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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의 팔량쥬 - 즐거운 노동공동체

 

푸리에의 팔랑쥬는 공동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회 혹은 작은 도시나 국가에 가깝다. 공동체에 안주하지 않는 보다 큰 기획을 위한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빈집/빈마을은 팔랑쥬를 닮지 않았나? 교육보다는 욕망의 뒤섞임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는 방식. 정해진 이념이나 신념을 교육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삶이 마주함으로써 형성되는 공유 공간. 
물론 빈집은 노동공동체가 아닌 기본적으로는 주거공동체이지만, 주거공간에서의 각종 노동/활동들(청소, 음식, 손님맞이, 회계, 농사, 술빚기, 손님맞이 등)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빈고, 빈가게, 마을활동 등 새로 생겨난 노동/활동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의 배치는 항상 주요한 고민이 되어 왔다. 

또한 빈마을에서의 각 집들이 작은 단위를 이루면서 사람의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각 집들 내부에서의 협력과 외부에서의 협력/경쟁/갈등이 항상 고민이었고, 또 그런 조화와 부조화가 해결되지 않는/해결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되어온 셈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빈번한 출입과 집간 이동으로 각종 갈등들이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방식은 의외로 전체적인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개인의 욕망과 노동을 정념(정확히 이해가 되는 개념은 아니지만)에 따라 집단화하고 순환하려는 시도로는, 빈집의 세번째 재배치(생산, 환대, 공부, 낭만, 생태 등의 테마집)과 1인1팀제(각자가 적어도 하나의 팀 - 농사팀, 반찬팀, 주류팀, 풍물팀, 운영팀 등 -에서 활동을 하기로한 제도)가 떠오른다. 주거 공간 이외의 별도의 공간적 여유와 외부노동으로 인한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하기는 어려웠지만, 장기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시도해볼만한 시스템이지 않을까?

사유재산에 대한 태도 또한 유사한 측면이 있다. 빈고는 개인이 소유한 자본을 인정하면서도, 각자가 자발적으로 자본을 공유하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을 재분배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형성해가고 있다. 빈집 사람들과 빈고의 조합원들은 출자를 통해서 (즉각적인 사유재산의 철폐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사유재산의 의미를 없애는 공유의 실천을 하고 있다.

첫번째 빈가게의 모토 역시 푸리에가 떠오르는 '일놀이공동체'였는데, 일과 놀이의 결합이 쉽지 않고 일은 역시 일이다라는 현실을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이는 저자의 의견대로 푸리에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수정하지 못할 근본적 한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러 어려움에도 계속 갖고 있어야할 지향이 아닐까?

빈집을 푸리에와 성급하게 동일시 할 필요는 없겠지만, '연관', '대조', '결합'을 통한 새로운 미래를 그려보기에는 충분히 재밌고 의미있는 작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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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푸리에의 ‘팔랑쥬(Phalange)’ ― 즐거운 노동공동체>, <<이상국가론>>

 

푸리에에 따르면, 근대 문명사회의 자본주의적 노동이 문제시되는 것은 노동의 결과인 분배나 소유가 불평등한 때문이라기보다 그 노동 활동이 인간의 ‘정념(passion: 열정)’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적 노동을 극복할 수 있는 길 또한 인간의 자연스런 정념을 좇아 노동이 배치될 때에 가능한 것으로 제시된다. 즉 그에게서 노동과 정념의 관계는 사회주의적 노동공동체를 위해 정념을 조직하거나 배치하는 형상이 아니라, 거꾸로 사람들 개개인의 정념에 따라 노동이 배치되다 보면 자연스레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만큼 푸리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스런 정념을 어떻게 판단하며, 정념은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었다.

그는 인간을 영구히 대체되거나 억압될 수 없는 정념(passion)을 가진 존재로 보았으며, 그러한 인간의 본성이란 나이와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정념이란 “심사숙고나 반성에 앞서서 자연에 의해 생긴 것이기에 이성이나 의무, 편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존속하는 것”(Fourier, 1829: 398)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의무는 인간에게서 온 것이지만, 정념은 신에게서 온 것”(Fourier, Selected Texts: 25)이라는 그의 언명은 이러한 생각을 잘 나타내 준다. 그렇기에 푸리에는 인간의 성품이 환경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고드윈과 오웬의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인간본성은 후천적인 교정이나 억압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본성은 왜곡될 수는 있지만 파괴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푸리에의 사상은, 인간의 이성과 욕구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고 욕구를 규제함으로써 이성적인 사회제도를 고려해왔던 모든 도덕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의미를 가진다. 그에게는 심지어 잔인함이나 공격적 성향과 같은 본성도 그 자체로 악은 아니며, 다만 어떤 본성을 왜곡되게 하는 사회조직에 그 잘못이 놓이게 된다. 선한 본성이나 도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성향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올바로 배치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회상에 맞추어 인간을 교육하고 규제하려 했던 다른 이상론자들과 달리, 푸리에는 이러한 인식에 바탕하여 있는 그대로의 인간 욕구와 정념을 인정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향유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육성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푸리에와 오웬 그리고 오웬주의자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초점은 바로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견해에 놓여 있었다. 푸리에는 인간본성의 불변성을 주장하고 그에 적합한 사회적 환경의 조성을 강조하였다면, 오웬은 원천적으로 인간성을 개조할 수 있는 환경의 건설을 꿈꾸었다. 따라서 오웬은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공동체적 삶에 맞는 인간의 육성이라는 교육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푸리에도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서 교육은 자신의 신념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심이 되도록 육성하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리고 유쾌한 마음으로 스스로 원하는 바를 하도록 돕는 데 강조점이 있었다. 즉 푸리에에게서 교육의 목적은 인간을 어떤 선한 모습으로 교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마음의 자연스런 열정을 알고 실현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각 개인이 자연스런 정념에 따라 마음이 이끌리는 원리를 “정념인력(Attraction passionelle)의 법칙”(Fourier, Selected Texts: 211―2)이라 부르고, 이를 노동활동과 사회구성의 근본원리로 삼고자 한다.

"재산공동체, 진정한 박애가들의 기분 좋은 우애, 모두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낡고도 지극히 바보스러운 궤변 ...... 오웬파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도덕적인 무미건조가 아니라 협동사회제도에 있어서는 ‘조화’와 똑같은 만큼의 ‘부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바로 부조화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정념 계열의 팔랑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화를 조직하기에 앞서 적어도 5만의 부조화를 폭발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 정념 및 사회적 조화의 수단에 대해서 도덕의 잘못된 판단의 모든 것을 여기서 검토함에 따라, 우리의 시대가 얼마만큼 협동사회에 이르는 길로부터 멀어져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푸리에는 인간의 정념들이 자유로이 표출되고 향유되기에 적당한 일정 규모의 연합을 구상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팔랑쥬(phalange)’이다. 팔랑쥬(phalange)의 규모는 정념 계열의 조합에 따른 노동의 구성으로 제안된다. 먼저, 팔랑쥬의 노동활동이 “마음에 끌리는 노동(le travail attrayant)”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공동체 구성원의 작업 활동이 자신의 정념에 따라, 자유롭게, 그리고 다양하게 선택되어 배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푸리에는 인간 개개인의 욕구가 상이하며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다양한 정념이 인정되고 향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각 개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정념의 충동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에 직접 연관되는 것으로, 그는 이와 관련하여 각 개인 스스로가 다양한 많은 일에 참여하고 경험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좋은 교육이란 실제로 행동하고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열정을 인식하고 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팔랑쥬에서는 모든 어린이를 포함하여, 모든 여성과 남성이 연령에 관계없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노동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노동의 배치가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혼자 이루어지는 노동활동이 아니라 반드시 일정한 소규모의 ‘집단과 군(groupe et série)’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영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념이란 각각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정념 계열과의 ‘연관’과 ‘대조’를 통해,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다른 정념과의 복합적 ‘결합’을 통해 비로소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팔랑쥬의 노동체계는 일의 종류의 유사성에 따라 50―60개 이상의 집단이 인접적으로, 연속적으로 배열되고 있다. 성원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와 재능에 따라 하나의 집단과 군을 이루어 노동하는 데, 이때 하나의 집단은 짧은 시간 일하고 곧 전환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접 집단들 간에는 상당한 경쟁이 일어나게 되는 데, 푸리에는 이러한 ‘경쟁’ 과 ‘부조화’가 자연스런 정념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취와 집단 구성원 내부의 결속력을 형성시키게 된다는 점에서 ‘협동 사회’를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수적인 정념으로 보았다.

팔랑쥬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작업 군 내부의 활동에서 ‘협동’의 관계를, 그리고 외부의 다른 유사 작업 군과의 관계에서 ‘경쟁’의 관계를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에서 협동적 사회의 기초는 ‘타인을 사랑하라’는 박애주의나 도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호에 바탕을 둔 자유로운 노동활동이 타인과 맺는 자연스런 관계 속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념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다양하게 전환하며 협동과 경쟁을 체험함으로써 즐겁고 행복할 뿐 아니라, 매번 바뀌는 작업계열로 인해 고정된 경쟁상대나 고정된 경쟁심이 생기지 않고 서로 협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체 전체는 경쟁상태에 있는 광범위한 노동 분화로부터 노동의 유인이 있음으로 해서 유익하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다양한 욕구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음으로 해서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하루에도 여러 번의―약 여덟 번의―작업 군에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배치가 조직되는 곳은 팔랑스테르(Phalanstère) 중앙의 공동장소에 있는 ‘정념 거래소(bourse)’로 제안된다. ‘정념거래소’를 통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다양한 노동활동과 다양한 군 활동은 사람들의 다양한 정념을 만족시켜주며 상이한 즐거움의 혼합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계속 같은 일을 원할 경우에도 그 작업 집단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새로운 구성원이 유입됨으로써 전혀 새로운 구성원과 새로운 정념계열의 복합적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며 전환의 정념이 충족될 수 있다고 한다(Fourier, Selected Texts: 231―2). 팔랑쥬의 노동이 집단과 군 활동을 통해 분업과 협업, 그리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전환업무의 방식에서 오는 경쟁과 협동을 모두 향유함으로써, 푸리에는 자유롭고 조화로운 노동 공동체를 이루리라 전망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동활동을 통해 생산되는 가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전유되는가? 푸리에는 우선 산업사회의 임금제도를 폐지하고 팔랑쥬의 구성원은 배당금을 받는 조합원이어야 한다는 점을 공동체의 가치분배관계의 근본적인 원리로 들고 있다. 이때 남성, 여성, 어린이는 각자 자신의 자본, 노동, 재능의 공헌 정도에 따라 배당금을 받는 데, 노동 : 자본: 재능에 따라 5 : 4 : 3의 비율로 나누어 생산보상의 5/12는 노동에, 4/12는 자본에, 그리고 능력과 자질의 몫으로 3/12가 할당되도록 하였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팔랑쥬에서 생산된 이익금은 전체 성원을 위한 공공복지 비용에 할당되고 그 나머지 부분으로 자본, 재능, 노동에 따라 분배된다. 재능에 따른 분배는 구성원들의 투표에 의해, 자본의 할당은 개인의 자본 본을 나타내는 주식분에 비례해 이루어지며, 노동에 따른 분배는 생산성의 기준이 아니라 그 노동활동의 필요성, 유용성, 즐거움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었다(Fourier, Selected Texts: 275).

그러므로 팔랑쥬에서는 재산과 소득의 과도한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해 재산권의 규제와 제한은 요구되었지만, 개인의 재산권 자체를 박탈하거나 소득균등을 강요하려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협동과 경쟁의 원리, 조화와 부조화의 원리 모두가 인간에게 없앨 수 없는 자연적인 욕구이자 실제로 협동사회를 결속시키는 충동의 원리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본에서 오는 배당을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에 의한 무제한적인 축적의 허용은 반대하였으며, 이를 제한하기 위해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산의 총계에 따라 자본으로 투자되는 비율의 다양성을 통해 이를 제한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팔랑쥬에서 자본과 노동은 배타적인 범주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계된 범주로서, 일정한 갈등과 긴장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생산단위 사이의 경합일 뿐 상호 의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팔랑쥬에서는 ‘최저 수입제’를 통해 하루에 5번 식사를 할 수 있는 권리 등 기본적인 의식주가 배당됨으로써, 빈부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지고 생계의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했다. 이러한 코뮌의 구성 속에서 노동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수고로운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정념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이자 즐거움의 원천이 되리라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검토에서 본다면, 맑스가 비판했던 “하루 15시간의 과도한 노동작업표”는 푸리에의 사상 속에서는 휴식시간이 없는 과도한 노동이라기보다 오히려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참여하고 싶은 “하루 15시간의 자유로운 놀이시간표”와 동일한 것이다. 푸리에게서 자유로운 노동이란 노동하는 수고를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즐김으로써 획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푸리에 사상에서 나타나는 ‘자유’ 개념은 노동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노동행위의 과정 ‘안’에서 나타나며, 그의 사상은 맑스가 구분했던 자유의 영역과 필연의 영역의 경계선을 넘어가 있는 듯 보인다. 그에게서 ‘자유’란 사회적 필요노동을 초월한 곳에, 노동시간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고통을 벗어나 누리는 휴식이나 자유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리에는 한편으로 공동체 안에서 노동활동의 종류나 조건에 따라 차등적인 사회적 보상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힘든 일이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푸줏간 일, 병자 돌보기 등의 작업에는 보다 높은 보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푸리에의 논지대로 산업사회의 노동과 달리 팔랑쥬의 노동이 자신의 정념과 적성에 따라 선택된 즐거운 것이라면, 어떤 특정한 분야의 노동이 특히 수고롭고 고통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인식 자체가 불평등한 가치에 의해 규정된 산업사회의 직업의 귀천 기준이기 때문이다. 푸리에는 모든 노동활동이 자신의 정념에 따라 배치되기만 한다면 즐거운 것이라 하면서도, 누구에게나 힘들고 불유쾌한 어떠한 종류의 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다시금 직업상의 구분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즐거운 노동이라는 그의 기본적 지향이자 전제는 모호해진다는 점을 그의 사상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1840년대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미국에서의 팔랑쥬 공동체 실험이 실패했던 까닭 또한 팔랑쥬에 지분을 투자하고 참여했던 많은 지식인이 그 노동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본의 많은 부분을 회수한 데에서 찾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노동의 필수성과 자유에 대한 구분이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 있는지의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사상에서 과연 즐거운 노동이 가능한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회의하게 만든다. 그는 각 개인마다 정념의 특성이 다양해서 어떤 이가 좋아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이가 싫어하고 어른이 싫어하는 어떤 일을 어린이가 좋아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고 싶었던 필연의 영역,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비슷하게 힘들게 인식하는 노동의 영역이 일반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체를 향유하기만 하면 자유의 영역이라 바꾸어 정의하고 싶었던 부분을 다시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딜레마에 놓이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계는 우리에게 다시금 자유로운 노동에 대해, 그리고 즐거움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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