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4+1' 패스트트랙 합의안이 마련되고 7시면 본회의가 소집된다는데 어쩌고 있으려나. 표결에 이르기까지 다시 우여곡절들이 있겠지. 하지만 승패는 이미 결정됐다. 패스트트랙 정국의 명백한 승자는 자유한국당이다.
자유한국당은 오늘도 패스트트랙 법안 저지를 위한 규탄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국회 경내에서 벌써 여섯번째 집회다. 태극기부대가 국회로 난입했던 그 첫날, 황교안이 "이미 승리한 것"이라고 했던 발언을 기억한다. 국회에 들어왔으니 승리했다? 이들의 승리는 그것이 아니다.
최근 읽은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은 오스트리아에서의 포퓰리즘 현상을 다룬 책인데, 한국 사회에 참조가 되는 지적이 많았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고, 그래서 문제는 "다양한 정체성들의 전선이 아니라, 정체성의 다양한 방식들이 싸우는 전선"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여러 소수자혐오에 관해서도 시사점을 주지만, 지금 태극기부대가 선도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즉 그들에게는 이념이나 사상보다 그것의 '방식'이 더 중요한 시대인 것이다. 황교안이 말한 승리는 그 방식의 승리다. 누구도 감히 할 수 없으리라 여기는 것을 실제로 해내고야 마는 '방식'. 그리고 이것이 황교안의 강점이자 정치적 자산이다.
홍준표와 이재오 등이 황교안을 견제하려고 뭘 꾸렸다던데 그들은 절대로 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황교안은 그들에 비해서 더 보수적이거나 우익적이지 않다. 다만 방식에서 더 급진적일 뿐이다. 누가 봐도 심각한 수준으로. 하지만 황교안의 그 '방식'이 지금껏 자유한국당을 살려왔다. (작년 12월 선거제 개혁에 관한 여야 5당 합의문 뒷수습을 하느라 나경원이 국회 점거 등 폭력을 선동하긴 했지만 오히려 정치적 입지를 줄이는 효과를 낳았다. 자유한국당이 지금까지 온 건, 황교안의 단식과 장외 선동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유럽이나 미국의 이야기처럼 언급되는 '극우 포퓰리즘'은 이미 한국에 당도해있다. 부족한 것은 '스타 정치인'과 그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팬'들의 안정적 관계인데, 예상컨대 먼 일이 아니다. 황교안이 그걸 해낼 수도 있다.
'방식'으로 승리를 구축해가는 세력이 있을 때 그 방식을 비판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어떻게 감히 국회 안으로 들어오냐는 비판이 그들이 자축하는 이유가 될 뿐인 것처럼) 차라리 다른 '정체성'이 제안되어야 한다. 정치라면 다른 이념이나 사상.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그걸 망쳐놨다. 국민의 의사가 최대한 적절히 반영되도록 하자는 선거제 개혁의 취지는 사라져버렸다. (지금보다 더 낫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으나 이 합의안은 개혁의 취지를 역주행한 결과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내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가져갈 표가 자유한국당보다 조금 많을지는 모르나 선거제 개혁을 둘러싼 정치에서는 이미 졌다. 더불어민주당의 패배를 걱정해서 쓰는 글이, 당연히 아니다. 이렇게 망쳐놓는 세상의 피해는 더불어민주당이 입지 않는다는 거,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더 차별당하게 되는 결과로 돌아온다는 게 너무 끔찍해서 이런다. 정말 간절히 바란다. 당신들도 뭔가 걸고 싸워서 이기는 게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12/29 15:05 2019/12/29 15:05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s://blog.jinbo.net/aumilieu/trackback/1052

댓글을 달아 주세요

◀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39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