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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부, 재산의 기원

 돈, 부, 재산의 기원
 
 부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많은 혼란을 겪는다. 흔히 아끼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또 수 많은 개인이 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돈을 뺏고 뺏기는 경쟁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한 쪽으로 돈이 몰려서 부자가 생기고 가난한 자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에 올 때 이미 부가 몰려있는 상태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는 어느 한 쪽인 자본가에게는 수 많은 부와 풍요가 다른 한 쪽인 노동자 민중에게는 수 많은 여러 형태의 빈곤과 결핍이 만연해 있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 빈곤과 결핍이 실재하는 삶이 그대로 증명하는 바다. 그렇다면 애초의 주장은 논리의 초석을 잘못 놓은 것이 아닌가! 왜냐면 지금 막 생산관계에 뛰어든 사람이 뺏고 뺏기는 경쟁에 의해 승자가 될 수 있는 경우라야 애초의 주장이 논리가 서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적게 가진 자는 그 가진 것조차도 잃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 세상을 가로지르는 철칙,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이에 대해 정확함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야만 생존과 풍요, 자존을 위한 우리의 여정을 시작할 수가 있다.
 부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거대한 부를 소유한 그들, 그들의 주장대로 부는 세대를 거쳐가며 쌓아온 미덕(절약, 근면, 개인간 경쟁에서의 승리)의 소산인가?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어떤 사람이 열심히 경제활동을 한다고 하자. 그들은 노동자일 수도 있고 자영업자일 수도 있고 자본을 가진 자본가일 수도 있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한 후 그 수입(임금)으로 생활수단을 구입하고 생활(주거, 의식, 교육, 의료, 노후대비)을 해간다. 그는 자신이 노동하여 받은 돈을 생활을 하는데 다 써 버린다. 임금은 애초 생활할 만큼밖에, 또는 그보다 적은 양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간의 경쟁에 의해 부를 만들게 되었다는 논리가 애초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자본가의 경우를 보자. 평균이윤율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업이 잘된다치면 - 다른 사업보다 이윤율이 높아질라치면 그것은 곧 신규진입에 의해 서로간 경쟁을 하게 되어 필시 평균치 정도의 이윤율을 갖게 된다는 원리이다. 사회전체적으로 각 업종을 불문하고 평균치 정도의 이윤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많은 자본은 더 많은 양(이윤량)을 가져가게 되고, 적은 자본은 더 적은 양을 가져가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사회에는 독점하는 자본의 존재가 있어 비독점 자본이 가져갈 이윤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한다. 즉, 비독점 자본의 이윤율보다 높은 이윤율을 누린다. 일테면 사회의 평균 이윤율이 0.35정도라면 독점이윤율은 0.4정도로 - 비독점 자본이 1억원을 투여하여 이윤을 내려고 나섯을 때 비독점자본에게는 이윤량이 1억X0.3이던 것이 독점 자본이 1억원을 투여하였을 때는 독점자본에게는 이윤량이 1억X0.4가 되는 것이다.  (독점에는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의 형태가 있다. )
 
 이제 자영업을 하는 어떤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사회적 양이 어떠한지를 알아보자. 물론 자영업을 해서 자본을 축적하여 자본가로 상승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영업은 자영업끼리의 경쟁에 의해 스스로 가져갈 수 있는 양이 한정되며, 또한 보다 많은 이윤율을 가져갈 수 있는 독점자본과의 경쟁에서 늘 질 수 밖에 없고 보다 큰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란 어렵다.
 
 자영업자는 보다 큰 자본에 질식되어 일정한 이윤을 넘어설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자영업자의 운명은 그러한 것이다!

 애초 주제로 돌아가도록 하자.
 상황이 이러할텐대 그렇다면 부의 원천은 무엇인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최초의 부에 대해,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대해 생각해 보고, 현 상황에서의 부의 축적방식말고 이전에 "원래의 부가 존재하였지 않은가"라는 논리를 발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보다 많은 부를 얻어 가는 것은 - 최초의 부에 의해 - 더 많은 부를 가졌기에 더 많이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는 가정을 할 수 밖에 없다.
 
 논리적으로는 어떠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겠으나 이것이 실제적으로도 정말 그러하였던가?. 역사적으로 볼 때 가정은 어떻게 실재한 경우였는가? 이제 자본주의 역사, 자본의 역사를 살펴볼 때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자본주의적 부의 축적은 16세기까지 닿아 있다. 최초의 부르주아지는 도시에 사는 부르주아였다. 그들은 귀족들에게 상품을 팔거나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상품을 팔거나 도시안의 사람들에게 상품을 팔거나 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유럽과 다른 지역간의 무역을 통해서도 부를 축적하여갔다. 유럽과 다른 지역간의 상업 - 약탈, 부등가교환에 의해 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중상주의는 이러한 현실이 경제학이론에까지 투영된 것이고 이것은 그 당시 부르주아들의 관념의 표현이었다.
 
 이제 몇세기를 지나 대략 200여년전 18세기 쯤에 제2의 파도가 밀려들게 된다.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와 일단의 귀족들은 공업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바로 산업혁명이다. 그들은 그러기 위해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노동력을 갈망하게 된다. 바로 그때까지 모두에게 자유롭게 이용되고 있던 공유지(목축, 농경지)에 귀족들은 울타리를 치게 된다.(인클로져 운동) 이제 양이나 소는 있으나 목축할 초원을 빼앗긴 사람들은 양과 소를 기를 여력이 없어졌다. 그들이 생존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강요받았던 지위는 도시로 가서 거대한 무리 - 프롤레타리아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산업부르주아지들이 그토록 마지 않았던 자유로운 노동력의 현신(탄생, 구현)이다. 그들은 이전에 토지에 속박되 생활하는 대신 이제 공장에 붙잡혀 노동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공장 근처에는 하천을 끼고 주거를 위한 토굴들, 움막들이 지어졌고 노동자들은 해가 뜨면 그곳에서 나와 종일 노동하였고, 고된 노동이 끝나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고 그들의 안식처에 널부러졌다.

 최초의 노동자는 숙련을 요하는 전문기술자들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상황은 기계가 발달하자 일변했다. 숙련노동자는 폐기처분되었고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대신 공장으로 향했다. 한 자본은 다른 자본과 생산을 두고 시장을 두고 노동자에게 얼마나 저임금을 주는가를 두고,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쥐어짤 수 있는지를 두고,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더욱 혹사시키는가를 두고 서로 서로 경쟁했다.(자본가들은 쉴 수가 없었다.)
 여성과 9세나 10세의 아동들이 자신과 가족을 단지 생존시키기 위해 하루 14시간, 15시간 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노동하였다. (이것은 당시에만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오늘날 커피와 설탕, 나이키 축구화와 GAP 티셔츠 등은 현재에도 꾸준히 아이들의 생명을 단지 하루 더 연장시키기 위하여 아이들의 일거리로 강제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노동자들은 당시의 아동 노동자들과 같이 하루 12시간~15시간 노동하고 있다.) 아동들이 기초교육조차도 받지 못하고 노동하므로서 인민들의 지적수준은 바닥을 기게 되었고 혹독하게 강제되었던 아동들이 겪는 시련은 그들이 성인이 되는 사회에서는 인민들을 빨리 늙게 하고 젊어서 죽도록 하였다. 결국 아동노동 금지법이 제정되었고 노동시간 단축(10시간)이 자본가들에게 강제되었다. (자본가들은 이제 조금 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본의 시초축적은 그들의 호언장담 - 절약, 근면, 개인간 경쟁에서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세계에 대한 약탈과 내부세계 - 노동자-인민에 대한 약탈을 통해 이루어졌다.
 
  자본주의로의 변화에 있어서 어떤 지역에서는 그 변화가 수백년에 걸쳐서 일어난다. 그에 반해 어떤 지역에서는 그 변화가 수십년에 걸쳐 비교적 빠른 템포로 이루어진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는 인민대중에게 두 현상이 어떻게 이해되게 될 것인가가 우리의 질문이다.
 
 18세기 산업혁명까지는 200여년, 16세기까지는 400~500여년의 기간 오래도록 발전해 온 자본주의를 대하는 시각과 해방 후 5~60여년의 역사를 가지는 한국을 대하는 시각은 다를 수 있다. 한국 인민들이 보기에 그 변화는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또는 1차, 2차, 3차산업, 정보화, 금융화로 진행되는 별다른 기복 - 높낮이가 없이 평탄하게 이어지는 산업상의 단순한 변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일테면 장고한 시간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지면 그것(변화)을 생물을 오랜 진화의 산물로 인식하게 하는 것과 같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변화가 이루어지면 단순히 삼림의 천이정도로 이해되는 착시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과 같이. 즉 동일한 자본주의로의 변화인대 응축된 변화를 본래의 것과 다르게 보는 인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인민들의 '집단적 기억' 속에는 이러한 것이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의 자본주의도 동일한 경로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생산관계의 양식이 봉건적 생산양식인 자영농, 소작농의 형태가 지배적이었다가 - 그러한 사람들이 생산의 중추를 담당하여 오다가 - 이러한 농업노동자들이 기존의 생산터전에서 쫓겨나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내몰려서(농지개혁 후 농촌의 몰락이 이루어지고...) 극도로 수탈당하는 자본축적,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시기를 지내오게 되었다. 그리고 고만고만한 자본이 난립하여 경쟁하는 시기를 겪었고, 이후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는 독점자본이 성립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한국 자본주의는 짧지만 충실한 경로를 밟아오게 된다.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든가 결국 같은 말이겠지만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든가 "절약하고 근면하면 또 주변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 많은 부를 축적하여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인식이 한국 노동자에게 형성되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경쟁'이라고 말할 때 그 대상은 자본가가 아닌 오로지 주변 동료들이다. (경쟁상대가 자본가로 생각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생존을 두고 다투는 전쟁, 현실적으로 같은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끼리 치고 받는 안타까운 내분이다. 이 개별자의 개별자에 대한 투쟁은 사실상 자신들을 수렁에서 꺼내는 노력이 못되는 것이고, 함께 끌어안고 매달려 구덩이에 빠지겠다는 노력이다. 결국 누군가는 비참함에 내몰려야하는 것이다!! 게다가 절묘하게도 현실세계에서는 비참한 경우가 더 우점한다.
 누구를 더 비참하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 적을 앞에 두고 누가 먼저 죽을 것인가를 제비뽑기하는 병사들의 모습이다. 애초의 경쟁상대인 자본가와는 결코 경쟁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 질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노동자들끼리하듯이 자신의 사장님과 '누가 더 안정되고 편하지?', '누가 더 수입이 높지?'를 시샘하며 따져보려 하겠는가. 또 어떤 노동자가 감히 자본가와 누가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는가를 두고 경쟁할 것을 생각조차 하겠는가! 많은 사람(노동자)의 것을 가져가는 자가 더 많이 가질 것은 한눈에 봐도 명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술의 합이 크기 때문에 자본가들과 수입을 겨루는 것은 애초 불리한 게임이라는 것을 노동자들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인정하는 바다.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만 비교를 한다. 누가 더 편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누가 더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안정되고 편안함은 여지없이 비난과 시샘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제 손익분기점에 대해 알아보자.
 자본가가 생산을 할 때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생산설비(기계)와 건물, 원료와 노동비용이 그것이다. 생산설비와 원료를 넣고 노동력을 구매하여 노동력을 투입해 가다 보면 그것이 늦건 빠르건 비용을 투입하는 시기를 지나 순익(이윤)을 내는 시점에 언젠가는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손익분기점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까. 분명 불변자본(생산설비+원료)는 그 상품의 가치대로 구매한 것일 터이다. 이러한 것들(불변자본)로부터 잉여가치가 생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을 내는 시점은 필연코 오는 것이다. 생산설비라는 비용은 생산물(상품)에 그 가치를 감가상각이라는 항목으로 가치를 이전한다. 원료도 이점은 마찬가지여서 원료 구매시 지불되었던 가치가 생산물(상품)에 고스란히 이전된다. 그렇다면 잉여가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제 마지막 구매비용에 추가되었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비용이다. 따라서 자본가가 노동력 상품을 구매할 때 지불하는 비용도 마찬가지여서 노동력 상품의 생산비이다. 노동력 상품의 생산비는 노동자가 교육, 재교육을 받고 의식주를 해결하고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도 어김없이 노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그런 노동력의 생산비를 말한다. 노동자가 생존을 담보할 수 있을 만큼의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이라한다. 자본가가 구매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은 이 노동자의 필요노동시간만큼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그 이상을 일하게 하고 그 부분을 착복한다. 이 노동시간을 잉여생산물 - 여분의 생산물을 생산하는 시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한다. 이 잉여생산물(잉여가치)을 자본가가 전부 가져감으로써 자본가는 자신의 수중에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이제 수개월이 흘렀다. 자본가는 이러한 수법으로 원래 투여하였던 비용을 모두 상쇄할 수 있게 되었다 - 잉여생산물, 잉여가치로 채우므로써. 이때가 바로 손익분기점이 된다. 손익분기점 이후부터 자본가는 그야말로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아무런 채무도 지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잉여가치를 홀로 독식하게 된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생산비정도, 또는 그에 많이 못미치는 노동력 판매대금을 받아가면서 노동력을 계속하여 지출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가로질러 부를 축적하는 일상적인 방법이다.

 노동자가 이러한 부당함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사회에 모든 법은 지배적인 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의 법이고 자본가는 스마트한 전문가들을 변호사로 고용할 수 있다. 국가는 지배적인 계급의 국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우세한 화력앞에 무기력한 새총하나 정도로 비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도 노동자들의 수적 우위에는 어쩔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적고 우리 노동자들은 많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모든 것에 가장 앞서서 조직하고 결집하고 단결해야만하는 이유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에게 정치적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오늘 선거에서 또는 이전의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대표를 본 적이 있는가.. 없다! 부르주아의 여러 분파들이 패를 나누어 자신들의 지배를 지속하는데 동의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뿐이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중 어느 분파에게 한 표를 줌으로써 대안이 부재한 현실을 한탄한다. 스스로의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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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우리는 자본축적의 시초(처음) 축적, 본래적 축적을 살펴보았고, 손익분기점을 예로 들어 자본 축적의 일상적 형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시간에는 공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소개를 하면 흔히 공황하면 1930년대의 세계적인 파괴의 시기, 혼돈의 시기를 떠올린다. 그러나 얼마나 공황 - 같은 말이지만 위기, 침체가 흔한 경우인지는 한국의 97년말 IMF외환위기시와 곧 다가올 공황의 전조를 보게 되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빈곤은 과잉생산에 따른 것으로서 전자본주의(봉건, 노예, 원시) 시기의 빈곤과 차원을 달리한다.)

 <참고>
 + 노동자교양경제학 / 노사과연 2006 - 채만수
 + 자본주의역사 바로알기 / 책벌레 - 리오 휴버만
 + 자본론 1권 / 비봉출판사 - 칼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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