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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반국가, 비국가

국가 또는 당운동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낙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느정도를 국가를 개선하거나 이용하거나 장악하는 전략에 대한 소극적 동의와 '국가가 소멸한 사회'가 도래할 시점은 너무 멀리 있다는 비관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국가가 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 세월호 이후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라는 질문이 대두된 상황.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국가를 막아야할 필요성은 크지만 반전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국가를 개선해야 할 진보정당들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 '국가는 폭력'이고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할지라도 '국가없는 사회'로 가는 경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자본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가난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 국가의 복지정책인 상황. 각종 시민사회단체와 풀뿌리조직과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도 국가의 지원에 기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여러 국가들간의 질서도 불안정해서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국가가 있으면 안되지만, 국가 없이는 안되는 상황. 

답이 없는 상황에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다른 국가, 국가 아닌 국가를 우리가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반쯤은 엉뚱하고 반쯤은 진지한 상상을 시작해봤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국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필요일까?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레닌에 관한 글을 보게됐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선언. 부르주아 국가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스스로 소멸하는 국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부터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부르주아 국가와의 관계, 장악방식, 폐지 가능성을 선규정한다.

현재 국가의 장악과 함께 폐지를 목표로 하는 정당운동, 국가의 지원을 이용하지만 국가와는 다른 삶을 만들어가는 풀뿌리운동, 국가 없는 사회 체계를 실험하는 아나키즘운동, 국가와 종교와 민족의 테두리를 무너뜨리는 평화운동을 지금 여기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 이를 위한 '국가 아닌 국가의 시작'이라는 설정이 가능할까?

공동체, 단체, 정당, 지역, 꼬뮨, 협동조합 등 여러 이름이 있겠지만 각각의 그룹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현존 국가들에 대한 반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국가'라는 기표가 유용한 것이 아닐까? 국가의 내부에서, 국가의 피통치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실험해볼 수 있다면, 재밌는 놀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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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레닌의 정치학에서 외부성의 문제>, <<레닌과 미래의 혁명>>

 

경제투쟁에 안주하려는 태도만이 아니라, 정치투쟁을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 내부에 제한하거나 경제투쟁을 통해서만 발전시켜야 한다는 '내부성'의 논리 그 자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이해되는 정치활동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활동이 아니라 단지 노동조합주의적 정치활동"이고, 이는 "정확히 부르주아적 정치활동"이다. 이와 대비하여 레닌은 "계급적 정치의식은 단지 외부로부터만, 즉 오직 경제투쟁의 바깥으로부터만, 그리고 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사이의 관계 영역 바깥으로만 노동자들에게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요컨대 노동자의 계급적 정치의식이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고용관계 외부를, 경제적 이해관계 외부를 사유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의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주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단위 부대들을 모든 방향으로 파견해야 한다" 외부에서 얻은 어떤 이념을 들고 노동자들에게 들어가 전파하는게 아니라, 모든 계급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모든 방향으로 파견해야 한다는 것은 기성의 정치의식을 노동자에게 전파한다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정치의식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요컨대 레닌에게 혁명적 정치, 사회주의적 정치란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러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활동이고, 그 관계의 외부를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 '노동자계급'에게 혁명이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외부적인 것을 통해 정의된다. 

"엥겔스에 의하면 부르주아국가는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폐지'되는 것이다. 혁명 후에 사멸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또는 반-국가 semi-state 이다." 레닌의 주장을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국가에 대해 세 개, 아니 네 개의 구별되는 계기가 설정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먼저 부르주아국가에 대해서는 국가권력의 쟁취와 국가장치의 파괴라는 두 계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사멸하지만, 그것이 부르주아 국가와 다른 것인 한, 다시 말해 부르주아 국가를 대강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닌 한,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라 그 반대의 사회이기에 특별한 억압장치가 없어도 되며 만들어지자마자 사멸하기 시작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반-국가'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의 작동방식이나 작동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후자에 대해 외부적이다. 그것은 후자의 폐지 이후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적인 국가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독재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쟁취 이후에 새로이 추가되면 족한 그런 것이 아니라 장악 방식 자체를 선규정하는 것이고, 부르주아 국가에 관계하는 방식 자체를 선규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장악하는가, 어떻게 관계하는가가 장악 이후의 과정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대해 외부적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가권력 자체에 대해 외부적이다.

혁명적 정치란 국가권력 자체에 대해 외부적이다

혁명 이후 국가권력의 변화과정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멸하기 시작하는 국가'라는 역설적 개념에서 사멸의 계기를 만들려는 노력이 없다면, 혹은 좀 더 거슬러 가서 국가를 장악하여 이용하려는 시도가 그것을 해체하여 사멸로 이끌 계기를 결여하고 있다면, 장악과 이용의 논리가 혁명을 통해 국가를 더욱 강화하는 길로, 가장 강화된 국가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국가의 외부를 통해, 국가장치의 외부를 통해 혁명과 국가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장악의 논리는 혁명의 정치학을 다시 부르주아적 국가로, 부르주아적 정치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태에서 태어난 사회고, 자본주의적 척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양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그 사회의 생산과 분배원칙을 정의해 주는데, 여기서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이 권리는 "여전히 하나의 '부르주아적 권리'"다. 이와 달리 공산주의 사회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다. 이러한 원칙이 사회를 완전히 포섭할 때, 다시 말해 "인민들이 사회적 교류의 기본규칙을 준수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들의 노동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발적으로 노동할 만큼 아주 생산적으로 되었을 때, 국가는 완전히 사멸하게 될 것이다."

"협의의 엄격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적 노동은 사회의 이익을 위한 무보수 노동이고, 정해진 의무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물을 얻기 위한 노동이며, 사전에 만들어지고 법적으로 고정된 할당량에 따른 노동이 아니라 그런 할당량에 무관한 자발적 노동이다. 그것은 보상을 예견하지 않으며 보상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 수행되는 노동이다. 이제 노동이 행해지는 것은 공동선 common good을 위해 작업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고, 공동선을 위해 일할 필요성을 의식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이것이 습관이 된다"

사회주의란 공산주의의 이행기로 설정되지만, 사회주의의 기본법칙은 그런 이행의 계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행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적 계기가 처음부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자체 내에, 그 전체를 규정하는 기본법칙과는 전혀 다른,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의 외부'라고 할 무엇이 처음부터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이행기로 정의한다는 것은 그것을 사회주의에 대해 외부적인 것을 통해 정의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 공산주의가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순환론이고 현실적으로는 자기모순처럼 보인다. 도달해야 할 곳이 처음부터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논리적으로만 난점일 뿐이다. 이행이란 부재하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려는 세계를 지금 현재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그러한 과정이 확장되거나 심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이행은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지금 현재 국지적인 한 지점에서부터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행은 어떤 사회, 어떤 관계 속에 그것에 대해 외부적인 지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외부, 그것은 사회주의의 시작부터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란 그러한 지대가 자본주의와 달리 쉽게 확장되고 좀 더 강력한 촉발이 되어 번져가는 체제라고 다시 정의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서도 코뮨주의적 외부를 사유하고 그것을 창안하며 작동시키는 정치적 실천이 없이는 코뮨주의를 향한 어떠한 이행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이행기란 외부성을 원리로 하는 체제다. 이를 시간과 관련된 개념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도래할 것이 현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래할 것은 도래하지 않는다. 도래할 것이 존재하는 현재, 그것이 이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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