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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김인선 이야기

비정규직 투쟁이 힘겹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투쟁을 통해 정규직이 된 이들이 소수가 있다. 하지만 그 소수의 사람들마저도 정규직이 된 이후 새로운 조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SK인사이트코리아라는 파견업체에서 계약해지 된 정규직이 된 후 활동을 시도하고 있는 김인선 동지를 만나 투쟁과정과 여성 정규직으로서의 고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79년 인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가족이 서울로 옮겨와 학교를 다닌 김인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생계의 어려움을 고민해야 했다. 고3이던 97년 IMF 시기에 건설업체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가 실직을 하시자 장녀였던 김인선은 막 바로 취업을 하게 된다. 97년 7월의 일이다.

 

“선생님이 어느 날 ‘내 친구가 어디서 사업을 하는데, 안경 도매상가야. 근데 월급 100만원에 보너스 있고, 쉬는 날 있단다’ 그리고 ‘키 상관없단다’ 그래서 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남대문 시장 안에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거기는 30군데 도매상이 쫙 있어요. 저는 회사 사장이라고 하길래 그 전체가 다 그 사람 건줄 알았어요. 방학도 없이 급한 마음에 ‘거기라도 취직 한다’그랬어요. 나중에 그 한 칸에 경리도 아니고 판매사원도 아닌... 부장님 눈치 따라 진열대 안경도 정리했다가, 부장님이 정리한 장부 보고 통계도 냈다가, 그리고 토요일도 7시까지 하고, 일요일만 쉬고... 그런데 돈을 60만원 줬어요. 기다려도 오르지도 않고...졸업을 하면 올려주겠거니 했지만 2월 졸업식을 기점으로 퇴사할 때까지도 안 올려주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괴로워서 여기 저기 소문을 냈어요. ‘나 이렇게 취업을 했는데, 사실 그게 아니더라. 담탱이(담임 선생) 이 자식 만나면 뺨이라도 쳐주고 싶다. 왜 나한테 그랬을까?’

그런 경우가 많죠. 얼마 전에 기사도 읽어 봤는데... 취업 담당 선생님들 세 분인데, 몇 백 명의 학생을 하다보니까 회사의 취업서류만 보고... 그런 경우도 있고, 일부러 하는 경우도 있고... 결국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취업시키려고, 자기는 그걸 뻔히 다 알고 있는데... 선생님이 자기 친군데 몰랐을까요? 난 알았을 거 같애.”

 

그렇게 6개월 정도를 안경도매점에서 힘들게 일을 하던 중 파출부 일을 하던 어머니가 SK 과천사업소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얘기를 전해줘서 SK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인선은 98년 구조조정으로 정규직이 잘려나간 자리에 파견업체인 SK인사이트코리아 소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본인은 SK 직원인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1년 6개월 가까이 일을 하던 중 SK인사이트코리아 소속이었던 지무영(노조 설립 후 SK인사이트코리아노조 위원장이 된다)과 왕종현(노조 설립 후 SK인사이트코리아노조 사무장이 된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암암리에 있었고 99년 연말부터 조합원 가입을 위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왕종현씨 하고 지무영씨가 신문을 보다가 파견법에 대한 게 나왔는데 ‘아, 이게 우리 케이스다. 준비해야 된다’ 해가지고 둘이는 암암리에 그런 걸 다 했었데요. 2000년 3월에 노조설립 필증을 받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건 내가 잘 몰랐고... 나한테는 다 비밀로 했었고... 왜냐하면 대기업에서 노동조합 만드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이 인간들이 자기네끼리 지방 돌아다니면서 조직하고 그럴 때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줬고...

어느 날 퇴근하는데 왕종현씨가 원서를 내밀면서 ‘인선씨, 이거 좋은 거야. 싸인해 나 믿지’ 그러는 거예요. 평소엔 안 그러는데 좀 자신 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동료로써 의지를 많이 했어요. 저하고 같은 주간근무고, 여기가 다 교대근무 이다보니, 대화가 통하고, 커피 한 잔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저는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한번 친하면 그런 걸 의심하지 않아요. 맨날 날 도와주고, 내가 커피 잔 들고 갈 때 같이 도와줄 정도로 마음이 열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싸인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노동조합이 뭐고 앞으로 어떤 일 일어날 꺼고 그런 설명을 조금 해뒀더라면 마음적인 준비는 했었을 텐데... 아님 그때 가졌던 빚 정리라도.....

그 사람들은 저한테 얘기하면, 제가 과장 부장들과 사무실에서 일하고 그래서 셀 줄 알았데요. 그런데다가 현장에서는 제가 소장 빽으로 들어왔다고 오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끝까지 남을 줄 몰랐데요. 사무실에서도 제가 왕종현씨랑 워낙 친하게 다니니까 저한테 노동조합을 ‘해라’ ‘하지 마라’ 이런 말도 아예 안하고, 건들고 지도 않고... 노동조합도 저한테 아예 하지도 못했고 중간에 좀 억울한 게 끼인 게 있죠.”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조합 결성이 공개적으로 되면서 회사로부터 각종 탄압이 이어졌지만, 김인선은 노조활동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썰렁하죠. 맨날 대리님 싸우시고, 왕종현씨 불려 다니고, 지무영씨 불려 다니고... 왕종현씨가 ‘인선씨, 나 오늘 어디 좀 갔다 와야 되는데, 오늘은 또 어떻게 휘말리지 않고 버티냐’ 이러는데, 저한테는 탄압이 딱히 없었어요. 왕종현씨가 저러고 다니는 거는 ‘대리님이나 부장님하고 사이가 안 좋은가보다’ 이런 생각만 했었죠.”

 

그러던 중 2000년 11월 1일자로 김인선은 예상치도 못했던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아쉽게도 노조를 만들었는데 다 배반을 하고 탈퇴를 해서 마지막에 4명이 남았어요. 과천에 3명하고, 대구에 1명... 머리끄덩이 잡히면서 싸워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노동조합 교육을 받으면서 각오를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차라리 그런 것이 있었으면 지금 달라졌을 지도 모르고... 안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살아가면서 사람을 믿고, 이게 옳은가 아닌가를 알기 때문에 그때 설명했어도 저는 했을 거 같애요.

나는 사실 ‘짤렸다’ 이런 것도 잘 몰랐고, 뒷날부터 동지들이 같이 출근을 하제요. 경비대가 막고 있을 거래요. 그게 바로 해고되기 전날 저녁먹자고 해서 들은 이야기에요. 그때는 솔직히 싸움하는 것도 잘 몰랐어요. 별 생각도 없었고 개의치도 않았고, 피켓팅 하는 것도 몰랐어요. 그냥 피켓팅 하라니까 하는 거고... 약간 어설프게 대응한 게 많죠.”

 

그렇게 복직투쟁을 4~5개월 간 벌이면서 생계의 어려움이 심각하게 닥쳐왔고, 간부들과 상의해서 아르바이를 시작하게 된다.

 

“퇴직금이 들어와도 저는 근무 연수가 얼마 안 되고, 기본급이 43만원이니까 150만원인가 얼마 나왔는데, 그냥 카드 값으로 그 달치가 나가버렸어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진짜로 차비가 없었어요.

제가 장녀이다 보니까 집에 생계를 책임졌어요. 잘나가는 큰 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출근 안 하고, 소송이다 뭐다 우편도 날라 오고 하니 엄마는 맨날 ‘이 년아, 그게 해결 되냐. 가만있으면 되지, 뭐 할라고 그런 걸 해가지고’ 이러고... 그때는 어린 마음에 ‘식구들이 정말 못됐다. 어떻게 자식한테 저렇게 얘기할 수 있나’ 차라리 동지들이 낫네 그랬어요.

저는 그때 빚이 굉장히 많았어요. 왜냐하면, 아빠는 아예 실업자고, 동생들 먹이고, 치과 치료도 제가 시켜줬고 이러니까... 월급이 딱딱 나오면 빚은 언제든지 갚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때 빚이 3천인가 있었을 거예요. 그래도 IMF시절 120만원 월급이고 회사만 있어도 갚을 수 있겠다 이 생각에 그랬는데... 해고 후 벌써 카드 정지됐죠, 그때 독촉이 심할 때였는데 맨날 사람들 집으로 들락거리죠, 핸드폰 불나게 카드회사에서 전화 오죠... 무섭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아주 많이 괴로워서 ‘나 사실 이렇게 이렇게 돼서 사실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된다’라고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그때는 내가 너무 어리고, 두 남성 동지도 해고이후 정신이 없고 괴로울 때잖아요. ‘그래 이름만 남겨두고 딱히 할 거 없으니 소송은 가고 아르바이트 해라’ 그래서 간호조무사 일을 했어요.

그때 IMF시대 때니까... 상고졸업하고 면접 보는데 마다 고졸이상 이래도 대졸자만 인터뷰하고 그래서 다들 취업을 안 시켜주고... 어렸을 때 간호사가 꿈이었어요. 그래서 이참에 취업도 안 되는데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니면서 학원에서 연결해주는 병원에서 일했어요. 1년을 다니면서 40만원 받고 소아과에서 일을 했어요.

그 안에 노동부 진정이나 지노위 같은 게 진행이 됐었고... 그리고 왕종현씨나 지무영씨 회의한다고 그러면 퇴근해서 가고, 노대(노동자대회)다 이런 거 있으면 내가 아는 사람 있으니까 가서 만 원짜리 밥이라도 사주고, 그 사람들은 계속 하고 있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까... 설 때 만 원짜리 술이라도 하나 사주던지... 이런 생활을 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동지들과 계속 연결고리를 끊지 않았던 게 믿음 아니었나 생각해요. 동지들과의 믿음 그리고 내 자신과의 믿음...”

 

해고 생활이 1년 쯤 이어지던 2001년 연말 중앙노동위원회로부터 부분 복직 판정이 나온다. 업무적 특성을 이유로 김인선만을 불법파견으로 인정해서 SK로 복직하라는 판정이었다. 그래서 SK는 12월 25일자로 복직을 시켰지만, 과천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인천 발령을 내린다.

 

“그때 ‘나 혼자만...’ 이러면서 좀 무서운 것도 있고... 그래도 동지들이 ‘가서 기죽지 마라. 뒤에는 세 명이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해결하자 이래서 갔죠. 갔더니 사람들 대우도 좋고, 별일 없이 잘해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집에서 인천까지 갈려니까 맨날 지각했어요. 내가 회사 사람이라도 ‘제는 왜 맨날 지각해?’ 이랬을 거 같애요. 다섯 시 반에 딱 첫차를 타고, 출근이 여덟 시 반까진데, 거기가 인천 끝 항동이에요. 바닷가 앞에... 지하철 내려서 버스를 타고 종점이에요.

첫날부터 소장이 불러가지고 맨날 나한테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해요. ‘너 민주노총 탈퇴해라’ ‘이제 복직했으니까 조용히 있어라’ ‘걔네들 만나지 말아라’... 저는 그때서야 탄압을 경험한 거예요. 그때가 22살 이었거든요.”

혼자 복직한 이후 남은 3명과 인사이트 담당이었던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조직국장이랑 더 자주 만나 회의했어요. 사측이랑 계속 면담도 있었고 호봉 누락부분도 있었고... 퇴근해서 서울 올라오면 저녁 8시 넘어서도 회의하고 저녁 먹고 그랬죠. 연고지 없는 인천으로 발령받았으니 심적 부담도 앞으로의 일들로 무서움도 있었어요. 그래서 복직투쟁 때보다 더 많은 회의에 참석을 했죠. 그러다보니 다들 가정도 있고 회의 마치고 나서 늦은 시간 각자 집으로 가는 길에 인사이트노동조합 담당자인 화학섬유연맹 조직국장이 데려다줬는데... 조합원 외에 이야기하기 편한 사람인데다 우리 실정도 잘 알고 이야기도 통하고.... 그래서 연애를 시작했죠.”

 

그러나 회사와 노조가 각각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진행한 결과 중노위 판정이 뒤집혀 김인선은 다시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2002년 7월에 여름휴가를 갔어요. 신랑이랑 결혼하기 전에... 우리 외가가 여수라 오동도를 가서 같이 밥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신랑이 어디서 전화를 받아요. 신랑이 저한데 할 말이 있데요. ‘뭔데?’ 이러는데 ‘너 해고됐데...’ 그러더라고요. ‘왜?’ 그러니까 행정법원에서 졌데요. 거기서 한참을 울었어요. 저녁으로 떡만두국을 먹고 있었는데.... 그 뒤로 떡만두국 안 먹어요.

휴가 끝나고 회사에 왔는데 담당 대리가 법원 판결 나온 걸 보여주면서 ‘이렇다. 그래서 나가줘야 되겠다’ 그래서 나는 ‘나갈 필요 없다. 나는 이미 복직했고, 이거는 계속 가는 거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퇴직서류를 계속 갖다 주는 거예요. 저는 일 없어도 그냥 출근해서 앉아 있다가 퇴근하고... 그게 작전이었거든요. 그런데 1주일도 안돼서 정문에서 막더라고요.

그날은 제가 정말 오열했어요.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그때야 ‘이런 게 정말 해고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첫 번째 해고당했을 때는 뭣 모르고 당했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 채권자들한테 빚 갚으라고 많이 당했죠, 복직해서 의료보험 뜨니까 연락 끊었던 카드회사에서 맨날 전화가 왔죠, 월급을 받아도 빚을 갚기도 힘들고... 그런 상태에서 두 번째 해고를 당한 거예요.”

 

김인선이 복직을 하던 2001년에는 SK노조에 처음으로 민주집행부가 당선되면서 변화의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집행부는 SK인사이트코리아노조의 투쟁에 함께 결합하고 있었지만, 현장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한계가 많았다.

SK노조 조합원 신분이었던 김인선은 노조 신분보장기금을 통해 생계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해고자들은 생계비 지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노위, 중노위, 행정소송까지 계속된 패소에 희망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지무영 위원장마저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을 쉬고 있는 등 매우 힘겨운 때였다.

 

“그때 신분보장기금이라는 게 있었어요. 통상임금 기준으로 130만원인가 받았어... 근데 그때도 어용대의원인가 있겠죠? ‘130만원이나 받으면서 투쟁은 안 하냐?’ 그러면서 논란이 많았어요. ‘노동조합 와서 복사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 게 있어가지고...

그해 11월에 결혼해서 신혼이었는데, 1주일에 4일을 울산에서 살았어요. 차비도 내 돈으로 나가고, 울산에 숙소도 없었어요. SK가 100%다 남성 동지들 이다보니... 그리고 노동활동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활동하는데서 숙식해결이 어려웠어요. 노동조합도 신분보장부분만 생각했는지 집행부도 얼마 안 됐고, 신경써주는 간부도 없고, 저도 멀리 있고 해서 대책이나 투쟁 상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뭐든지 혼자 해결했어요. 그때 당시 월세방 보증기금도 없을 뿐더러 월세도 힘들었고... 그래서 찜질방을 찾아 다녔죠. 그때 끄때 해결했죠. 어느 날은 114 안내를 통해 찜질방을 찾아갔는데 남성전용 안마시술소여서 놀라서 밤거리를 헤매기도 했고... 어느 날은 아는 분이 자기네 동네에 여성전용 찜질방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잠자는 데가 없어요. 정말 찜질만 하는 데예요. 심지어 외진 찜질방에는 평일에 손님이 없어요. 남녀가 자기네끼리 애정행각을 하는데... 정도가 지나쳐 수치스럽고 해서 뛰쳐나와 신랑한테 전화해서 서울 간다고 밤새 울고 그랬었어요.

나중에는 스트레스에다가 잠을 못 자서 대변을 못 보는 거예요. 노동조합에서는 제가 채용직 간사도 아닌데 무슨 일을 시키겠어요. 투쟁활동이라도 있음 하겠지만, 현장도 아주 미비했고, 제가 전임자도 아니고... 제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었어요. 그냥 얼굴 도장만 찍는 거예요.”

 

그렇게 힘겨운 해고 기간을 1년을 더 보낸 2003년 7월경 고등법원에서 SK인사이트코리아가 위장도급이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해고자들은 전원 SK로 복직을 하게 되면서 기나긴 해고 생활이 마무리 된다. 복직 이후 출산과 육아 등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회사로부터 탄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 자리는 한 명만 있는 자리예요. 대부분 기업들이 팀원에 한명이 여사원이라 모든 일을 그 여사원이 하죠. 해고된 뒤 채용된 다른 사람이 있잖아요. 함께 복직된 남성 동지들은 자기 자리를 다 찾아갔어요. 문제는 제가 하던 일이 회계란 말이죠. 저는 일을 안 주는 거예요. 2003년 8월에 복직을 했는데, 여름휴가 지나고 추석 지날 때가지는 일 없는 거 몰랐고... 그러다가 2004년 1월에 애를 가졌고, 그 다음에 11월에 낳았으니까... 3개월 산전 휴가... 그러니까 그 해가 또 넘어가잖아요.

노동조합도 3년이 지나서 (민주집행부가) 재선 됐을 때고, 나도 애 낳고 슬슬 여유를 가졌을 때고... 자리도 잡히고 있다 보니 일도 없고, 딱히 활동도 없고, 생활은 나아지는 게 없고, 동지들 안에서도 임금격차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질도 달라 있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애 낳고 몸이 안 좋아 간수치가 올라가는 질병이 생겼는데... 이때가 기회다 싫어 회사는 또 말도 안 되는 ‘식판 따로 써라’ 부터 시작해서 ‘그 질병은 낫지 않고 옮긴다’ 등 개인적인 탄압이 들어왔죠.

새로운 소장도 노조 탄압하려는 사람이 왔어요. 이 사람이 어느 정도 무식하냐하면 그 소장 와서 제가 정신병원에 다녔어요. 어느 정도 괴롭히나 하면... 제가 2층 관리자들 틈에 있는 게 그 사람들 보기에 꼴 보기 싫거든...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지시가 와서 책상을 휴게실로 빼요. 그거를 ‘니 업무가 이러니까...’ 하면서... 나는 일도 없는데... 사람이 사람한테 ‘너 있으니까 불편하다. 그러니까 책상 내려가라’ 이러면 확 돌아버리죠. 기분 나쁘죠.

그것 갖고 싸워서 제대로 방어를 했어야하는데, 문제는 간부들이 대체가 미흡해서 또 상처받고... ‘책상은 절대 못 뺀다. 이거는 김인선씨 탄압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회사는 업무에 대해서 말할 거 아니에요. ‘업무가 출하실이랑 가까우니까 거기에 붙어있어야 한다. 공간은 최대한 꾸며주겠다’ 그러면 그걸 맞받아쳐야 되는데, ‘업무분장표를 내줘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판단하겠다’ 이래요. 그런데 업무분장표는 걔네가 만들 수 있어요. 당연히 바라는 게 그건데... 그래서 결국 책상을 뺐어요. 어이없게...

그런 사소한 일이 생기고 처리하다보니 나만 괴로운 거예요. 나만 앉아서 일도 없는 게 사람이 미쳐버려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계속 자해해요. ‘내가 무능한 년이다. 내가 죽어야지’ 하면서... 그런 시점에 애 낳고 몸도 마음도 힘들고. 신랑도 매일 밖으로 활동 하다보니까... 생활고 힘들죠, 육아문제, 활동문제, 사업장에서의 소소한 탄압 등... 복직을 해도 경제적으로 다른 동료들 보다 여의치 않다보니 분유 값도 어쩔 땐 힘들어서.... 내 자신도 너무 초라해, 같이 얘기할 여성 동지도 없어... 그래서 맨날 우울해가지고... 퇴근할 때 전동차가 막 오면 ‘이렇게 하면 뛰어드는 건데...’ 이런 생각도 해보고... 혼자 막 그런데 빠지면 끝도 없어요.

그리고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삶의 여유로워 ‘우리 애 학원 어디 보낼까?’ ‘어디 놀러갈까?’ ‘차는 뭐가 나왔다는데...’ 이러고 있고... 나는 생활이 어려운데 어디 ‘후원금 어떻게 하면 줄일까?’ 맨날 가계부에 이런 거 적고 있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안 그러려고 그래도 자꾸 비교가 되는 거야... 그런 것 때문에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데다 책상 빼는 사건이 있었지... 나는 ‘해고 두 번 됐는데, 까짓 거 세 번 못해. 이번에 해고되면 여성단체라고 활동해 버러지 뭐’ 하면서 이제는 나도 빽이 생긴 거예요. 다른 동지들이 다 나한테 빽이야. 그런 각오로 ‘이제는 한 번 쳐 봐야 되겠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활동가가 되는 거지... 그런데 받쳐주는 간부들이 그렇게 일을 처리해버리면 나는 완전히 미쳐버리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그건 안 돼’ 하면서 드러누워 버릴 수도 없는 분위기...

무슨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솔직히 나도 삼성과 싸우는 동지처럼 싸워야 되는데... 투쟁하는 데는 수위가 있어야 되고, 뒷받침이 있어야 되요. 그런데 미친 척 하고 나가서 ‘기본급을 올려 달라’ 이렇게 혼자 할 수는 없어... 상대 안 해주면 그만이잖아요. 그런 것 때문에 오는 그런 거...”

 

정규직으로 다시 복직된 김인선은 생계의 어려움이 계속 이어졌지만, ‘힘들었을 때를 도와준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놓지 않았다.

 

“저는 왜 이렇게 열심히 하게 되냐 하면... 옛날에 스스로 생각하면서 ‘내가 돈이나 시간이 생기면 더 하는 게 맞는 거 갔다’ 그랬어요. 왜냐하면 그때 내 이름도 모르면서 인사이트라는 이름으로 도와준 사람도 많았을 거예요. 나는 잘 모르지만... 그때 민주노총 큰 행사하면 모금통도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때 복직해서 잘 몰랐어요.

사람이 과거에 힘든 거를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제 지론은 그거거든요. 철폐연대(불안정노동철폐연대)나 이런데 행사하면 내 배고플 때 생각하고... 옛날에 해고 돼서 선물 못 들고 갈 때, 추석이라고 다 그런 거 들어와서 들고 가는데, 속이 썩어져 나갔어요. 해고 된 게 억울한 게 아니라 ‘나는 선물세트도 못 받고...’. 왜냐하면 내가 우리 식구들 선물세트 다 갖다 주고 그랬어요. 내가 그때 생각해서 장기투쟁사업장 있으면 이름 없이 그냥 선물세트 보내고 그래요. 그때 생각에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애 있는 사람들은 분유 값에 울 거고, 몸 아픈 사람은 약 값이 없어서 울 거고...

그리고 복직해도 내 생활이 달라진 게 없어요. 나는 노무사 비용을 못 줬어요. 1년 동안 울산에서 차비고 뭐고, 밥값이고 뭐고 다 쓰다보니까... 없는 사람들은 목돈이 들어와도 크게 들어와야 빚도 정리되고 그러는데, 나는 총 받은 게 2천만 원도 안 되는데, 다 이자만 내고 지금도 신용불량자예요. 신용회복위원회에 못 갚아가지고 작년에 신랑까지 신용불량자 만들었어요.

여름에 청바지 두 개로 버틴 적도 있어요. 옛날에는 좋은 회사 다니면서 정장만 입고 그랬는데, 투쟁하면서 애 낳고, 이제는 나보다 못한 동지들 도와주다 보니까 그런 돈이 너무 아까운 거야. 차라리 그 돈으로 이랜드 투쟁이나 장투사업장 식대 대주는 게 더 났고, 어디 차비 대주는 게 났지... 지금 그렇게 됐어요. 나도 좋은 거 사고 싶은 게 많지... 내 새끼도, 내가 못했으니까, 최고로 해주고 싶고...”

 

“항상 신경은 쓰고 있어요. 휴가내고 참석한 적도 있었고... 과천에 코오롱이 천막농성을 했잖아요. 우리 회사 위치가 기름회사다 보니까 산속에 있어요. 차가 없으면 출·퇴근이 힘들어요. 그런데 나는 가난해서 차가 없잖아요. 점심시간에 과천까지 나오려면 힘들어요. 그런데 경마공원에 어디서 투쟁한다 그러면 음료수라도 날라요. 점심 굶어도 나는 상관없는 거야. 코오롱 농성하는데 바리바리 빵하고 음료수 사가지고 가서 아무도 없어도 천막에 넣고... 나는 빨리 빨리해서 1시 전에 와야 하니까... 더 열악한데 있잖아요. 여성, 이주 이런데... 나도 모르게 혼자 고민하고 있어요. 나는 비정규직 출신의 정규직이잖아요. 그래서 그 심리를 알아요. 내가 누구보다도 코스콤이나 뉴코아 이랜드 이런데 가서 마이크를 잡고 내 투쟁도 이야기해주고 연대해줘야 되요.

그런데 생활하다보니까 한계가 있고, 퇴근하고 가면 다 끝나있고, 뒷풀이 가서 몇 만원 내주는 거고... 그런 한계가 있어서 요즘은 신랑하고 ‘너 이틀, 나 이틀’ 이렇게 싸우면서 하려고 해요. 그런데 쉽지가 안내요.”

 

20대의 10년을 힘겹게 보내고 정규직으로 다시 돌아온 현장에서 김인선은 한 활동가로서 자기 자리를 잡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부채 때문에 신랑까지 신용불량자 만들고... 연봉 몇 천만 원짜리 사람이 청바지 두 개를 입고... 이거 되게 심각한 거예요. 그런 게 너무 답답하고 한탄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이제 뭔지를 아는 거지... 구조의 문제라는 걸... 내가 아무리 돈을 모아도 또 한 번 해고를 당한다면 또 어려워지는 거고... 지금만 보는 게 아니라 앞을 보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움직이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뭔가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고... 이게 솔직히 40대 활동가들이 쉴 때 생각하게 되는 건데... 그게 이미 28, 29에 왔어요.

옛날에는 활동하는 신랑 밑천 대주고, 시간 내주고 그랬는데... 나도 직장 생활하고 조직생활 하다보니까 나도 만날 사람 있어야 되고, 나도 조직 활동 해야 되요. 화섬이 사업장을 여러 군데 만나야 되고, 단협에 들어가면 언제 끝날지 몰라요. 신랑이 단협 하다가 애를 위해서 뛰어 나올 수는 없잖아요. 누가 애를 봐주지 않는 한 활동하는데 한계가 있긴 있어요.

그런 게 시간 조절인 거 같애요. 많이 뛰지 못할 때는 1주일에 한 번이라도 교육센터에 앉아 있게 되더라고요. 발로 뛸 수 있는 때는 애가 크니까 집회장에 데리고 갈 수 있어요. 집회장에 가니까 나도 모르게 ‘마이크를 잡아서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생각해요.

우리 신랑한테도 얘기하지만... 학생운동 한 거 좋고, 민주노총 활동 하는 거 좋은데, 나처럼 현장에 있는 사람들 얘기가 조합원들한테 먹힐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은 해고자나 이런 사람들 상담을 올 때, 아무리 노동운동을 20년 동안 했다고 해도 항상 겸손하게 해야 된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기에는 당신 해고된 사람들 기분을 모른다. 당신 해고돼 본 적 없잖아?’ 이러거나... 아니면... 활동가들은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어요. 현장의 상황을 자기 딴에는 많이 파악한다고 해요. 그 사람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들어간 거라서 그 조합원이 보여. 하지만 나 같은 조합원들은 그게 잘못됐다고 그래도 그게 생계예요. 그래서 활동가하고 부딪히는 벽이 있어요. 그런 게 잘 융합이 돼야죠. 나 같은 사람이 현장에서 활동가 수준으로 다가선다면 그게 더 먹힐 거 같애요.

그래서 그런 걸 한 번 해볼까... 그래서 남성 동지들한테 시도를 해 봤는데 잘 안 돼요. 내가 일부러 ‘형’ 그러는 게 안 그럴 수 없어요. 안 그러고 내가 ‘대리님’ 그러면 항상 여자로 보는 거야. 술 먹으면서도 ‘노동조합의 꽃’이라고 그러고...

회사에서 단협을 맺은 보건휴가를 일방적으로 무급을 해서 그거 소송하고 다니는데... 단협에 여성에 관한 대책을 안 세우니까... 첫 문제 제기부터 해결까지 다 나예요. 물류센터에서 결혼하고 애 낳은 사람이 제가 처음이에요. 노조에서도 이천오백이 넘는 조합에서 여 조합원은 실상 저 혼자이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노동조합 간부도 아니고, 같은 동성도 아니야. 내가 민주노총 사람들 더 많이 아니까 급할 때 문제해결 차원에서 조언이나 연결은 해줘요. 그럴 때는 나를 불러요. 그런데 어떨 때 보면 아예 제외가 돼. 그래서 지금은 내 사업장 안에서 내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거나 문제해결 할 수 있을 때 ‘여자로 보는 게 아니라, 동지는 아니더라도 동료로라도 봐 달라’ 그런 걸 올해 만들어야 될 거 같애요. 집에서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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