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다시

#7. 집에 왔다. #8. 엄마, 아빠와 손잡고 보러가려던 '꽃피는 봄이 오면'은 엄마랑만 다녀왔다. '죽이는' 대사가 하나 있었는데, 이현우(최민식 분)의 엄마(윤여정 분) 대사다. 이현우가 엄마한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술에 얼큰히 취해 전화를 하자 엄마는 '넌 지금이 처음이야' 이런다. 이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나 나올 법한 대사다. 끝이 없으면 시작도 있을 수 없다. 늘 처음인 삶, 그것이 프로를 거부하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들의 삶이다. 영화는 꽃피는 봄을 찾아 가지만 저 대사만큼은 어색하지도 않게 들어앉아놓고서도 사람을 '깬다'.


담판을 지을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일 서울로 갈 생각을 하니 못다한 말이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저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시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더 갖다붙일 수 있겠나. 늘 대화를 마무리하던 방식으로 '이쁜 척'하며 말을 마쳤다. 따지고 보면 엄마, 아빠가 내 삶의 방식을 '반대' 한다거나 극구 '말린다'거나 했던 적은 없다. 늘 걱정을 하시면서도 든든히 지켜봐주셨다. 오래 묵은 친구처럼... 지지해주시거나 격려해주시는 것도 아니지만 난 언제나 힘을 얻고 격려를 받았던 것도 같다. 나 역시 내가 뭘하고 사는지 대강 말씀드리는 터라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무언가 말씀드려야겠다고 내려왔지만 막상 더 드릴 말씀도 없다. 적어도 며칠 사이에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없다. 다만 앞으로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분명해진 듯하다. 나는 '평범'하게 살라는 말을 듣고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내가 유난스럽게 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살고 있잖아요! 라고 말씀드리기에는 도저히 '평범'하지 않은 구석이 있기도 했다. 도대체 '평범'의 경계가 어디쯤일까, 들고있는 카드도 없으면서 마치 협상에 나서는 '꾼'처럼 어느 정도를 내가 할 수 있을까를 가늠해보다가 이건 협상일 수 없는 부분임을 깨달았다. '평범'은 삶의 형식에 대한 형용사가 아니다. 그건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그냥 생활의 보고였다면 앞으로는 생활을 나누어야겠다. (지나치듯이 쓰려고 했는데 역시 길어진다. ...) #10. 잠시 멍하다. 주절거리고 싶던 것들을 모두 늘어놓지는 못할 듯하다. #11. 세상 모든 음식이 하나의 점을 향해 수렴되어가도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것이 김치인 줄 알았다. 지역마다 동네마다 특색이 있다지만 모든 김치는 설명될 수 없는 고유의 맛과 빛을 가지고 있다. '우리집' 김치는 '우리집'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추석이라고 집에 내려와 친척집을 다녀오는데 세상에!!! 김치가 똑같다. 그냥, 같다. 작은할머니댁 김치와 외할머니댁 김치가, '우리집' 김치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작년에 샀다는 김치냉장고 때문이다. 김치가 시간이 흘러도 시간을 먹지 않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포장김치의 맛과 빛을 띠고 있다. 집에 대한 기억을 김치냉장고에게 빼앗긴 것만 같아 나는 밥을 먹을 때마다 김치냉장고를 노려봤다. #12. 블로그라는 공간에서 두 달가량 지내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적어볼 요량이었으나 잠시 미루어야겠다. 읽는 사람들을 그리 많이 배려하지 않는/못하는 글들을 쓸 때마다 미안한 마음과 이 공간 안에 친구가 많지 않다는 외로움 비슷한 것들이 동시에 일었다. 지금도 그럴 만한 때인데 마지막 밤이라는 조바심 때문인지 손이 키보드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13. 아일랜드를 보고나니 엄마아빠는 모두 주무시고 담배냄새를 없애기 위해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안절부절 못하던 손은 다시 평정을 찾았으나 졸리다. 주절거리려던 것 하나 더 슬쩍 끼워넣고 다시 덮는다. 이렇게 수정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게 블로그다. --; 굳이 새로 글쓰지 않고 수정하는 것은 내 고집이겠지만 오늘까지는 터억... 내려놓고 싶다. #14. 이 시간에 블로그라... 처음이군.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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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30 21:36 2004/09/30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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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이 2004/10/04 04:1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주 문득, 그냥 들어왔다가 영화 대사를 보고 꼬리를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
    드라마 아일랜드(저는 잘 안보지만. ^^;)에서 윤여정(여기서도!)이 한 대사가 있었죠. "걔(재복-김민준)이 널(시연-김민정) 사랑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걔는 네 인생을 정말 사랑해줬어. 난 그래서 재복이 좋아"
    ...
    뭐, 부모님 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리고 맥락이 맞지도 않지만 저는 미류 인생을 사랑하고 싶어요. ^^; 화이팅..!

  2. 미류 2004/10/04 12: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 글을 쓴 날이 처음 아일랜드를 본 날인데 그 날 방영분이죠? 저두 그 대사 참 맘에 들었었는데. 그래서... 저 레이의 덧글에 넘넘 감격했는데 혹시 미류인생이 하류인생의 후속작이라거나 그런 거 아니죠? ^^; 유쾌하게 살아요, 우리 ^^ 감사합니다.

  3. rmlist 2004/10/04 13: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저 대사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시연의 부모들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

  4. rmlist 2004/10/04 13: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지금 아일랜드 다운받고 있는 중이예요. 누가 avi파일로 올려놨네요. 고화질이라서 용량이 엄청난데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보고 싶어서요.생각을 많이 하게하는 드라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