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ues; The soul of a man

동아리방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곤 할 때 늘 속상했던 것은 악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배운 기타인 데다가 기타 연주 자체에 욕심을 부려본 적이 별로 없어서 악보에 적힌 코드를 읽으며 손을 놀리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기타를 잘 치는 사람들은 악보가 없이도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심지어 없는 노래도 노래인 것처럼 읊조리는 것을 보면 부러워 눈만 데굴데굴 굴리곤 했다.

기억나는 사람이 두 명 정도 있는데 노래라기보다는, 푸념꺼리였다. 이를테면, 수업이 너무 짜증나, 동아리방이 추워, 시험공부 하기 싫어, 술이나 마시러 가지, 이런 얘기들을 궁시렁대다가 기타 몇 번 퉁겨주는 식이었다. 천연덕스러움에 피식대다가도 노래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에 공감하곤 했던 기억이, 르누아르의 연주 장면들을 보면서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영화인 데다가 블루스에 애착을 갖고 있지도 않은 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만든 빔 벤더스의 작품이라는 것도 모르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탓에 영화를 쫓아가듯이 봤다. 과거와 미래로 뻗어가는 시간을 보여주려는 듯한 '우주' 장면들은, 그래서 끝내 어색했다.

흑인들의 역사와 블루스의 역사를 교차시키고 명곡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연주되는 장면들을 보면서 블루스라는 장르가 흑인들의 삶에 닿아있다는 느낌을 조금은 얻은 듯하지만 영화 한 편으로는 부족하다. KKK가 대규모 행진을 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고 길가에서 노숙하는 흑인들의 절규 혹은 시위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블루스에 좀더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다. 사전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영화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두드러지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다못해 human도 아닌, man일까 빈정대면서 보기 시작한 영화다. 처음에는 그게 그냥 언어의 한계, 그러니까 인간을 man이라고 지칭해온 역사의 한계이지 않을까 하며 아쉬운 정도였다. 하지만 차라리 man 이 정확한 표현인 듯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블루스의 거장 세 명이 모두 남성인 탓도 있겠지만 그들의 노래 속에 여성의 삶, 여성의 애환이 있어뵈지 않는다.

블루스만이 아니라 어떤 장르이든, 여성 음악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장르는 없다. 역사 서술의 문제도 있겠지만 역사 자체가 그러했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음악이 매우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여성에게 요구/허용되는 음악/음악적 재능이라는 것은 아이에게 좋은 태교음악,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줄 수 있을 정도의 기술, 음반 시장의 소비자로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 정도인 것이다. 음악의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기대받지도 않을 뿐더러 수많은 여성음악인들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되기 십상이다.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분야가 비슷하지 않나 싶다. 미용, 요리, 디자인 등... ㅡ.ㅡ)

 

아쉬움. 궁시렁댐.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제나 여성음악인들을 응원할 마음의 준비를... ^^; 여성음악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노래할 수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기를. 음악인과 비음악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점에서 음악이 진정 삶과 맞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닐런지.  

 

덧붙여.

영화관에서 주로 뒷쪽에 앉는 편인데 맨앞자리에서 보게 됐다. 주로 연주장면들로 구성된 영화라 그런지 다행히, 앞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기타줄을 튕기는 손가락들의 근육이 느껴지고 기타줄의 미세한 떨림이 소리보다 먼저 마음을 울리고 소리를 내보내는 목과 얼굴의 움직임들이 가까이 보일 때 음악이, 정확히 말하면 노래가 얼마나 '인간적인' 행위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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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0 13:05 2005/01/10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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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미 2005/01/10 13: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만날뻔 했구먼. ㅋㅋ 몇일전 이 영화랑 그 다음 시간의 빈집을 예매했었는데 평가서를 쓰다가 늦어져서 결국 블루스...는 취소하고 말았지. 하지만 이후 빈집은 보았다네. 나다에서 나오는 자네와 들어가는 내가 - 좀만 빨리 갔더라면 - 마주쳤겠구려.

  2. 미류 2005/01/10 15: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난 어제 봤어. 요즘 달리는구먼. 하루에 두 편을 목표로 하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