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광화문 네 거리에 있었어요. 잠깐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려는데 뭔가를 써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잠시 앉았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무엇이라 부르든, 나는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운동권'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운동권이 아니야"라고 항변하는 그 '우리'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연일 촛불집회가 이어지는 동안 '운동권'이 참 무력하다는 생각을 했더랬지요. 어쩌면 정부가 계속 배후설을 퍼뜨리는데 '운동권'이 나서는 것은 촛불집회 참여자들에게나 여론에서나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냥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운동권'이 스스로를 내놓고 다닐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냥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함께 하면 된다, 그리고 오히려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발성과 역동적인 힘을 쫓아가기 위해 더욱 애써야겠다고 마음을 다졌죠.

 

그런데 여전히 내가 잘난 척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제.

 

광화문 네 거리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다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이대로 둬서는 안된다는 생각들은 분명히 모아졌던 거죠. 그리고 그 뜻이 결국 밤샘시위를 만들어냈어요. 탄압하는 방식이나 저항하는 방식이나 그리 다르지 않은데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까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와 이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었던 거죠. 집회, 시위에서 탄압당하는 것'쯤'은 각오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운동권'들은 어느새 그 탄압에 익숙해져버렸던 거죠. 정말 많은 '운동권'들이 집회 시위에 대한 탄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설마 이토록 후진적인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 이대로 남아있을까 싶기도 했지요. 그리고 나 역시 결국 '운동권'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그동안 이렇게 화나고 참담했던 적이 없는 것 같거든요.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사람들이 야속해지기도 했지요. '운동권'들이 집회, 시위의 자유를 얘기할 때, 그리고 차벽에 가로막힌 절박함으로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칠 때, 여기 모였던 사람들은 귀기울였을까. 혹은 앞으로는 거리로까지 나와 얘기할 수밖에 없는 그 절박함을 조금은 이해해줄까. 그동안 경찰에게 맞아 죽어간 이들을 같이 기억해줄까. 그토록 부정하려는 '운동권'들이 그래도 그 문제를 먼저 얘기해왔다며 격려해줄까.

 

새벽 네 시부터 아침 여덟 시쯤 청계광장으로 가기 전까지 사람들은 긴장과 분노와 자부심들이 어우러진 어떤 공간을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길지는 않지만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던 시공간을 함께하며 내 마음은 조금씩 변하더군요. 마지막 남은 '잘난 척'까지 털어내고 그래도 나는 다시 '운동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동안 집회도 해봤고 정부에 항의도 해봤고 등등 해온 '가락'을 기꺼이 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참가자 동원이나 정치선동만을 고민하며 집회를 준비했던 '운동권'들에게 나올 게 많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제 모인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한 집회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집회 너머를 준비해야 할 때가 왔거든요.

 

물론 함께 있으면서 마음이 불편해질 때도 많아요. 저는 '애국'을 강조하는 게 참 불편하더라고요. 나라를 살린다고 전두환이 광주에서 총을 쏴댔고 박정희가 노동자들을 짓밟았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국익'이라는 선동이 모든 토론과 합의를 가로막았는데 다시 또 '애국'이라니요. 지금 촛불집회에서 모아지는 FTA 반대도 '국익'에 밀렸던 건데. 그리고 자꾸 "우리는 운동권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도 불편합니다. 그 '우리'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저렇게 말할수록 결국 정부는 더욱 집요하게 촛불집회를 '운동권'의 배후조종이라고 몰아가려고 하겠죠. "운동권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냐"라고 말하는 촛불집회면 좋겠어요.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대중의 우려와 분노를 읽지 않고 운동권을 갖다붙이는 것에 괜히 말려들 필요도 없을 텐데요.

 

하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나는 힘닿는 만큼 집회에 나가려고 해요. 그리고 이제는 인권활동가로서 집회에 나가려고 해요. 물론 굳이 그 얘길 하고 다닐 필요도 없고 안할 필요도 없는 거지요. 그냥 이제서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들을 들고 나왔던 자발성을 쫓아가는 거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5/25 20:23 2008/05/25 20:23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s://blog.jinbo.net/aumilieu/trackback/567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리우스 2008/05/25 21: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참 훌륭하셔요... 반성 마이하면서 공감하고 힘을 얻고 추천하고 갑니다...

  2. 여름:녀름 2008/05/26 02: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전 '여성보호'라는 원칙에 대해서 고민이 정말 많이 됐어요. 집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운동 방향을 가지고 집회에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근육도 마음도 욱씬욱씬 합니다.

  3. 미류 2008/05/26 09:2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리우스/ 너무 쉽게 들뜨면 안된다고 마음을 다지는데도 이날은 마음이 정말 복잡해지더군요. 물대포를 쏘겠다는 방송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차라리 살수하라고 외치면서 살수차 앞으로 몰려나갔어요. 만약에 대비해 우비를 준비할 정도의 경험이 있는 '운동권'의 모습과 엇갈리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리우스가 공감해주니 힘이 나네요. ^^;

    여름:녀름/ '여성보호'라는 원칙은 어떤 걸 얘기하는 건지 헷갈리는데 어떤 고민들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광화문에서 밤새는 동안 이주노동자 방송국에서 일하는 분 발언이 참 좋았어요. 발언도좋았지만 그런 얘기들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집회로 들어오고 사람들은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되는 거요. 조금씩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저는 내 '운동 방향'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서 마음만 안절부절하네요. ...

  4. ww 2008/05/27 03: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운동권이라는 말 자체가 원래 조선일보에서 처음 만들어 쓴거에요.

  5. 난다 2008/05/27 12:5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힘내셔요, 저도 함께할게요

  6. 미류 2008/05/27 14:0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ww/네, 그래서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그냥 피한다고 사라질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정말 싫은 말이기는 해요...

    난다/ 네, 함께해요. 뭘하면 좋을지 여전히 마음만 부대끼고 있는것도 같지만 음, 조금씩 마음따라 몸도 움직이겠죠...

  7. ^^; 2008/05/28 14:0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어제 이 글 보고 많이 공감하고, 많이 생각했어요. 미류 님, 허락도 받지 않고.. 싸이로 퍼갑니다. -_-;; 두고두고 읽어보려고요. ^^; 원치 않으시면 삭제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