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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복시계] 기조제기 : 중추섬멸전을 축으로 한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의 전개를!

'연쇄기업폭파'로 이름을 떨쳤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하 '무장전선')의 「복복시계(腹腹時計)」 2권에 실린 기조를 올립니다.

'무장전선'이 하자마구미 폭파에 대해 작성한 일종의 평가서로도 볼 수 있는데, 일본 제국주의의 '본국인'으로서 '속죄(혈채주의로 불립니다)'를 통한 자기해방을 지향했던 주장의 근거를 얼추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 일본을 폭파한 일본인(권혁태, 한겨레21, 2011.11.16)


「복복시계」 VOL. 2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KF부대(준)

<기조제기>

중추섬멸전을 축으로 한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의 전개를!

 

1.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1이 열어낸 지평

(1) 전술적 의의

 1978년 9월 28일, 도쿄지방재판소 701호 법정에 검사측 증인으로 하자마구미(間組)의 八田昌夫가 출석했다. 이 남자는 1975년 2월 28일 당시 서무과장으로, 지금은 총무부장인 듯하다. 검사의 “범인에 대한 피해감정은?”이라는 물음에 대해 “원한이 골수에 사무칩니다. 극형에 처했으면 한다”고 눈물을 흘린 후 변호인의 반대심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컴퓨터, 정보기기 기능은 9층에 집중되어있었다”, “데이터는 모두 불탔다. 프로그램 카드도 모두 파괴됐다”, “컴퓨터 설비 중 특히 비싼 자기테이프도 고열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컴퓨터 업무는 같은 해 6월까지 중단, 그 사이엔 다른 곳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9층의 복구는 6월 10일까지 이뤄졌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거래가 중지되진 않았지만 상처는 아주 컸다”, “피해액은 약 15억, 이는 건물, 시설의 피해액이라 정보적인 피해는 일절 포함되어있지 않다. 정보적인 피해는 셀 수 없을 정도다”…….

 1974년 8월,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은 테멩고르 댐과 그 부근에서 공사중이던 동서(東西) 고속도로 건설을 ‘인민의 이익에 반한다’며 규탄, 테멩고르 댐 건설현장으로 향하던 하자마구미의 자재반입 트럭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같은 해 12월 9일엔 테멩고르 댐 건설[현장의] 하자마구미 숙소를 무장공격해 일본인 1명이 사망했다. 이 투쟁의 전후, 쿠알라룸푸르의 일본대사관, 하자마구미, 미츠비시상사 사무소 등에 ‘댐 공사의 즉시 중지와 기술자의 총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반일 삐라와 요구서가 배포되었다. 이에 대해 하자마구미는 “완전한 보안대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공사는 하지 않는다”며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에 대한 반혁명 탄압을 현지 정권에 강력히 요구했다. 1975년 1월엔 일본대사관에 “일본정부가 댐 건설에 차관, 원조를 중지하지 않으면 일본인에게 좋지 않은 사고가 재발할 것이다”라는 경고문이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해 2월 14일, 하자마구미는 현지 반혁명군의 보호를 받으며 공사를 재개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3개 전투부대2는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12.9 하자마구미 공격 소식을 접하자마자 일본 제국주의 본국인으로서 이 싸움에 전투호응해 하자마구미의 테멩고르 댐 건설공사를 구체적으로 저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하며 즉각 준비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12.9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975년 2월 28일, 하자마구미 본사 6층(해외공사국), 9층(전산실), 오오미야(大宮)공장에 동시폭파공격을 감행했다.

 이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의 첫 번째 전술적 의의는 3개 전투부대가 처음으로 한 공동작전으로, 상호의 전사(戰士)적 신뢰관계 위에서 3개 전투부대의 총력을 집중해 기술성의 최고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1975년 들어 한층 강화된 적의 사전탄압적 경계체제를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가 [폭파공격을] 치밀히 계획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대담히 실행해 작전계획에 맞먹는 성공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 전술적 의의는 중추섬멸전에의 질적 비약의 실현이라는 점이다.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74.8.30 미츠비시중공업 폭파작전의 한계를 넘어섰다. 미츠비시중공업 폭파작전은 일본 제국주의의 중추적 침략기업인 미츠비시중공업에 대한 폭파공격이라는 절대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좌익적인 캄파니아주의(カンパニア主義)3‧상징주의에서 스스로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기에 폭파대상을 엄밀히 추리지 못하고, 중추섬멸전으로서의 작전을 세우지 못하고, 섬멸하면 안되는 행인을 다수 부상입힌 전술적 한계를 노정했다.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중추섬멸전의 방향에서 입안되었으며, 중추섬멸전으로는 관철되지 못했던 미츠이물산 폭파공격의 방향성을 계승, 발전시켜 미츠비시중공업 폭파작전의 캄파니아주의적, 상징주의적 한계를 명확하게 뛰어넘었다. 이러한 질적 비약은 무엇보다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12.9 전투와 무엇보다도 구체적으로 응해 육박전(肉薄戰)[을 만들어낸] 3개 전투부대의 사상적 내압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2) 전략적, 사상적 의의

 이렇게 일제 본국 안에 등장한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의 전략적, 사상적 의의를 우리는 현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① 먼저,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1978년 8월과 12월 9일의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에 의한 일제의 말라야 재침략의 첨병=하자마구미에 대한 무장공격을 일제 본국인에 대한 전투지령으로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전투호응한 것이었다. 즉, 바야흐로 일제 본국 중추에 일제의 침략활동에 구체적인 타격을 주는 사실행위를 통해 역사적으로나 현재적으로나 일제의 침략을 허용하고, 그에 기생해온 일제 본국인으로서의 반혁명성의 자기부정‧자기비판 실천을 관철해 피식민지화 공격을 받고 있는 아시아 국가 인민들의 혁명전쟁에 합류해 세계혁명승리의 사상적, 물질적 전제조건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② 일제의 ‘아시아→세계’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일거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신식민지주의 침략]은 쉬이 침략으로 비춰지지 않는 개별 기업의 장기간에 걸친 침략활동의 구체적 축적의 총체다. 때문에 우리는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의 총체를 형성하고 있는 개별구체적인 침략활동을 구체적으로 공격, 저지, 분쇄하는 개별적 전투의 구체적 승리의 축적을 통해 내외에 호응하여 일제를 타격하는 협격진(挾擊陣)을 구축해 일제의 생명선인 신식민지주의 침략을 총체로서 분쇄해야만 한다.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이 방향을 가리켰다.

 ③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개별 기업에 대한 무장공격이긴 하였으나 단순히 개별기업에 대한 공격전술의 차원을 넘어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 총체와 철저히 대결하는 전략적 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즉,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을 축으로 한 반혁명 전략을 구체적으로 파산시켜 세계제국주의 타도‧일제 격멸이라는 세계혁명전략을 물질화한 것이었다.

 말라야 ‘주변’개발을 위한 테멩고르 댐 건설은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의 전형이다. 말레이시아 경제의 껍데기뿐인 번영, 이는 미 제국주의‧영국 제국주의‧일본 제국주의의 금융‧독점자본에 의한 신식민지주의 지배가 만들어낸 것이며, 외국자본의 착취‧수탈 아래 인구의 80%가 극빈층이라는 상태가 만들어졌다(세계 제국주의의 중추 제국이 정치적으로는 주권국가로서 독립해 있는 주변 국가들을 자본수출‧무역‧경제원조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종속화하며, 현지 지배층과 유착해 현지 인민을 착취‧수탈하는 것이 신식민지주의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일제 금융자본이 더욱 더 현지 지배층과 결합해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을 추진해나가는, 현지 정권의 ‘공업화’정책을 금융적으로 뒷받침해 하자마구미에게 청부한 것이 테멩고르 댐 건설이었다.

 당시 말레이시아의 라작정권에겐 말라야 ‘주변’침략=테멩고르 댐 건설은 동서 고속도로 건설공사와 함께 ‘후진(後進)농업국’에서 ‘중진(中進)공업국’으로의 비약을 건 제2차 공업화계획의 알짜배기였으며, 그렇기에 그 성패는 라작 정권의 정치생명을 좌우하는 공사였다. 게다가, 그 이상으로 중요했던 목적은 테멩고르 댐 건설 및 동서 고속도로 건설 공사에서 테멩고르 협곡 일대를 호수 밑으로 가라앉히고, 원시림과 산악을 깎아내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근거지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테멩고르 댐 건설 및 동서 고속도로 건설 공사는 이러한 경제적 효과와 함께 게릴라 근거지의 파괴라는 정치적‧군사적 노림수가 있었다.

 라작 정권이 일제 금융자본의 엔화 차관에 기대 반혁명 공사에 쏟아부은 자금은 연간 4천만 달러에 달했다. 이와 함께 라작 수상은 1975년 6월 연간 2억 달러 규모의 테멩고르 방위 특별예산을 인가했다. 하나하나 라작정권의 테멩고르 댐 건설 공사에 중요했음이 명백하다. 이 공사의 성공은 자신의 정치‧경제적 지반을 굳히고,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힘을 죽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었기에 이렇듯 열정적이었음은 당연한 셈이다.

 한편, 일제에게 테멩고르 댐 건설 공사는 라작 정권에의 엔화 차관과 연결되었다. 즉 일제 금융자본에 의한 말레이시아 경제 지배력 강화, 신식민지주의 침략의 전략적 포석이었으며, 앞으로의 동남아시아 재침략의 성패를 점치는 시금석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제의 위신에 있어서도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공사였다. 말라야 현지와 일제 본국 안에서의 수많은 무장공격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1975년 7월 1일 해외경제협력기금이 총액 88억엔의 제2차 차관의 공여를 결정한 것은 그것의 표현이다.

 하자마구미의 말라야 ‘주변’ 침략을 선도하고 현지 정권의 창구역할을 한 것은 일제 독점자본의 중추부대=미츠비시상사였다. 미츠비시상사는 이미 전시하의 남베트남, 라오스에서 반혁명의 편에 선 공사경험을 가진 하사마구미의, 말 그대로 당시 전시 하의 공사경험을 샀다고 할 수 있다. 하사미구미에게 테멩고르 댐 건설 공사는 단순히 개별 기업의 청부를 받은 공사가 아니라 일제의 국가적 정치행위였기에 개별 기업의 이해를 도외시해선 안되는 공사였다. 동시에 불황‧국내 시장의 협소화에 따른 해외침략의 필연적 경향이라는 정세 가운데, 이 공사의 성패는 전시 하 남베트남‧라오스에서의 실적을 딛고 앞으로의 하자마구미 자신의 중동방면으로 손을 뻗을 해외전략을 좌우하는 전략적 포석이기도 했다.

 따라서 하자마구미에게 테멩고르 댐 건설은 설령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3번의 경고가 있었어도 무장공격을 받고 사원의 가족이 죽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공사였으며, 현지 반혁명군을 보채며 강행해야만 했던 공사였다. 하자마구미에 대한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공격은 틀림없이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의 반혁명적 본질을 폭로했다. 하자마구미는 현지 정권에게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철저한 탄압을 요구했고, 일제 반혁명군의 현지파견으로 전환해 현지 반혁명군에게 방위되며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그 반혁명성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말라야공산당 무장세력의 하자마구미에 대한 무장공격에 호응‧합류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3개 부대의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말라야 ‘주변’ 침략의 후방근거지인 일제 본국의 하자마구미 본사라는 침략활동의 중추를 무장공격함으로써 일제를 내외 호응해 협격하는 진형을 만들어내 침략활동에 구체적 타격을 주고 하자마구미의 간부를 통해 “해외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일로 해외 건설공사를 중지할 의향은 절대 없다(75.3.1자 마이니치, 부사장 竹内 인터뷰)”는, 일제의 아킬레스건의 위치와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의 반혁명적 본질을 말하게 했다.

 ④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말라야 인민의 혈채(血債)적 요구에 대해 일제 본국인이 진정으로 응해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

 일제 반혁명군은 말라야 점령중 수십만 말라야 인민을 살해해 방대한 양의 천연자원 등을 강탈했다. 그리고 그 뒤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라야 인민은 일제 본국인에게 피의 채무(血債)를 요구하고 있다. 말라야공산당은 말라야인민을 대변해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의 인민에게 범한 깊은 죄는 오늘날까지 아직 청산되지 않았고, 또한 일본 제국주의가 빌린 채로 산보다 높게 쌓인 피의 죗값은 오늘까지 받고있지 못하다. 29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민은 이 깊은 한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陣線報」 1971년 1월 1일자)”라고 말하고 있다.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일제 본국인이 몸을 내던져 목숨을 걸고 자신의 역사적‧현재적 반혁명성을 실천적으로 자기부정함으로써 말라야 인민의 혈채요구에 진정으로 응하려는 것이었다.

 하자마구미는 창업시부터 동아시아 제 국가 인민에 대한 일제의 침략 반혁명과 함께였으며, 그 한부분을 구체적으로 떠안아 일제의 팽창과 함께 팽창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자마구미는 먼저, 일제 본국에서의 철도 토목공사를 중심으로 일본인 하층노동자를 쓰고 죽이는 닭장같은 노예노동으로 토건자본으로서의 토대를 쌓았고, 일제의 조선침략의 개시와 함께 조선으로 침출(浸出)해 이후 조선인노동자도 쓰고 죽이는 닭장적 노동으로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의 목숨을 빼앗아(그중에서도 당시 신흥재벌인 닛치콘체른(日室コンツェルン)의 노구치 시타가우(野口 遵)의 조선수력전기KK와 가지마구미(鹿島組) 등과 함께 맡은 부전강댐‧장진강댐 공사가 유명하다-박경식 저「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하)」, 「조선인 강제노동의 기록」을 참조) 거액의 자본을 축적했다. 또 하자마구미가 조선에서 맡은 공사의 다수는 일제의 침략식민지배의 근간이 되는 군사철도망이었다.

 게다가 일제의 중국대륙에의 침략확대에 발맞춰, 하자마구미는 일제 반혁명군에 딱 달라붙어 중국대륙으로 침출, 반일 빨치산의 무장공격으로부터 일제 반혁명군에게 방위받아 중국인 노동자를 쓰고 죽이는 닭장적 노예노동으로 다수의 중국인 노동자의 목숨을 빼앗아 거액의 자본을 축적했다.

 1941년 이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 확대에 발맞춰 조선‧중국대륙에 그치지 않고 타이완‧태국‧필리핀‧버마로도 침출해 일제 반혁명군에 대한 전면적 군사협력을 행하는 동시에 일제 본국 안에서도 조선인과 중국인(약 2천명)을 강제 연행해 쓰고 죽이는 닭장적 노예노동으로 군사 관련 공사를 진행해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약 백수십명)을 학살해 거액의 자본을 축적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하자마구미는 다른 토건자본과 공모해 침략전쟁중의 조선인‧중국인 강제연행, 학대, 학살의 책임추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조직적으로 증거인멸을 꾀했고, 역으로 거액의 국가보상을 강탈했다. USA 반혁명군의 공사를 맡는 것으로 전후 발전의 토대를 쌓은 하자마구미는 일제 본국 안에서는 일본인 하층노동자를 착취‧학살(예를 들면 1969년 도쿄의 아라카와(荒川) 방수로의 제2신요츠기바시(第二新四つ木橋)건설현장에서 8명의 타관살이 노동자를 죽인)하며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내전상태의 남베트남, 라오스, 말라야에 침출해 현지 반혁명군과 결탁, 혁명세력과 적대했다.

 하자마구미의 오늘날은 동아시아 국가 인민과 일제 본국인 하층(무산(無産))프롤레타리아트의 피와 시체 위에 쌓아올려진 것이다.

 ⑤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하자마구미의 동아시아 인민에 대한 침략 반혁명사, 그중에서도 조선인‧중국인의 강제연행‧학대‧학살에 대한 역사적 원념을 풀고, 1945년 10월 키소다니(木曾谷)에서의 중국인의 반일무장봉기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발전한 것이었다.

 ⑥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은 하자마구미의 닭장적 노예노동으로 혹사당하고 학살당한 산야(山谷)‧가마가사키(釜ヶ崎) 등지의 일제 본국인 하층(무산)프롤레타리아트의 원한을 풀고, 일제의 토건자본에 착취당하는 한편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의 첨병이 되었던 일제 본국인 하층(무산)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해방하는 투쟁의 근원적 방향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2. 요구되는 과제

(1) 전투지령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 이후, 일제의 신식민지주의 침략하의 인민‧전사들은 우리 일제 본국인에게 여러 전투지령을 내리고 있다.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1976년 2월 23일, 민다나오섬 북서부의 공업도시 일리간(Iligan)시에서 모로민족해방전선 전사가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을 무장공격했다. 이 수력발전소 공사는 필리핀 전력청이 아시아개발은행의 융자와 일제 침략기업(수도관 관계인 쿠리모토 철공소(栗本鉄工所), 댐건설을 위한 쿠마가이구미(熊谷組) 건설기계납입 유지를 위한 히타치건설기계(日立建設機械) 등)의 협력을 얻으며 이뤄진 것이다. 이 공사는 토지매수를 둘러싸고 지역 이슬람교도의 반대투쟁에 맞닥뜨려 반년이상 늦게 시작되었으나 마르코스대통령의 지상명령으로 육군 1개대대가 경비했다.

② 1977년 7월 23일, 서(西)파푸아독립군은 새벽을 기해 그래스버그(Grasberg)광산(프리포트‧인도네시아 회사―일본의 광산 8개사가 매광 융자를 통해 개발)을 무장공격했다. 서파푸아독립군 지도하에 광산에서 사용하는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한 게릴라들은 먼저 광산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광산에서 항구 104km에 걸쳐 설치된(광산은 해발 약 3천미터의 지점에 있다) 직경 10cm의 광물가루 운송 파이프라인을 파괴했고, 이와 병행해 산 아래에서 28K 떨어진 석유저장소 및 송유시설 등 광산의 제 시설들도 폭파했다. 이 공격으로 프리포트‧인도네시아 회사는 실로 백만 달러 가량의 피해를 입었고, 매일 일제 본국을 주요한 도착지로 선적하는 770만 달러 분량의 구리는 항구에 놓여진 것부터 선적해야 했다.

③ 1978년 5월 17일, FARN(민족저항무장세력)은 INSINCA사장 松本不二雄를 체포했고, 같은 해 12월 7일엔 INSINCA이사 경리부장 長鈴木孝和를 체포했다. INSINCA는 엘살바도르에서 최대의 방적(紡績)합병기업으로, 1967년 설립돼 일제측(도레이(東レ), 미츠이 물산(三井物産), 쵸리(蝶理), 기센(岐染))과 엘살바도르 산업개발공단이 각자 50%의 출자, 자본금 약 26억엔으로 일제 본국에서 합성섬유 원료를 수입해 현지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사용해 폴리에스테르‧레옹 직물을 만들어 니카라과, 코스타리가 등 중남미 5개국의 공동시장에 팔아 이윤은 일제 본국에 송금하는 3국간 무역을 이용한 전형적인 신식민지주의 기업이다. 엘살바도르의 인민은 “일본인은 쥐어짜낼 만큼 쥐어짜고 이익은 전부 일본으로 가져간다”고 비판하고 있다.

④ 1978년 11월 5일, 이란 인민이 이란일본국제은행(도쿄은행이 20%출자), 일본 음식점 벤케이, 미츠이물산지점을 공격했다. 반다르샤푸르의 석유 콤비나트(미츠이물산이 출자) 건설현장에선 ‘일본인은 돌아가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전투지령에 대해, 유감스럽게도 우리 일제 본국인은 호응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점을 통렬히 자기비판해 하루빨리 전투체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일제 본국인은 총체로서 역사적으로나 현재적으로나 피식민지 인민에게 기생하고 있기 때문에 일제 중추를 무장공격하는 사실행위로 스스로의 역사적‧현재적 반혁명성을 실천적으로 자기부정하는 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세계혁명의 주체로 형성할 수 있으며, 반일이라는 대의에 뜻을 가지고 피식민지 인민의 전투에 일제 본국 안에서부터 호응‧합류하는 것을 통해서만 세계혁명의 전망을 열어젖힐 수 있기 때문이다.

 

(2)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물어지고 있는 실천적 과제들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첫째,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이 열어젖힌 중추섬멸전에의 지평을 단호히 계승, 발전시켜 일제 중추에 제2, 제3의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을 실현시킬 것.

 둘째, 이러한 중추섬멸전을 축으로 해 반일무장투쟁을 더욱 대중화시켜 그 저변을 확장해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으로 발전시킬 것.

 셋째, 이러한 중추섬멸전을 축으로 한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비공연 지원망을 일제 시민사회 내부에 정착, 확대시킬 것(왜냐하면 전전 부대의 질적 비약과 양적 확대는 비공연 지원망의 확대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넷째, 해외 반일무장세력과의 조직적 결합.

 조사 부족‧훈련 부족‧준비 부족 상태인 채로 성급하게 어중간한 전투를 치르는 것은 피해야만 하지만, 전투를 점점 뒤로 미루는 대기주의도 부정되어야 한다. 반일무장투쟁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충분한 조사, 충분한 훈련, 충분한 준비가 있다면 몇 명이서라도, 또는 혼자서라도 승리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반일무장투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반일 병사로서의 첫 걸음을 망설임 없이 실천으로 내딛는 것이다.

 동지들이여! 즉각 비공연 지하체제를 구축해 중추섬멸전을 축으로 한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을 전개하자!

 벗들이여!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의 승리의 열쇠를 거머쥐는 비공연 지원망을 광범위하게 만들어내자!

 

 

3. 우리의 임무

 75년 5.19 탄압에 의해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은 그 조직성이 해체되어버렸다. 너덜너덜하게 해체되어버린 우리의 극복을 향한 작업은 먼저 개개인의 자백‧굴복의 자기비판‧총화로 물어졌다.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해 개개인이 자백‧굴복의 자기비판‧총화를 심화하는 가운데 진정한 의미로서의 조직재건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리의 자백‧굴복의 극복‧조직재건을 향한 노력을 도와준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맡은 투쟁, 그중에서도 키소다니‧테멩고르 작전에 대한 긍지이며, K전사의 5.19 투쟁이며, F전사의 6.25 투쟁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옥중 실력투쟁과 감옥 안과 밖을 관철하는 상호비판―자기비판을 축으로 한 사상투쟁이야말로 극복을 향한 지렛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K전사‧F전사의 유지를 확고히 계승하는 뜻을 담아 우리가 재건을 목표하는 조직의 이름을 KF부대로 이름지었다.

 옥중 공연부대를 강요당하는 우리는 스스로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첫째, 반일무장투쟁을 전망하며 일제 권력과 실력으로 대결하는 옥중투쟁의 전개. 이 옥중투쟁을 통해, 감옥 안팎의 인민을 반일 조류로 조직화할 수 있다.

 둘째, 반일 조류의 실천적 무장화와 노선적 심화를 위한 사상투쟁→정보‧선전활동.

 우리는 이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복복시계(腹腹時計)」를 발행한다. 우리는 「복복시계」의 발행을 통해 무엇보다도 반일 조류의 무장력 강화와 사상적 단결의 심화를 추구한다.

197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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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75년 일어난 하자마구미(間組) 본사와 오오미야 공장 동시폭파사건에서의 작전명.텍스트로 돌아가기
  2.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텍스트로 돌아가기
  3. '대중운동'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급진(혹은 과격)노선에서는 부정적인 어조로 사용되었다는 느낌만 잡으면 될 것으로 보인다. -옮긴이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