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상태란 없다, 그렇다면...

정치 철학에 관한 이런저런 글을 보다가

다시 '자연 상태'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자연 상태 개념을 비판할 때 내기에 걸린 건 무엇인가?

특히 폭력에 관한 사고 측면에서.

 

일단 '기원'(origin) 개념에 대한 비판,

그 너머의 순수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기원적' 복잡성과 불균등성.

따라서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 이전의 자연 상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항상-이미' 사회/시민 상태, 국가와 제도가 과잉결정한다.

 

이는 (비)폭력을 말할 때, 그 원인을 기원이나 본성/자연(nature) 편에서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홉스(폭력 = 자연 상태 / 비폭력 = 사회 상태)와 루소(비폭력 = 자연 상태 / 폭력 = 사회 상태)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자연/사회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구체적 상호 결정에 관한 역사적 분석

이기 때문이다.

 

물론 홉스와 루소가 제기한 질문,

곧 폭력적인 전쟁 상태(에서 어떻게 '문명'을 건설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비극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폭력적인 전쟁 상태는 '前-정치적'이 아니라 '超-정치적'이라는 점,

따라서 단순한 제도 창설과 파괴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

또는 차라리, 폭력의 원인을 자연 상태 쪽으로 돌리고 제도 창설을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역으로 폭력의 원인을 제도의 존재 자체 쪽으로 돌리고 제도의 파괴를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든지

하는 접근이야말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기다.

그는 자유주의의 사회계약론적 전통을 비판하면서,

'자연 상태 / 사회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대중들과 국가(제도)라는, 약분할 수 없이 분열된 두 항 사이의 내재적 변증법으로

전위시켰고, 어느 한 쪽을 절대적 선(따라서 다른 한 쪽을 절대적 악)

으로 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같은 노선에서는

(기원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유대'와 '질서'의 문제설정이 근본적으로 해체된다.

모든 개인 사이의 선험적 '일치점' 노릇을 하는 본성이 사라졌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차이와 개별성/독특성(singularity),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 뿐이다.

루소가 말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상태란 영원히 기각되는 것이다.

물론 홉스는 이 같은 전쟁 상태야말로 자연 상태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그 해법으로 사회/국가의 창설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건대, 자연 상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험적 일치점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선험적 차이와 적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들은 사회/국가/제도와 분리된 본성을 갖지 않으며,

사회/국가/제도가 작동하면서 산출한 사후적 결과가 바로 각 개인들의 본성이다.

개인들이 서로 갈등한다면, 이는 그/녀들이 원래 갈등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갈등하게끔 사회/국가/제도가 그/녀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어진 생물학적 질료를 가지고. 이 질료는 또한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감축하고 조정하는 것은

사회/국가/제도를 단순히 창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이미 그/녀들의 개성 및 그것들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고 있는

사회/국가/제도를 변혁하고 개조하는 문제가 된다.

(물론 그 계기 중 하나가 새로운 제도의 창설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도 낙관주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별자 사이의 교통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따위의) 비관주의도 아니다.

발리바르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이는 '비극적'인 관점이다.

즉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에서 차이와 갈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의 역사와 정치와 삶이 곧 '전쟁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차이와 갈등은, 특정한 조건에서, 전쟁이 된다.

하지만 다른 조건에서 그것은, 가장 뛰어나고 생명력 있는 문명의 원리가 된다.

또는 이것이 다소 낙관적이라면, 적어도,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모든 反문명과 전쟁 상태의 불변수를 이룬다.

 

그러므로 문명과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차이와 갈등을 제거하려 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익히는 것이다.

때로 괴롭고 때로 스스로가 파괴되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차이와 갈등이 없다면 아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 '비극'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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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26 17:10 2008/12/2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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