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했던 '자기만의 방'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가 건축가였다면, 그녀는 어떤 집을 지었을까?
신축 풀옵션 원룸 건물을 지었을까?
(나는 버지니아 울프는 읽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독립할 무렵, 그냥 책 소개만 보고도... '아 멋지다. 역시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해'라고 멋대로 감동한 적이 있었을 뿐. 나는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만의 방'에 대한 얘기를 하는 중이다.)

'자기만의 방'만 필요할까?
자기만의 거실, 욕실, 화장실, 주방, 서재, 옷방, 정원, 수영장.... 은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에게 사적인 공간은 얼마나 필요한 것일까?


루이스 멈포드의 눈에는 그처럼 프라이버시라는 개인적 사람의 영역도 없고, 연인들 간의 내밀한 관계도 보장되지 않는 중세도시의 가족이 근대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세계로 표상된다. 즉 중세의 가족은 부모자식이나 핏줄을 나눈 친척은 물론, 함께 살며 일하는 도제나 노동자들, 그리고 하인들까지 포함하며, 그들의 공통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방적인 단위였다. 또한 노동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아서, 주거공간과 작업장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

작업장이 가정이었고, 상인의 상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 구성원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방에서 일하고, 같은 방에서, 혹은 공동 홀에서 잠을 잤으며, 가족기도에 참가하고, 공동오락에 참여했다. ... 조합 자체도 일종의 가부장적 가족이었으니, 가정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도시정부와는 전혀 별개로 형제들에 대한 작은 범법 사건을 처벌하고 벌금을 물렸다. ... 이 노동과 가정 생활의 친근한 결합은 중세기 가정집의 살림살이를 좌우했다. ...

하나의 가족과 그 외부자의 경계도 매우 가변적이고 약했다. 친소관계에 따라 함께 거주하는 가족의 외부는 친지와 친구, 이웃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자유로웠으며, 많은 경우 서로 초대하고 방문하며 함께 지냈다. “로지아(loggia), 이웃집, 널찍한 벤치로 둘러싸인 도시의 광장들은 날씨가 좋은 아침이나 저녁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고, 이 집 저 집으로 자주 오고 갔다. ... 손님에 대한 이러한 환대는 잘사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덜 잘사는 사람들도 재력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집을 친척과 친구, 이웃에게 개방했다.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건 방랑하는 외부인에 대해서도, 적절한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하는 것이 귀족들의 경우 관대함과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

우리는 주거공간의 역사를 발전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사적 욕망’이나 ‘사생활의 욕망’이라는 뿌리로 귀착시키려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결별해야 한다. 이전의 모든 주거공간을 오직 사생활의 공간을 완성하기 위한 전사(前史)로서 취급하는, 그럼으로써 사생활 자체를 주거 공간에 내적인 본질로, 심지어 존재 자체의 본질과 결부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결별해야 한다. 또한 사생활 내지 사적공간을 일종의 ‘인간 조건’ 내지 주거공간의 초월적 목적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분명하게 결별해야 한다. ‘사생활’에 관한 19세기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의 방식, 새로운 주거공간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하여.

- 이진경, <<근대적 주거 공간의 탄생>> 중에서


유럽의 중세를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과거와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방 한칸에 한가족이 몰아서 자던 주거형태...
조그만한 자취방이나 기숙사에 여러명이 같이 살던 주거형태...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돈 없는 학생 시절에 일시적으로 있을 뿐인 주거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왠지 그 때가 즐거웠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이러한 주거형태는 현대 사회에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일까?
대학가 앞 '풀옵션원룸'의 확산은 대학생들과 그들의 집단에 가져온 효과는?

돈없는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6명에서 18명까지도 한 방에서 자는 도미토리 형식의 주거형태는 어떠한가?
여행지에 대한 온갖 정보가 교류되고, 낯선 사람들과 짧은 언어만으로도 소통의 기쁨을 느끼는 공간...
이러한 공간에서 쭈욱 사는 것은 생각할 수 없나?


미구엘이라는 이 멕시코인은 미망인의 아들이었다. 미망인은 무를 재배하여 그것을 부근 도시에서 장사를 하는 어떤 사기꾼 같은 상인에게 팔아 4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들 외에도 언제나 외부인들이 미망인의 집에서 식사하고 잠을 잤다. 미구엘은 뮐러씨의 초대로 독일에 갔다. ...
독일에 간지 6개월 뒤에 써 보낸 편지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뮐러씨는 진짜 신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일인은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 가난뱅이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타인을 돕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집에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습니다.
미구엘의 견해는 과거 천 년간의 상황과 인간의 태도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활의 자립과 자존에 뒷받침된 가정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활자립을 기초 지우는 여러 수단을 빼앗겼으며, 타인에게 아무런 생활자립의 원조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능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태도 말이다.

-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중에서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구분,
소비의 공간과 생산의 공간의 구분.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구분.
가족과 이방인의 구분.
이러한 구분을 가로지르는 주거형태는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