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열흘도 안되는 기간 동안 집을 떠나있었는데도 집에 들어오니 풍경이 낯설다. 아마 동생이 열심히 청소한 덕분이기도 할 테고, 떠나기 며칠 전 동생이 방으로 들어가면서 구조를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집에 별로 있어본 적이 없는 오후 세 시의 밝기가 어색한 때문이기도 할 테다. 그래도 참 낯설었다.

씻고 짐 정리하고 세탁기도 돌렸다. 열흘의 일정이 순식간에 정리되는 듯해 아쉽기도 했다. 너무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면 안될 것 같아 오늘은 인터넷도 안 열어보려고 했는데 잠깐 자다가 일어나서 정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정리는 미루고 곧 잘 것 같기는 하지만. 으흐.

엄마가 올해 환갑이다. 엄마가 터키를 다녀오고 싶다고 얘기했던 건 2~3년 된 듯하다. 그래서 환갑 기념 여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같이 다녀왔다. 가기 전에 나는 "해외여행 별로 욕심도 없는데 엄마가 가자니까 모셔다 드리는 거다. 그나마 내가 이런 일 하니까 같이 가줄 수도 있는 거다"라고 했다. 엄마는 "가주는 거라고? 헛. 니가 돈도 못 버니까 내가 해외 구경 시켜주는 거다"라고 했다.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는데 이 얘기가 생각나면서, 떠날 때부터 '동행'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엄마랑 잘 다녀오고 싶었다. 같이 다니는 동안 드문드문(우리 가족은 대체로 서로 말이 없다는 것이 남동생의 평가)이라도 평소에 못 나누던 얘기 나누고 싶었고, 오래 떨어져 살던 엄마를 그냥 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다니는 동안은 곧잘 짜증부리고 말도 별로 안 하고 엄마가 뭐라 하면 툭툭 한 마디씩만 내놓고 그랬다. 돌아오기 이틀 전쯤부터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라지기는 힘들었다. 내가 워낙 나긋나긋하거나 살갑게 말 붙이는 성격도 아닌 데다가, '엄마'와 얘기할 때는 더 못되진다. 또 이런 시간이 올까 싶은데 후회 막심이다.

자존심이었던 것도 같다. 해외여행에 별로 욕심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한번 다녀오고 난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번 여행은 여행사의 상품을 구매한 패키지 여행이라, 한국에서처럼 배낭 하나 짊어매고 돌아다니다보면 또 욕심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렇다. 하지만 엄마 덕분에, 어쨌든 엄마가 경비를 부담했으니(이걸 들은 몇몇 사람들은 좀 당황하기도 한다, 내가 경비를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나 보다), 평생 못 밟아볼 땅을 밟아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터키 괜찮았다. 넓은 땅에 짧은 일정에 돌아볼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고, 또 다른 땅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기도 하겠지만,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도 엄마한테 충분히 고마워하지도 못한 듯하고, "모셔다 드린다"고 했으면서도 정작 잘 챙겨드리지도 못했다. 눈이 침침해 트렁크 자물쇠도 혼자 열지 못하시는 걸 보며, 괜히 속상해지는 걸 오히려 엄마한테 짜증내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안약 너무 많이 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고 보면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다. 흔히 '모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회가 강요하는 것에 반대하면서도 정작 나는 일상에서 엄마에게 모성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도 엄마는 좋은 사람이다. 내가 그렇게 데면데면 굴고 가끔 짜증을 내도 적당히 말을 이어나가거나 아끼신다. 나는 누구에게 또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누구에게라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궁금.

하루하루 간단하게 메모했던 것들을 풀어서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역시나 곧 자게 될 듯하다. 너무 늦기 전에 옮겨야겠다. 패키지 여행이라 터키를 다녀오고 싶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얘기는 없을 듯하고, 다니면서 들었던 생각들이나 풍경들이나 남겨놓으려고 한다. 그래도 혹시 터키를 다녀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아주 약간의 안내는 가능할 것도 같다.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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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5 23:28 2010/04/0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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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걷다 -100328 터키

    2010/04/06 16:34

    미류님의 [엄마와 함께 터키 다녀오다] 에 관련된 글. # 패키지 여행이라 여행사 직원인 인솔자가 함께 간다. 인상이 매력적이지는 않아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때는 인솔자가 가이드 역할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뭔가 오랜 시간 여행을 다닌 사람의 분위기를 기대했다. 일주일 가까이 같이 다니는 동안 첫인상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고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기내식이 나오는 줄 모르고 점심을 사먹었다. 먹다가 조금 늦어져서 전화를 걸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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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낮에뜬달 2010/04/06 00: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다녀왔구나..^^; 엄마한테는 잘도 성질을 내지..ㅋ 여하간 여행일지는 언능써야해.. 기억은 그리 오래 그다리지 않더라구..ㅎ

    • 2010/04/06 02:37 고유주소 고치기

      오오 누님...그다리지..라니
      오래오래 기다리는 느낌이 팍팍 오는데요..
      - 17년동안 유머만 찾아다닌 1人

  2. 미류 2010/04/06 15: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호호 다녀왔수~ 낼쯤 사무실에 나가게 될 듯. 회의도 있어. ㅠ,ㅠ 기록 남기려고 들어왔는데 메일 뒤적거리고 그러느라 시간 후딱 가버리넹. ㅋ 낼봐~
    준, 그다지... 유머러스하지는 않은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