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적'이라는 것에 대해

소모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글은? 그래도 쓴다. '소모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국어사전은 '소모적'이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일이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보다는 에너지 따위를 써서 없애는 성격을 띠는 것." 사라지더라도, 소화하여 제 것으로 만들거나 소비하여 다른 효용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 써서 없애는 일이다. 소진되는 것과는 또 다르다. 소진이 다 쓰여 바닥난 상태를 드러내는 측량의 말이라면 소모는 계산의 말이다. 할수록 손해라는 말이다.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 윤호중이 며칠 전 "성소수자 문제"가 "소모적 논쟁"이라는 발언을 했다. 맞다. 민주당으로서는 할수록 손해인 논쟁이다. '성소수자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가 없다. 인권의 기준에서 보거나 동시대 국가의 표준으로 봐도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카드라는 점이 결정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를, 특히나 노무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할 수도 없다. 촛불 대선에서 이미 잠가놓았기 때문이다. 열쇠를 찾을 이념도 쥘 용기도 부족하다. 그러니 민주당으로서는 논쟁할수록 손해인 게 차별금지법이다. 정당으로서 쟁점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의 징표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즉 회피와 침묵이 민주당의 전략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침묵도 못해서 민주당 표를 소모한 일일 뿐이다.
정당이 소모적 논쟁을 피하는 건 비겁하기보다 현명한 일이다. 정당이라면 모름지기 자신에게 소용 있는 논쟁을 제기하고 입장을 걸고 다퉈서 이겨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연합을 추진하면서부터 정의당 대표 심상정은 "소모적 대결의 양당 정치를 끝내야 한다"는 말을 해왔다. 양당의 '소모적 대결'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면, 총선을 앞두고 양당이 자신을 소모하는 것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정의당은 자신에게 소용 있는 대결 구도를 만들면 된다. 차별금지법은 그 전부는 아니지만 충분한 하나다. 그런데 비례대표 후보들이 앞다투어 내건 차별금지법을 정작 정의당 총선공약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윤호중의 발언에 대한 논평에서는 정의당이 앞장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성소수자 차별을 없애겠다는 포부를 밝혀야 했다. (심상정은 지난해부터 '교섭단체가 되면 차별금지법을 앞장서 추진하겠다'고 말해왔다. 틀렸다. 차별금지법을 앞장서 추진해야 교섭단체도 될 수 있다.)
사실 정치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발언은 혐오나 차별의 근원도 본질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불성실하며 무감각한지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우리의 감정과 노동이 소모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발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지적하며 알려줘야 하고, 도대체 그 입 닫을 때까지 얼마나 더 알려줘야 할지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더 중요한 건 우리에게 소용 있는 논쟁을 할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진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문제'를 소모적 논쟁으로 치부하건 말건 성소수자의 존재는 소모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성소수자뿐만 아니라 평등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용 있는 논쟁이다. 소용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적이다. 우리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끊임없이 말함으로써 배울 게 차별밖에 없는 세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비정상이라고 우리를 규정하는 세상에 맞서 우리의 삶과 존재를 해석할 언어를 만들어낸다. '너처럼 되고 싶은' 삶 말고 '나처럼 살고 싶은' 삶의 가능성을, 그걸 실현해줄 '우리'를 발견해낸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평등으로 초대한다. 우리는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힘을 키워낸다. 정당들이 쫓아오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쉬는 동안 글에 '차별금지법'을 쓰게 될 줄이야... 1년 넘게 말썽인 어깨는 좀 소모되었으나, 소용 있는 글이 된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민주당의 비례연합 욕심을 찔렀건 거기에 당했건 말렸건 이번 일로 많은 소수(진보)정당들이 소모되었다. 어떤 선택을 했건 남은 기간 동안 소진되지는 않길 빈다. 다시, 함께 평등으로 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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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15:52 2020/03/2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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