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인권이 어쨌다구?

는 못 가고 강의록만 읽었다. 바디우와 아감벤,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의 인권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는 강의였다. 바디우는 인권이 해방적 정치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윤리' 담론과 연결되면서 인도주의적 접근에 그치는데 이때 인간은 '그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머물고 만다고, 그래서 인권이란 '인간-동물'의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디우는 비-존재가 출현하는 '사건'을 경험하는 '주체'들을 통해 '상황'을 중단시키는 효과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권력인 주권을 통해 '벌거벗은 삶'들이 만들어지고 인권은 이들을 오히려 통제하는 담론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래서 인권은 스스로 삶의 형태를 구축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할 권리밖에 되지 못한다고, 그러니 버리고 떠나야 하는 짐일 뿐이라고. 

랑시에르는, 그러나 인권은 오히려 자신들이 갖지 않은 권리를 가진 자들의 권리이고 '정치'를 실행하는 자들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몫 없는 자들이 만들어내는 불화의 과정이 정치이며 성문화된 권리와 무언가를 만드는 자들의 권리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실천을 통해 정치적 주체화가 이루어진다고. 정치란 평등의 입증 과정이고 타자와의 '불가능한 동일시'를 향해 치안이 부여한 자리로부터 벗어난 '틈새'에서 '함께' 있는 실천을 시작할 때 인권이 요청된다고 말한다. 

발리바르는, 4강에서 다시 다룸. 

 

4강 인권의 정치와 철학 (1) : 관개체적 권리와 코나투스의 권리

강사는 인권의 탈자유주의, 탈인간중심주의가 관건이라고. (다음 강의에서는 보편성에 대해 논의한다고)

인권의 자유주의적 봉합은 인권을 도덕적 문제로 만들고, 개인의 권리로 의미화하고, 자유를 특권화시키는 문제를 낳았음. 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발리바르의 정치 개념을 빌려옴.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세 가지 층위의 정치 개념은 서로 맞물려 있는 듯 보이는데 그는 특히 첫 번째 층위-정치의 자율성(해방)과 연관지어 '인권의 정치'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함. 발리바르는 인간이 '관개체적 존재'로서 서로를 관총하는 횡단적 관계성 안에서 자신의 특이성을 구성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이 관개체성이 호혜성으로 작동할 때 권리의 집단적 주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함. 또한 발리바르는 인간과 시민 사이에 편차나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평등과 자유 역시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 그래서 모든 인간이 평등자유의 권리주체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권리를 무한히 확장해가는 영속적 반복의 정치가 인권의 정치라고 함. 또한 인간이 연합에 입각한 봉기를 통해 자신들을 시민들로 만들어가는 정치가 인권의 정치라고. 

한편 푸코는 '인간'이 근대적 앎의 배치가 구축한 지적 가상에 불과하다고 문제제기. 그래서 '인간'의 경계는 그것을 발명한 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구획되어왔고 설령 인간종의 모든 존재가 '인간'이 되더라도 인간주의는 생물학적 종의 이기주의가 될 수 있음. 스피노자는 모든 '개물'이 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양태'라고 함. 인간 역시 수많은 양태들 중 하나일 뿐임. 들뢰즈는 이걸 이어받아 '존재의 일의성(univoc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의 가치론적 위계를 거부함. 스피노자는 모든 양태가 '신=실체=자연' 안에서 동등하다고 보므로 초월적인 선-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악이란 하나의 양태가 자기 자신이 파괴되거나 해체되는 사태를 인식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함.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고유한 개념으로 윤리를 사용하며, 인간은 우리의 양태적 개성에 입각해 세계를 인식하고 타자와 소통할 수밖에 없지만 자신이 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신=자연의 역량을 표현하는 양태로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도로 증대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 윤리적 삶이라고 함. 이때 양태의 역량을 권리라고 말할 수 있음. 양태들은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무한한 관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마치 하나의 신체처럼 움직이는 어떤 공통적 관계를 구성하는 연합을 시도할 수 있으며 이것은 역량이 증대되는 요건이 됨. 인간들이 협동을 통해 구축하는 정치적 연합체를 공동사회 혹은 국가라고 불렀대. 그리고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자 하는 경향인 코나투스가 연합체 구성의 이유라고 함. 강사는 인권은 인간의 코나투스의 권리라고 제안함. 

 

인권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는 동어반복이거나 모순인 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인권에 대한 비판이나 옹호들은 저 문장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거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이를테면 바디우나 아감벤은 '태어났다는 사실' 외에 자유나 평등 따위로부터는 이미 배제된 인간에게 인권이 무슨 소용이겠냐고 묻고, 랑시에르나 발리바르는(둘은 조금 다른 듯하지만) 불가능한 자유와 평등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으로서 인권이 의미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랑시에르는 '-하므로'와 '-해야 한다' 의 '틈새'에서 정치의 가능성을 읽고 발리바르는 '인간'의 자리에서 '인민'을 읽어내면서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맞고 틀리고보다는 현실에서의 실천 또는 전략에 유효한 것이 더 의미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나는 그래도 인권을 옹호하게 되는데,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디우나 아감벤이 비판하는 지점들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이 결국 '배제된 자들의 정치'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너무 우연에 떠넘겨버리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말할 수도 주장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므로. 동물로서의 생명과 시민으로서의 삶을 구분하는 것 자체도 그리 명쾌해보이지는 않는다. 죽고 사는 것의 경계도 모호해진 시대인 데다가 죽음과 삶의 은유들(이를테면, 관타나모에 갇힌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라는 류의)은 은유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생명의 시작과 유지와 종료조차도 선으로 구분할 수 없는 스펙트럼인데, 생명의 유지만 하더라도 광활한 영역이다.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권리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자유주의와 인도주의의 논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인 것. 

스피노자의 철학에 호감이 가는 것은 전부터 내가 스피노자의 팬(스피노자주의자가 되기에는 잘 몰라서 ㅜ,ㅜ)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권 담론에서 '인간'에 접근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을 안내해주는 듯해서. 특권화되지 않은 존재(스피노자는 '양태'라고 말했지만)로서, 그러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자 하는 경향/역량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간'. 이때 현실에서 구체적인 인간이 존재하는 양식이나 그/녀들이 처한 조건은 모두 다르겠지만,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므로(이때 역량을 확장된 의미의 노동으로 읽을 수도 있을 듯) 인권은 존재하는 동시에 도래해야 할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인권의 내용이라는 것 역시 성문화할 수 있는 동시에 언제나 그것 이상(또는 '인간'과 늘 함께 움직이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앤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서라도 다른 양태의 보존을 추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일단 여기까지. 바디우와 아감벤을 마저 읽고, 스피노자를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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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윤리'와 스피노자의 '윤리'를 같이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바디우는 악이 선보다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서 '선'인 듯 제시되는 인권이 '악'을 비추는 역할만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인권의 역사를 보면 그것은 사실이기도. '인권'이 먼저 존재했던 게 아니므로. 그래서 그건 인권의 한계이기보다 가능성일 수도 있다. 한편 선-악의 구도로 단순하게 현실에 접근할 때 인권은 보수화되기도 쉬운데, 스피노자와 연관시켜서 보면 조금 더 들어가볼 수 있을 듯도. (그러나 도대체 내가 언제 이걸 읽을까 ㅜ,ㅜ)

 

(아무래도 다음에 정리하기로. 태그만 남겨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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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바디우의 '사건' 개념이나 랑시에르의 '정치'에서 장소 은유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한데 정리해보자. '장소'가 가진 힘이 무엇일지. 연구소 장소와 인권 강좌 후속활동이기도 하겠다. 

 

사회권 관련해서, 스피노자의 '공동사회', 아감벤의 '예외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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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역량', '연합'과 역량강화, 자기조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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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탈자유주의화는 인권담론이 자유주의화되기 쉬운 담론 구조를 설명하는 것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자유주의화된 결과만 볼 게 아니라 왜 자유주의화되(려)는가를. 담론 구조가 아니라 정치적 상황을 통해 설명할 수도 있겠군. 이미 설명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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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4 21:18 2012/08/04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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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냥 2012/08/04 23:1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 강의록 얻을 수 있을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