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if', 위로와 치유의 가정법

돈 버는 일을 하면서 이하나의 '그대 혼자일 때'를 듣고 있다.

 

중간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늦었다고 말해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시작해도 되죠 우리 함께 가요
난 여기에 살아 있죠"

 

이하나의 다정한 목소리와 이 가사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어울려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위로라는 말을 좋아해 본 적 없었고

그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걸 보면

내 인생에 그리 커다란 실패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좀 들었나. 이제 위로에 대해 냉소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란 잠언이 인용된 적 있었다.
(지나치는 김에 말하자면, 공익하던 중 싸이 미니홈피에

일기라 생각하고 여러 글을 끄적여 둔 게 참 다행이다 싶다.

그 기록마저 없었다면, 내 과거는 거의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고,

지금 나는 훨씬 더 허무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이 잠언을 보면서 'as if'에 관한 단상을 편 적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허구는, 현실에 익사할 지경으로 푹 잠겨 있을 때
현실로부터 개체를 '분리'시켜 주는 것임과 동시에
현실 안으로 개체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입'될 수 있게 해 주는
'취해진 거리의 공백'이며 '유희의 공간'
일 것이다. 혹은 그런 한에서만 의의를 가질 것이다.
즉 분명히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고 상처를 받았고
나를 듣고 있으며 돈이 필요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 아니라는
'현실'을 알고 있어야만, 다만 그 현실에 고착되지 않으면서
거기서 거리를 두고 다시 시작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리라. 이미 나는
'원점'에서의 '그' 개체가 아니니까)
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로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즉 허구는 이중의 의미에서 지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학습'을 도외시해선 안 되고
동시에 '실험'과 '유희'(또는 '비틂'(twist))의 장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인내'와 '변덕'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다 품고 있어야 한다."
 

'as if', 이 가정법의 시공간은

학습과 실험/유희의 장일 뿐만 아니라,

위로와 치유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의 나는 추가하고 싶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일에 아직 사로잡혀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일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일을 없던 '것처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저 'as if'의 위로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일 것이다.

 

이하나의 저 다정한 노래를 지금 나에게 전해 준

저 기록이란 유령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떠도는 말과 마주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힘을 얻는다.

나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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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7/12 16:25 2009/07/1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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