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답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우리 중 누군가는 야산이나 화장실에서 죽지 않아도 되지. 대신 우리는 살아서 강간을 당해야 하지. 덕분에 우리 중 누군가는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할 기회를 얻게 되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우리 중 누군가는 낯선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하지 않지.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그런 새끼’들을 보며 같이 분노하는 남자들이 있지.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누가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그래서 우리는 뻔히 아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하지. 넌 내 애인이니까, 넌 내 부인이니까, 넌 날 좋아하니까, 넌 내게 관심 있으니까… 남녀 사이에 이런 일은 언제나 있을 수 있지, 네가 원하는 줄 알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을 뿐이야, 나를 속인 네가 잘못한 거야…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는 집으로 끌려가거나 집에서 뛰쳐나오지. 그들은 다시 덧붙이지. “세상에는 누구의 여자도 아니라 모두의 여자인 애들이 있지!” 덕분에 우리는 창녀가 아니면 처녀여야 하고 처녀가 아니라면 창녀가 되어야 하지. 그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되길 바라는데, “마음대로 안 되는 여자”라면 더 사랑스럽다고 하지. 그리고 레즈비언은 “남자를 몰라서” 아픈 거라고 하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우리는 그저 성추행만 당할 뿐이지.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라 허벅지, 외로울 땐 날 불러라 어깨, 하고 싶으면 말해라 엉덩이,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만질 수 있어 가슴… 그건 추행이 아니라 의사소통이라지. 오해가 있었다면 미안한데 이해해달라지. 덕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성희롱만 당하지. 예뻐서 칭찬으로 한 말일 뿐이고, 내 생각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다고 전했을 뿐이고, 딸 같아서 충고했을 뿐이고, 친하게 지내보려고 솔직했을 뿐이고… 덕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우리가 너의 말을 듣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게 되기도 하지. 우리는 예쁘거나 예쁘지 않거나, 여자답거나 여자답지 않거나,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면 되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찾아가는 복잡한 삶의 방정식을 풀지 않아도 되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우리는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능욕당하지. 기술을 응용한 미술일 뿐이고, 혼자 보려고 했을 뿐이라지. 어쩌다가 혼자 보지 않고 돌려보게 된 건 온라인 공간이나 디지털 기술의 특성일 뿐이지.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는 시지프스의 노동은 우리의 몫이고, 너희들은 다시 그걸 돕겠다며 장의사업체를 만들어 돈을 벌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우리는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하지. 그러나 그들은 돈 대신 또는 돈과 함께 명령을 주고 폭력을 주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그들은 몰랐다고 하지. 폭력이 있었다면 보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 덕분에 우리는 우연히 찍힐 뿐이지. 어쩌다가 재수가 없어서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화장실에 들어갔을 뿐이지. 계단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 중 하필 내 치마가 짧았을 뿐이고 거리를 걷는 수많은 사람 중 하필 내가 레깅스를 입었을 뿐이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어떤 남자들은 절대로 보지 않지. 대신 우리는 이런 말을 듣지. “나는 절대 보지 않아. 하지만 세상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단다. 그러니 너는 함부로 네 사진이나 영상을 온라인 공간에 올리지 말아라.” 덕분에 우리는 “허리를 숙였을 때 젖무덤이 보이는” 옷을 입고 싶어도 혹시나 네가 착각할까 봐 고민하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우리는 옷 입는 하나하나까지 세상 모든 고민을 끌어안을 기회를 얻지. 그리고 너희가 호기심에 처음 저질렀을 뿐인 일에 세상의 끝을 보게 되기도 하지.
그래. 세상 모든 남자가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그런 거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임은 우리에게만 떠넘겨졌지. 우리는 폭력의 피해자로서, 피해자의 동료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세상을 고발하고 변화를 제안해왔지. 그런데 남자들은 언제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로 충분하다 여기지.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게 되곤 하지.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서,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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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8 15:49 2020/03/2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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