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땐 마냥 속아주기보다

 

 

한 달 전 감기가 낫지를 않는다. 아스피린을 통째로 먹고 쌍화탕 물 마시듯이 마셔도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이만 하면 얼추 떨어질 만도 한데, 자고 나면 또 머리가 자근거리는 걸 보면, 저로서도 뭔가 빌미를 찾는 것이다. 저로서도 좀 생색 나고, 하다 못해 좀 덜 구차한 퇴로를 찾는 것이다. 한번 내지른 울음 마냥 그칠 수만 없어, 울다말다 곁눈질하는 코찔찔이 아이처럼. 이럴 땐 마냥 속아주기보다 더 나은 할 일이 있으리라, 오래 전 떠난 사랑에게도 떠날 이유를 챙겨 주는 속 깊은 사람처럼.

 

-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에서



이성복은 시집을 펴내며 이렇게 말한다. "... 글쓰기가 지나친 갈망과 절망으로 울컥거리기만 할 때, 평소에 좋아하던 다른 나라 시에 말붙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내 관심사는 인용된 시를 빌미로 하여, 대체 나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맘때, 한참 억지를 부리고 난 아이처럼 멋쩍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위 시에 인용된 시구는 이렇다.

 

아, 사랑

가고 돌아오지 않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세 강의 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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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1 09:17 2004/10/1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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