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st in | 인지와자본
- Post at | 2012/04/20 20:08 | by
어떻게 자신의 사건을 살 것인가 - 이정우, <인지와 자본>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좋든 싫든 어떤 주체가 되어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신의 사건을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은 상당 부분 외부적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러한 조건들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우리 안의 생명/기氣는 항상 “당신의 사건을 살아라”고 속삭인다. 이론적인 환원주의들과 사회적인 포획장치들에 온전히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나의 사건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 즉 기존의 개체성으로서의 나에 집착함으로써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윤리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나”를 타자들에로 개방해 타자들과 함께 다양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관건이다. 자신의 사건을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창조적인 이-것, 특이존재에 귀속시켜 감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다양체의 객체성을 화해시켜 나가는 것이다(이는 또한 “나는 내가 행하는 그것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위대한 통찰을 탈-주체주의적으로 재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창조적’이란 존재론적으로 새롭고 윤리적으로 좋음을 뜻한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좋음이란 생체권력, 기호체제,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생명, 주체, 노동을 귀환시키는 행위임을 뜻한다. 이런 주체-‘화’야말로 바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창조적’이란 존재론적으로 새롭고 윤리적으로 좋음을 뜻한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좋음이란 생체권력, 기호체제,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생명, 주체, 노동을 귀환시키는 행위임을 뜻한다. 이런 주체-‘화’야말로 바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 즉 기존의 개체성으로서의 나에 집착함으로써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윤리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나”를 타자들에로 개방해 타자들과 함께 다양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관건이다. 자신의 사건을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창조적인 이-것, 특이존재에 귀속시켜 감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다양체의 객체성을 화해시켜 나가는 것이다(이는 또한 “나는 내가 행하는 그것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위대한 통찰을 탈-주체주의적으로 재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창조적’이란 존재론적으로 새롭고 윤리적으로 좋음을 뜻한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좋음이란 생체권력, 기호체제,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생명, 주체, 노동을 귀환시키는 행위임을 뜻한다. 이런 주체-‘화’야말로 바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 즉 기존의 개체성으로서의 나에 집착함으로써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윤리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나”를 타자들에로 개방해 타자들과 함께 다양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관건이다. 자신의 사건을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창조적인 이-것, 특이존재에 귀속시켜 감으로써 “나”의 주체성과 다양체의 객체성을 화해시켜 나가는 것이다(이는 또한 “나는 내가 행하는 그것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위대한 통찰을 탈-주체주의적으로 재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창조적’이란 존재론적으로 새롭고 윤리적으로 좋음을 뜻한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좋음이란 생체권력, 기호체제,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생명, 주체, 노동을 귀환시키는 행위임을 뜻한다. 이런 주체-‘화’야말로 바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정우, 「‘이-것’-되기로서의 주체-화」, 『인지와 자본』, 갈무리, 2011, 189~190쪽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dandan/trackback/1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