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먹고 살 궁리...

요즘 하는 거라고는 '먹고 살 궁리'밖에 없는데... 쉽지 않지만 재밌긴 하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하는 문제를 돈 버는 걸로 환원해서... '돈 벌어야지...' 해 버리면 답은 쉽다. 이 때부터가 지옥이지만.

하지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한 무슨 먹거리를 누구와 함께 먹고 또 버릴 것인가' 라는 질문과...
'어떤 동네에서 어떤 집에서 어떤 가구를 놓고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고 누구와 함께 이웃해서 살 것인가'하는 질문은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이사를 열흘 정도 남기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건축에 관한 글들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다.

오늘도 재밌는 책 한 권 발췌...
녹색은 내 코멘트



서윤영, <<집 宇 집 宙>>, 궁리 중

74p
1661년 정승 이경석, "선조들이 집무하는 방들은 모두가 마루방으로서 온돌은 내간용으로밖에 쓰지 않았는데, 근자에는 모두 온돌로 바꾸니 그 구들을 덥히기 위한 땔감의 낭비가 심합니다."
18세기 초 실학자 이익, "마루방에 잘 때는 병이 없었는데, 온돌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병이 생기고 있다."
19세기 초 실학자 이규경, "얼마전까지만 해도 공경귀척의 큰 집에도 온돌이 불과 한두 칸밖에 없어 노인이나 병자의 거처로 쓰였을 뿐, 여타 식구들은 마루방에서 잠을 잤다."
박지원, <<열하일기>> 중, 온돌의 결점... 바닥이 고루 따뜻해지지 않는 점, 벽체가 허약하여 틈새가 생긴 곳으로 역풍이 들어와 연기가 가득 차는 점, 온돌을 난방하기 위해 많은 연료가 소비되는 점...
서유구... 연료의 낭비, 수목의 남벌과 그에 따른 홍수와 산사태의 피해, 화재 발생의 우려,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한 방에 많은 가족이 기거하면서 겪게되는 불편함...

내노라 하는 실학자들이 온돌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다는 것이 재밌다.
주거의 형태, 에너지의 문제와 그에 따른 사회, 건강, 생태의 문제는 조선시대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던 듯.
집을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에너지와 탄소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난방의 문제를 검토해야할 듯.


86p
온돌은 단순히 구들을 데워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것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우리 생활을 변화시켰다. 우선 실내에서 신을 벗는 독특한 문화를 낳았다. ...
둘째로 온돌은 공간의 가변성과 절약성을 낳았다. 민속촌에서 가서 옛 집들을 복원해 놓은 것을 보면 방의 크기가 매우 작다는 걸 느끼게 된다. 실제 한 칸 방의 크기는 그 폭이 여덟자(2.4미터) 정도로, 이는 20평형대 소형 아파트의 가장 작은 방의 크기와도 같다. 하지만 이방을 좁다고 느끼지 않은 것은 가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주택에서는 식탁, 책상, 소파, 침대를 놓고 살지만, 실내에서 신을 벗었던 탓에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일이 많았던 과거에는 이같이 덩치 큰 가구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옷을 넣어두는 옷장과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 밥을 먹는 밥상과 공부하는 책상만이 필요했다. 더구나 상 위에서 밥을 먹으면 식탁이고, 책을 펴 놓으면 책상이 되는 공간의 가변성과 그에 따른 절약성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실내에서 신을 신는 주거 형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
셋째로 아랫목이라는 자리 구분과 함께 보다 끈끈한 가족 중심주의가 발전했다. ...
넷째로 온돌은 ‘혜(鞋)’라는 독특한 신발을 만들었다. ...

현대의 바닥난방은 공간의 가변성과 절약성에 있어서는 아랫목 윗목이 있는 온돌 보다도 유리하다.
그런데 왜 아파트에서는 장롱, 책상, 소파, 침대 등 거대한 가구들이 공간의 가변성을 질식시키고, 보다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100p
개인에게 각자의 침실이 주어지는 것은 사생활과 개인위생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이후의 일로서, 그 전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침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메소포타미아 궁전,  이집트 왕궁,  로마의  고급 단독 주택, 유럽의 고대와 중세, 고려 시대 봉당 등의 사례가 아주 재밌지만, 너무 길어 생략)

고려 시대 봉당에서 중세 침실까지 가족이 하나의 침실을 사용한 것에 대해, 현대의 우리는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아 아주 불편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생활도 중세인의 눈으로 볼 때 매우 이상해 보일 것이다. ... 식사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일인 반면, 취침은 철저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취급되는 이분법의 이유는 사실 우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족 모두에게 개인 침실이 주어지고 심지어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노쇠하여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노인에게까지 개인 침실이 주어진다는 것은 중세 사람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중세 사람들은 사생활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홀로 있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왕따’를 두려워하듯,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홀로 남겨지는 것은 두렵고 피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현대에도 조금 흔적은 남아 있어서,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에게 내리는 가장 가혹한 형벌은 독방에 감금하는 일이다.

유럽에서 개인의식과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싹트는 것은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다. ... 워크숍이나 하우스처럼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이 아닌, 비주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형식은 주거 건물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과거의 서민 주택은 노동과 생활, 귀족 주택은 정치와 생활이 혼재된 곳이었지만, 비주거 건물이 등장하면서 주택은 노동과 정치와는 유리된 채 점차 주거전용 건물이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중세의 농노제나 봉공제 등을 대체한 새로운 노동 형태, 즉 임금 노동의 출현과 관계가 깊다.
작업장과 집이 구분되지 않았던 과거의 생산형태 대신 주택 외부에 마련된 공장에 나와 생산에 종사하면서 노동을 시간제로 계산되어 매매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노동 외 시간인 ‘사생활’을 누구라도 갖게 되면서 프라이버시 개념이 싹트고 이는 건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 나아가 문학에서 고백록이, 회화에서 자화상이 유행하게 된다. ... 당시 거울은 단순한 화장도구가 아닌, 자신의 내면세계를 비춰 보는 역할을 했다. 거울의 등장과 함께 관심이 개인 자신에게 쏠리게 되면서 회고록이나 고백록, 자화상이 등장하고 또한 개인의식과 사생활 및 그에 따른 개인 침실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재정의되어야 한다.
개인에게 방 하나씩이 원칙이면서도 부부는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이상한 원칙.
지극히 외로움을 타면서도 자기만의 방을 고집하는 사람들...
내면세계, 개인의식, 사생활, 고백록, 자화상의 등장은 푸코를 떠올리게 하는데... 푸코가 학교, 감옥이 아닌 주거공간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노동, 정치, 생활은 혼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 맞는 주거형태는?


137p
사랑채란 남성전용 공간이라기보다는 주택 내에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현대의 주택은 식사, 취침, 휴식, 가족 단란 등과 같이 철저히 사적인 행위만이 일어날 뿐 손님을 접대하거나 행사를 벌이는 등의 사회적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 조선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행사를 벌이는 등의 일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사랑채에서 과객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신문이나 언론 매체가 없던 시절 사회여론이나 소식을 알 수 있는 채널 역할을 했으며, 이때 얻은 정보와 지식은 후에 경제자본으로 환원될 수도 있는 귀중한 것이었다. 또한 대갓집의 사랑채에는 식객이나 문객이라 하여 오랜 동안 머무는 손님도 있었는데 이를 대접하는 것은 문화 예술을 후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문화나 예술, 학문이란 그 자체로는 생산적인 것이 아니어서 자본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데, 사랑채는 마치 17~18세기 프랑스 살롱의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신문과 언론 매체는 물론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서도, '과객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경제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귀중한 정보와 지식의 형성 방법...
귀족이야 돈이 남으니까 투자차원에서 식객, 문객을 대접할 수 있다 치자. 우리는 불가능할까?
'자본에 기생'하지 않는 식객, 문객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


146p
민속촌에 마련된 집들을 볼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실내 공간이 매우 좁다는 것이지만, 주택의 본질은 지붕이 덮인 실내 공간이 아니라 마당에 있다. ... 전통 건축에서 마당이 실외로 확장된 생활 공간이었다면, 현대 건축에서 정원은 조망과 휴식을 위해 예쁘게 꾸며놓은 공간이다.

마당의 본디 어원은 ‘맏+앙’이다. 여기서 ‘맏’이란 맏아들이나 맏딸 등에서 쓰이는 것처럼 ‘으뜸’ 혹은 ‘큰’이라는 뜻이며 ‘앙’은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로서, 가장 큰 으뜸 공간을 뜻한다. 중요한 행사는 항상 마당에서 치러졌으며 평상시에도 가장 자주 사용되는 공간이 마당이었다.

마루의 어원은 '말' 혹은 '마리'로서 높다는 뜻을 갖는다. ... 마루를 뜻하는 한자, 상(床)과 청(廳)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상이 물리적인 마루, 즉 남방기원설에 근거를 둔 고상주거를 말한다면, 청은 북방기원설에 근거를 둔 지배 공간 내지는 행정기관을 뜻한다. ... 청동기 시대의 마루는 상이면서 곧 청이었지만 철기 시대에 들어 상과 청의 역할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여름을 나기 위해 만든 마루는 상이 되고 지배 계층에서 아랫사람을 내려다보기 좋게 만든 마루는 청이 되었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공간으로서의 마당과 마루...
중요성 만큼이나 어원도 재밌고, 어감도 좋네.


182p
신석기 시대의 움집, 그곳엔 집 한가운데 부엌이 있었다. 집의 가장 주된 기능은 불을 피워 내부를 따뜻하게 하고 실내를 밝히며 음식을 조리하는 일이라서 화롯불은 곧 집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 집이 넓어지면서 부엌도 점차 전용 공간화되기 시작했다. ...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부엌은 음식을 조리하고 방을 데우는 일만 전담하면서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고려 시대만 해도 부엌과 안방은 분리되지 않은 채 명칭도 정지와 봉당이라 불렸다. 부엌과 안방이 나뉘어 져 있는 형식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입식 부엌이 도입되고 이름 또한 주방으로 바뀌게 된다. 마당에서 신을 신고 들어가던 부엌은 이제 마루나 거실에서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실내로 들어온 것이다.
... 그 후로 한 세대가 지난 요즘, 아파트는 과거 신석기 시대의 움집처럼 집 한 가운데 주방이 들어서는 것으로 또한 번 변신을 하고 있다. 주부가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도 집안 전체를 통어할 수 있도록 거실과 붙어 있거나 혹은 거실을 제치고 집안의 한 가운데 자리잡기도 한다.

특정 시대나 사회에서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할수록 그 사회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집 안에서 가사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동일한 시대와 사회에서 어떤 집의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한다면 그 집은 부유한 상류 계층에 속한다. 그리고 노예제 사회나 노동 임금이 싼 사회에서는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상의 세 가지 경향은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주방이 여성만의 공간이기를 그치고 또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닌 생산의 공간이 된다면... 주방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