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노동집약적인 농촌과 자본집약적인 산업형 메트로폴리스'라는 고전적 유형과는 다르게, 지금 제3세계에는 자본집약적 농촌과 산업이 축소된 노동집약적 도시의 사례들이 많이 있다. 다시 말해 '과잉도시화'의 추동력은 빈곤 재생산이지 일자리 공급이 아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가 미래를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다."(30쪽)

 

"무정부주의 건축가 존 터너의 유명한 말처럼 "하우징은 동사다." 도시 빈민은 주택 비용, 주거 안정, 삶의 질, 출퇴근 상황, 때로는 신변 안전까지 고려하여 최적의 상황을 얻기 위한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숙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직장과 가까운 곳(즉 시장이나 역)에 사는 것이 집 안에서 자는 것보다 중요하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땅을 거의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외곽과 도심 사이의 통근 전쟁을 참아내는 이유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최악의 상황은 비싼 데다 공공시설도 없고 불안정한 주거지에 살게 되는 것이다. ... 터너의 모델에 따르면, 우선 농촌 이주민은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지방에서 도심으로 이주하여 직업을 구하고, 이어 고용이 안정된 사람들은 자기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변두리로 옮겨간다. 이것은 터너의 용어를 쓰자면 '거점확보군'에서 '진지강화군'으로의 진행이다." (44-45쪽)

 

"가난이 만들어내는 이윤 | NGO와 개발대부업체들이 '좋은 통치'나 점진주의적 슬럼 개선 같은 표현을 가지고 어영부영하는 동안,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막강한 시장 세력은 대다수 빈민을 도시 생활의 주변부로 더욱 가혹하게 몰아내고 있다. ..., 도시 빈민은 지주들과 개발업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영웅적 스쿼터와 무상 토지라는 영원한 신화가 무색할 따름이다.... "실제로 엄청난 이윤을 만들어낸 것은 교외에서 발생한 집값 폭등이 아니라 도심에서 발생한 무시무시한 집세 폭등이었다."... 귀족들에게는 "해외투자로 높은 수익을 내리라는 기대가 사라진 후"였고, 중간계급에게는 "도심 주택이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손쉬운 자본 획득 방식인 때"였다.... 런던 사회의 거대한 단층이 이스트엔드의 빈곤으로부터 이윤을 얻었다." (112-113쪽)

 

"'인간방해물' 쓸어내기 | 도시 내 차별분리란 이미 만들어진 현실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진행되는 계층 간 전쟁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전쟁에서 국가는 '진보', '미화', 나아가 '사회정의'라는 미명하에 개입을 시도하며, 이를 통해 땅 주인, 외국인 투자자, 엘리트 주택소유자, 중간계급 통근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경계를 재편한다. ... 이로 인해 도시 빈민은 유목민, 즉 "늘 퇴거와 재정착 상태에 놓여 있는 단기 체류민이다"" (132쪽)

 

"이곳은 너무 위험하고 흉물스럽다는 바로 그 이유로 "도시의 땅값 상승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도시의 생태환경에서 이런 유의 부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틈새다. 극빈층 주민이 재난과 동거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162쪽)

 

 

# 국제적으로는 무허가 건축물 소유주나 세입자에 대한 퇴거와 대책마련이 여전히 큰 문제인 듯. 섣부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주거권 문제는 이 단계를 넘어선 듯하다. 물론, 수많은 옥탑방과 지하, 반지하방은 '슬럼'으로 접근해야 할 중요한 문제.

# 여전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여성들은 화장실 이용료를 아끼기 위해 하루종일 참다가 새벽녁에 무리를 지어 마을 외곽으로 나간다는 얘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여전히 잘 모르는 빈곤국들의 현실. 조효제는 <인권의 문법>에서 잘 사는 나라 국민들이 빈곤한 국가의 국민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건 좀 아닌 듯하고. 하지만 인권문제를 인식하고 운동을 만들어갈 때 국제주의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고민이 많이 된다.

 

# 그냥, 가난한 마을에 재해'까지' 덮쳤던 것이 아니라,마을이 가난'하니까' 재해'가' 덮쳤던 것이다. 왜 세상 일은 다 이렇게 돌아간다냥.

 

# 많은 정보들을 주고 있는 책이기는 하지만 좋은 책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화려한 은유와 수사들이 가득하고 마음을 찌르기는 하는데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라는 부제에 걸맞는 내용을 충실히 설명하지는 못하는 책이다. 다만, 세계 도시의 빈곤화가, 우리가 눈치채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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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5 15:24 2007/08/15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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