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가의 결혼기념일

어제는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었다. 한 명은 땅 속에서, 한 명은 땅 위에서 맞는 결혼기념일이었지만 고즈넉히 앉은 오름들과 어슴프레 내다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을 서로 나누기 좋은 자리에서 결혼기념일을 보냈으니 아쉬움이 조금 위로가 된다. 아니, 되었기를 바란다. 그렇게 결혼기념일을 보내려고 아빠는 날짜를 맞춰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다.

 

9월에 간암진단을 받고 12월에 돌아가셨으니 길지는 않은 시간이다. 오래 사시지 못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나 역시 예상치 못했던 시간이기는 하다. 그래도 사람이 언젠가는 소중한 제 생명을 자연에 돌려야 할 때가 오는 것이라면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사고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것 아니고 불치의 병을 진단받고 스러져가는 생명의 아픔을 오래동안 불안해하며 나눠야 할 만큼 길게 사신 것도 아니니, 일단 행운이라고 하자.

 

혼수상태로 돌아가셔서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신 게 끝내 아쉽기는 하다. 기적처럼 아빠가 입을 열어 엄마를, 우리를 부를 모습을 상상했으나 빛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동그랗게 치켜뜬 눈은 꿈쩍도 하지를 않았다. 무슨 말을 남기고 싶으셨을지 짐작해보기도 하지만 솔직히 모르는 채, 그저 내 멋대로 살겠거니 싶다. 그도 행운이더냐.

 

아직 어지러운 마음들이 붙들리지 않는다. 이런 걸 두고 실감나지 않는다고도 하던데 매우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 비슷한 느낌이기는 한데...

 

지금은 그저 어떤 느낌이든 솔직하게 받아들이자는 다짐만...

 

*** 벌써 2005년의 마지막 날이다. 모두들, 나도 새해 복 많이 받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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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31 19:08 2005/12/3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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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루 2005/12/31 20: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도 그 분 떠난 지 3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문득 전화번호를 누르곤 한다는...
    새해에는 그 누구보다 미류가 건강하기를!

  2. 알엠 2005/12/31 21:5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미류의 건강을 빕니다. 새해가 정말 새로운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군요.그리고 아버님의 편안한 안식을 빕니다.

  3. 바다소녀 2005/12/31 22:0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블러그 들르면서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글로 올라오니 무어라 말씀 드려야 할지. 아버님 좋은 곳에 가셨을 겁니다. 행복하시길 바랄께요. 언제나..

  4. 미류 2006/01/01 11:0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루, 언젠가 나루랑 그 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질 것 같은 예감이... ^^;;

    알엠, 고마워요. 덕분에 아빠가 편안히 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

    바다소녀, 제가 글을 쓴 지 한참 돼서 들르시는 분들한테 미안하기도 했는데 글이-무슨 글이든- 잘 써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바다소녀 만나니 반갑네요. 바다소녀도 행복하길 바래요. ^^

  5. pace 2006/01/01 17: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 새해 건강하세요. 아버님의 영혼이 평화의 안식에 드시길 기도합니다.

  6. sanori 2006/01/02 10:4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병원소식 한두번 봤는데, 그동안 세상을 떠나셨군요..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7. 하이하바 2006/01/02 12: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추억과 사랑은 간직하고 슬픔은 천천히 잊으면서
    다시 새해에 힘차게 뛰는 미류가 되길 바래요.

  8. 보라돌이 2006/01/02 17:4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도 몇 달전 아버지를 보내드렸는데,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시간이 지날 수록 그립다고. 지금 실감안나도 결국 그리움은 평생을 함께 하겠죠.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세요.

  9. 무위 2006/01/03 12: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남아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럽더라도 좀 더 계시길 바라지만 본인에게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며칠전부터 의식이 없었는데 전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얼마전 부모님 결혼기념일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얘기를 꺼낼까 하다가 그만뒀습니다. 49제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렸는데 이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지다 보니 오히려 무척 힘들어하고 계세요. 하여튼 잘지내요. 너무 잘지내진 말고.

  10. 수정 2006/01/04 02: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언니.. 희선언니 통해 들었어요. 맘이 아프네요.
    언니 아버지 분명 좋은 곳에 계실거에요.

    전 그랬어요.
    한동안 멍하다가 또 일상으로 돌아와 잘 지내다가
    가끔씩 기적을 바라며 한번만 마주했으면,,
    한번만 통화했으면,, 하고 미친듯이 슬픈날들이
    있었죠.. 혼자서 끄억끄억 눈물흘리는 날.

    무엇보다 어머니 건강도 잘 챙기시고, 언니도 힘내요.

  11. Dreamer_ 2006/01/04 03: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좋은 곳으로 가셨길 빕니다. 미류님은 건강하시길.

  12. 머프 2006/01/04 12:4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는 둔하게도 이런일이 있을거라곤 미처 예상을 못했네요..쩝~
    갑작스런 소식이라 안타깝기도 하지만, 미류님은 잘 헤쳐나가리라 믿어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미류님, 건강에 유의 하시고요..

  13. 미류 2006/01/05 12:1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모두들 고맙습니다. 어느날 문득 찾아들 슬픔은 어차피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일 테고 그저 지금 여기에서 담담하게 살아가고 싶어요. 좋은 말씀들 잘 새기면서 살께요. 나중에 제가 서럽다고 징징댈 때도 토닥토닥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