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레포트 준비차 홀스턴을 비롯한 인류학자들의 글을 읽고 있는데

인류학이 시의성을 갖는 이유를 또 하나 발견했다.

알다시피 인류학은, 제국주의 식으로 말하자면 '야만인',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이방인'을 연구하는 데 특화한 학문이었다.

 

레비스트로스를 전후한 구조주의 사조는

이방인 연구를 지속하면서도

한때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의 무기였던 인류학을

서양 문명 자체를 반성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역전시킨다.

(물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큰 추세에서는 이 점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제국주의와 탈식민화, 심지어 세계화까지 경과하여

이제 '신대륙' 따위는 현실로나 상상으로나 실존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세계화는 당연히 인류학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인류학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지금 맥락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것만 말하자면,

이제 이방인이 바로 우리 곁에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인종주의가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특히 구조주의를 경유한, 인류학의 전공 분야가 아니던가.

 

발리바르가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을 말하고

'인간학적 차이'(anthropological difference)을 중요한 쟁점으로 얘기할 때

아무래도 따라가기 어려웠었는데,

이제 그 이유 중 하나가 20세기 인류학, 특히 구조주의 인류학 전통에 대한

나의 총체적 무지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anthropology'를 번역하는 문제 역시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인류학'이라고 할 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지배적 표상을 감안할 때

'anthropology'를 '인류학'으로 번역하는 건 좀 곤란한 일이다.

특히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칸트, 그리고 딜타이와 카시러 같은

신칸트주의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처럼

그가 'anthropology'를 사고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핵심 중 하나가

레비스트로스 이후 구조주의 인류학이라는 점에서

이 전통을 거의 배제하는 '인간학'이라는 번역어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

단순히 번역어를 택하는 문제라기보다는

그가 말하는 'anthropology'의 계보를 어떻게 만들지가 문제일 텐데

당분간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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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2/10 22:40 2010/12/1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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