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에이즈 감염인과 '차별'에 대한 인터뷰를 하던 중 그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난 별로 차별당한 적 없어. 그냥 내가 얘기 안하면 누가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적당히 알아서 하니까, 뭐 굳이 차별이랄 것까지는."

 

이야기가 이어지다 그는 이런 얘기도 했다. 

 

"가끔 그런 게 속상할 때는 있어. 친구들이랑 막 얘기하다가, 어 이거 얘기해도 되나 하는 고민이 될 때, 얘기하다 보면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는데 딱 멈추게 될 때 있잖아. 입원해서 친구들 찾아온다고 하면,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적당히 핑계 대고 다음에 오라는 식으로."

 

학교를 다니는 성소수자들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는 커밍아웃을, 누군가는 아웃팅을 당해 자신의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누군가는 다행히 좋은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 더욱 즐거워질 수도 있을 거고, 대부분은 '평범한' 친구나 선생님을 만나 편견과 차별 때문에, 괴롭힘 때문에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또 많은 성소수자 학생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친구들이 남자 연예인에 대해서 떠들썩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끌리는 여성 연예인 이야기를 해도 될까 말아도 될까를 고민하고, 짝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은근한 친밀함들이 형성될 때 나의 짝사랑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도 될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근원적인 폭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차별보다 더 무서운 차별이고 인권침해다. 길을 가다가 경찰이 길을 막는다고 해보자. 혼자면 몸싸움을 해볼 수도 있다. 항의라도 할 수 있다. 경찰이 여럿이라면 결국 항의하다가 지쳐 결국 돌아갈 수도 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온전히 개인의 내면으로 가두어,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이야기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 사회가 만들어낸 고통을 온전히 개인 안에서 풀도록 강요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정체성이 문제의 출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차별의 실체다. 

 

만약 세상의 모든 성소수자들이 20세 이상이라면, 그러면 학생인권조례에 '성적 지향'은 빠져도 될까. 아니다. 그래도 차별을 금지하는 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사유에 성적 지향은 포함되어야 한다. 만약 세상의 모든 여성이 20세 이후로만 임신이 가능하도록 인간의 몸이 만들어졌다면, 임신-출산은 차별금지사유에서 빠져도 될까. 아니다. 그런 학생이 있기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유를 이유로 하는 차별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모든 차별은 금지되어야 한다. 차별은 선생님과 학생들로부터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로도, 통학하는 길에도, 시험 준비를 위해 보는 참고서로도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 조항은 차별행위를 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교를 세상의 수많은 차별이 사라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기를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그래서 학생인권조례의 '성적 지향'은 성소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이걸 잘 이야기해주는 글 링크)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억압의 실체에는 언제나 나이에 따른 위계가 개입되어 있고, 그래서 미성숙하고 배워야 할 청소년들을 그런 존재로 형상화해내는 핵심 장치가 지금의 학교다. 학생인권조례는 모든 청소년들의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나이와 무관하더라도 지능이나 지식의 위계로 구성되는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지금 학생인권조례의 통과를 반대하며 '성적 지향'과 '임신 출산'을 문제삼는 이들은 우리 모두를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은 오늘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모두들 오늘을 역사적인 날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소수자들이 성소수자와 관련된 의제를 들고 독자적으로 농성을 조직한 것이 아마 한국에서는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과 조금 다르게, 우리 모두를 모욕하는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 성소수자들이 먼저 나서 싸움을 시작했다는 점이 역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기독교도들이 예수를 왜곡할 때 지금 이 땅의 예수들은 그렇게 싸우고 있다. 

 

누군가는 학생인권조례의 통과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런 농성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불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의 통과 자체가 녹녹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더 이 싸움이 필요하다. 이 싸움은 '성적 지향'과 '임신 출산'이 차별금지사유로 포함된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어 조례로 만들어질 때만 이길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를 저지하기 위해 성소수자혐오에 편승하는 자들과, 성소수자혐오를 부추기기 위해 학생인권조례에 시비를 거는 자들이 공격하는 지점에서 싸움이 시작되어야 한다. 

 

성소수자들이 먼저 시작했지만 모두가 함께 싸워야 할 자리다. 먼저 시작한 이들이, 아무도 우리만큼 절박하지 않다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빠지지 않고, 오늘의 이 자리가 세상을 바꿀 또 하나의 희망을 뿜어내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유쾌하게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찾아들 것을, 희망이 넝쿨처럼 번져나갈 것을, 그래서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할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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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4 15:54 2011/12/1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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