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 비판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른바 ‘스피노자 르네상스’가 그 생산성을 입증한 오늘날엔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한때 알튀세르에 대한 가장 상투적인 비판은
그가 스피노자를 따랐기 때문에
논리주의나 규약주의(conventionalism) 결국 관념론으로 미끄러졌다는 것이었다.

요새 관련 글을 읽다 보니 새삼 이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를 어떻게 반박할지 알튀세르 자신 및 그의 제자들의 글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아직 엉성한 부분이 많지만 뭐 블로그에 단상을 올리는 거니까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에서 제기한 다음 명제인 것 같다,
“(일단 과학이) 참되게 구성.전개되었다면 이 과학이 산출한 인식이 ‘참’이라고, 즉 인식이라고 선포하기 위해 외부적 실천에 의한 입증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는 이른바 ‘적합성’(adequacy)이라는 관념을 정의한 『윤리학』 2부 정의 4
와 관련되는데, 여기서 스피노자는
“대상과의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생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관념을 나는 적합한 관념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는 모두 참/진리를 ‘관념과 관념대상의 상응’으로 정의하는
인식론의 지배적 전통을 비판한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사람 모두 이 상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이 상응을 참/진리의 ‘정의’로 삼는 것이다.
 

「취른하우스에게 보내는 60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참된 관념과 적합한 관념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점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참된’이라는 단어는 오직 관념과 관념대상ideat 사이의 합치convenientia와 관계하는 데 비해 ‘적합한’이라는 단어는 관념 자체의 본성과 관계합니다. 따라서 이 외생적 관계가 문제라면, 이 두 종류의 관념 사이에는 아무런 사실적인 차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어떤 관념이 적합한다면 이는 반드시 관념대상과 상응한다.
하지만 어떤 관념이 관념대상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적합한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적합한 관념과 그 대상 사이에는 분명 상응관계가 존재하지만, 이 두 항 사이에 존재하는 통상적인 관계는 전도된다. 곧 참된 관념은 자신의 대상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참된 관념이 적합하기 때문에, 곧 필연적인 방식으로 자체 내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대상에 상응한다.”
즉 상응은 적합성의 필연적 ‘부산물’일 뿐, 그것의 ‘본질’을 이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소박 실재론을 넘어
보다 정교한 사고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객관성’, 곧 대상과의 모든 관계를 상실하지 않는가?
곧 논리주의나 규약주의 따위의 관념론으로 빠져들지 않는가?
마슈레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관념 자체가,
실체의 모든 변용들처럼 인과적으로 규정되는 한에서,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즉 관념은 굳이 관념대상을 불러들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객관적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다시 물을 것이다. 세상에는 관념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관념,
간단히 말해 거짓된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는 관념과 관념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수많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답변을 내놓는다.
“신과 관련된 한에서 모든 관념은 참되다.”(『윤리학』 2부 정리 32)
즉 모든 관념은 그 자체로는 적합하며 어떤 대상에 상응한다.
하지만 이 관념은 자신과 상응하는 대상과 분리될 수 있고,
다른 대상이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이 관념은
부적합한 관념, 곧 절단되고 혼란스러운 관념이 된다.
즉 진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진리는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곳과는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바로 여기에 오류 효과의 이유가 있다.

 

이 오류 효과 중 알튀세르가 즐겨 인용한 스피노자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태양을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것으로 지각하고 상상하는, 곧 ‘체험’하는 인간이다.
이 표상은 분명히 오류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오류라고 무시하지 않고
왜 이런 표상이 생겨나는지를 탐구하다 보면 새로운 인식이 출현할 수 있다.
다시 마슈레에 따르자면, 이 관념은 그것이 목표로 삼는 대상 곧 ‘태양’과 관련해서는 거짓이다.
하지만 이 관념은 태양이 아닌 우리 신체의 실존적 배치상태(disposition),
예컨대 열을 느끼는 신체의 지각력과 우리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 종교적 표상체계 등
은 참되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 같은 참됨이 있는 한에서
인간과 태양 사이의 거리에 관한 객관적 인식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 관념, 그리고 이를 기초 짓는 상상과 체험은 소멸하지 않는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이 상상은 객관적 현실(reality)보다 더 실재적(real)이다,
즉 집요하게 존속하며 자의로 조작할 수 없다.

 

내가 볼 때 이런 접근에서는
관념과 관념대상 사이의 상응이 어떻게 보장되는가라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 질문에서는 관념대상에 비해 관념은 덜 실재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이렇게 되면 더 강한 실재성을 지닌 관념대상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이 상응을 따라서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착될 수 있다.
일체의 경험주의나 실증주의에 깔린 게 바로 이런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게 있어
관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객관적 사물이며 따라서 관념대상과 동등하게 실재적이다.
이런 접근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질문은
그런데 왜 관념과 관념대상이 상응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느냐일 것이다.
즉 전자의 중심 질문이, 관념대상에 비해 덜 실재적인 관념이
어떻게 참된 곧 관념대상과 상응하는 관념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라면,
후자의 중심 질문은, 관념대상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관념이
어떻게 거짓된 곧 관념대상과 상응하지 않는 관념이 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의 관심이 ‘진리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면
후자의 관심은 ‘오류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이때 후자가 제기한 개념이 바로 (부)적합성 개념이고,
이는 전통적인 상응 및 보장이라는 문제를 부차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적합한 관념에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부산물로 전위시킨다.
그리고 이제 좁은 의미의 ‘물체’로 환원할 수 없는, 그러나 동등하게 물질적인
사고 과정, 지식 대상이라는 종별적 구조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이때 이 구조 안에는 사고를 지지하고 그 수단 노릇을 하는 ‘물질적 물체’
예컨대 ‘실험 장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장치’들이 포함된다.
소박 실재론자들이 보기에 이는 모순일 것이다. 이들이 생각할 때 관념은 관념이고,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물체’도 속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관념의 문제를 관념론적으로 다룬다는 증거다.
관념대상과의 상응이나 보장의 문제설정을 폐기한다고 해서
물질성, 심지어 물체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관념의 상응물로서가 아니라 관념의 지지대이자 수단으로서 물체,
관념에 의한 관념대상의 전유(상응이 아니라!)를 과잉결정하는 물질성의 문제는
사고 과정의 종별성을 중심 의제로 제기하는 한에서 오히려 전면화된다.
즉 한 물체는 그것이 물체들 사이의 물리적 관계 속에서 점하는 위치 및 역할
과 별개로 관념들 사이의 사고 관계 안에서 종별적 역할을 할 수 있고,
역으로 관념 역시 그것이 하나의 사물인 한에서 관념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응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고 내 (부)적합성 개념을 제기하여
인식과 진리에 대한 전통적 접근을 전위했다고 하여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관념을 사물로, 사고 과정을 고유한 물질성을 갖는 과정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관념대상과의 상응으로 해소되지 않는 관념 자체의 객관성을 제기한 것이
규약주의인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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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7/18 05:47 2010/07/18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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