 않을까?’ ‘내가 너무 물렁해보여서 상대가 더 도발적으로 나왔던 것은 아닐까?’ ‘싸움을 제대로 하려면 뭘 준비해야할까?’ ‘내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아서 공격해오고 그에 정색을 해서 맞대응을 하면 일이 더 커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자꾸 올라와.
성민이 : 음... 대부분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네.
내 안의 성민이 : 나도 이런 식의 생각들이 쓸데없다는 것을 아는데 자꾸 걸리적거리니까 그냥 흘려보내기가 어려워.
성민이 : 너는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됐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그냥 조용히 흘러가버렸으면 좋겠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자꾸 걸리적거린다는 거지?
내 안의 성민이 : 응.
성민이 : 싸우고 싶지는 않고.
내 안의 성민이 : 응.
성민이 : 최악의 경우 싸움이 커진다면 싸울 자신은 없고.
내 안의 성민이 : 그건 아닌데...
성민이 : 그러면 싸우게 됐을 때 이길 자신이 없어서?
내 안의 성민이 :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무식하게 싸워서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은 솔직히 자신 있거든. 노동운동하면서 배워왔던 것들이 그런 식이었으니까.
성민이 : 그런데?
내 안의 성민이 : 그런 식으로 싸움이 크게 벌어졌을 때 남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런 싸움은 무슨 의미가 있지?
성민이 : 결국 싸우고 싶지 않다는 거네.
내 안의 성민이 : 그렇지.
성민이 : 그렇다면 싸움을 말려주거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한 거네. 만약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 싸움을 응원해줄 수도 있는 그런 사람.
내 안의 성민이 : 응.
성민이 : 아, 그렇구나. 너는 외롭고 무서워서 걸리적거리는 것을 쉽게 놓아버리지 못했구나.
내 안의 성민이 : ......
성민이 : 성민아.
내 안의 성민이 : 응.
성민이 : 니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야.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랑이는 도망가지 않고 저를 위해 짖어줄 것이고, 항상 너를 위해 도움을 주는 동생들도 너를 적극 도와줄 것이고, 마을에서 인사하며 정을 나누는 사람도 너를 가볍게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과거 너의 동지들 중에도 너의 힘겨움을 안다면 도움을 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잖아. 그동안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니가 도움이 필요할 때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야. 단 몇 명이라도 저의 곁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야.
내 안의 성민이 : 그렇지.
성민이 : 너는 절대로 외롭거나 약하지 않아. 알고 있지?
내 안의 성민이 : 고마워.
성민이 : 나는 언제나 니 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줘. 나 역시 너의 도움으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잖아.
내 안의 성민이 : 그 말이 제일 든든하네. 정말로 고맙다.
3
경사가 진 지형적인 문제는 하우스 안에도 존재합니다.
나무에 물을 주면 지형이 낮은 아래쪽으로 물이 많이 흘러가서 그곳에 있는 나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몇 년째 이런저런 궁리들을 해보지만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하우스 설비를 하시는 분이 왔길래 조언을 부탁했더니 배관 뒷부분에 밸브가 달린 소켓을 달아놓으면 해결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간단한 방법을 생각하지 못해서 몇 년을 고생했던 것이 참으로 우스워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작업을 저 혼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관은 어떻게 잘라야하고 소켓은 어떻게 연결해야하는지 하는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공구도 마땅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비업자를 부르면 쉽게 해결해주겠지만 이 정도는 배워야할 것 같아서 제가 직접 해보기로 했습니다.
설비업자에게 전화로 간단한 것을 물어보고 나서 자재센터로 가서 공구와 소켓을 사왔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공구 사용법을 익힌 후 주변에 있는 폐자재로 연습까지 한 후 조심스럽게 파이프를 잘랐습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파이프 전달은 쉽게 됐는데 고정된 배관 사이로 소켓을 연결하는 것이 쉽지가 않더군요.
한참을 끙끙거리면서 어렵게 연결을 해서 제대로 됐는지 물을 돌려봤는데 웬걸, 연결부위에서 물이 세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게 연결한 소켓을 다시 풀어서 조심스럽게 재연결을 하고 다시 물을 돌려봤지만 또 물이 세더군요.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결국 실패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해서 그 일에서 잠시 손을 놓았습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주고서라고 설비업자를 불러야 하나?
미안함을 감수하고서라고 매제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며칠이 걸리더라도 혼자서 해결해야 하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유튜브 검색이라는 방법이 떠오르더군요.
그날 일을 다 마치고 유튜브에 들어가 관련 영상을 찾아봤더니 문제는 아주 사소한 것에 있었고 쉽게 해결이 될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소켓을 다시 풀어서 유튜브에서 배운 데로 차례차례 조심스럽게 연결을 하고는 물을 돌렸더니 물이 세지 않더군요.
혼자 박수를 치고는 또 다른 파이프에서 똑같은 작업을 하는데 이번에는 고정된 파이프를 연결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또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얼마동안 끙끙거리며 하다 보니 소켓을 키울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역시 물이 세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네 군데 작업을 하고 났더니 오전이 다 지나버렸습니다.
설비업자가 왔더라면 30분이면 끝났을 일을 이틀에 걸쳐서 해야 했지만 뭔가 하나를 제대로 배웠다는 뿌듯함이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4
저는 요즘 삶을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고
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고
시설을 보수하는 방식도 배우고 있습니다.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 마음을 다하면서
몸으로 부딪히며 조금씩 조금씩 배워갈수록
제 삶의 뿌리는 더 깊어지고 든든해지겠죠.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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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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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려요 ^^부가 정보
성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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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명님이라면 30분안에 후다닥 처리했을 일이었는데... ㅎㅎㅎ득명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