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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제1권 서문 중에서

 첫부분이 항상 어렵다는 것은 어느 과학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제1장, 특히 상품분석이 들어 있는 절을 이해하기가 가장 힘들 것이다. 나는 가치의 실체와 가치량의 분석을 될 수 있는 한 쉽게 했다. 화폐형태로 완성되는 가치형태는 매우 초보적이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혜는 2,000년 이상이나 이 화폐형태를 해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반면에, 훨씬 더 내용이 풍부하고 복잡한 형태들의 분석에는 적어도 거의 성공했다. 무슨 까닭인가? 발달한 신체는 신체의 세포보다 연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이다. 겉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이 형태의 분석은 아주 사소한 것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은 미생물 해부학이 다루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작은 것이다.

 가치형태에 관한 절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물론 무엇이건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며 따라서 또 독자적으로 사색하려는 독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물리학자는 자연과정이 가장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며 교란적인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곳에서 그것을 관찰하든가, 또는 가능하다면 그 과정이 순수하고 진행될 수 있는 조건 밑에서 실험을 한다. 이 책에서 나의 연구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이다. 이 생산양식이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나라는 지금까지는 영국이다. 영국이 나의 이론전개에서 주요한 예증으로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독일의 독자가 누구든지 영국의 공업·농업 노동자들의 형편에 대해 위선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든가, 독일에서는 사태가 결코 그렇게는 나쁘지 않다고 낙관적으로 자기를 위안하려 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외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가 높은가 낮은가는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해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 공업이 더 발달한 나라는 덜 발달한 나라에게 후자의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독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완전히 확립되어 있는 곳[예컨대 진정한 공장]에서는, 공장법이라는 규제가 없기 때문에 사태는 영국보다 훨씬 더 나쁘다. 기타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서유럽 대륙의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 발전의 불완전성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현대의 고난과 아울러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고난[이것은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방식이 진부한 사회적·정치적 관계들과 함께 존속하기 때문에 발생한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죽은 것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죽은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독일과 서유럽 대륙의 기타 나라들의 사회통계는 영국의 통계에 비하면 형편이 없다. 그렇지만 그 통계는 메두사의 대가리가 보일 만큼은 면사포를 걷어 올려주고 있다. 만약 우리 정부와 의회가 영국에서처럼 경제상태에 관한 정기조사위원회를 임명한다면, 만약 이 위원회가 영국에서처럼 진실을 규명할 그러한 전권을 가진다면, 그리고 만약 이 목적을 위해 [영국의 공장감독관, 공중위생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영국의 의사, 그리고 여성·아동의 착취, 주택·영양 등등의 상태를 조사하는 영국의 위원회 위원들과 같은] 전문지식이 있고 편견이 없고 공정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깜짝 놀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괴물을 추격하기 위해 도깨비감투를 써야 했지만, 우리는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도깨비감투를 눈과 귀밑까지 깊이 눌러쓰고 있다.

 우리의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이 18세기에 유럽의 중산계급에게 경종을 울린 걸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년]이 유럽의 노동자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영국에서는 변혁과정이 이미 뚜렷이 보인다.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그것은 응당 다륙으로 옮아올 것이다. 대륙에서 변혁과정은 노동자계급 자체의 발전 정도에 따라 더 가혹한 형태를 취하든가 더 인도적인 형태를 취할 것이다. 더 고상한 동기가 있든 없든, 현재의 지배계급은 노동자계급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 법률에 의해 제거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영국 공장법의 역사·내용·결과에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한 사회가 비록 자기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 사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 --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는 있다.

 있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하겠다.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미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인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는 달리,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

 경제학 분야의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부닥칠 수 있는 그러한 적들과 부닥치는 것만은 아니다. 경제학이 취급하는 문제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사람의 감정 중에서 가장 맹렬하고 가장 저열하며 가장 추악한 감정 -- 즉 사리사욕이라는 복수의 여신 --이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를 저지하는 투쟁 마당에 들어오게 된다. 예컨대 영국의 국교는 그의 신앙조항 38개 중 38개를 침해하는 것은 용서할지언정 그의 수입의 1/39을 침해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무신론 그 자체는 기존의 소유관계에 대한 비판에 비하면 사소한 죄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 한 예로, 최근 몇 주일 사이에 발표된 청서, 『공업문제와 노동조합에 관한 제국 재외 사절의 보고』를 지적하고 싶다. 영국왕의 재외 사절들은 이 보고에서 독일과 프랑스, 요컨대 유럽 대륙의 모든 문명국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현존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명해지고 있으며 또 불가피하다고 분명히 밪히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대서양 저쪽에서 미국 부통령 웨이드는 공개집회에서, 노예제도의 폐지 다음으로 현재의 자본관계와 토지소유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문제로 되고 있다고 언명했다. 시대의 대세가 이러하므로, 이 대세는 진홍색 망토《왕권》로도 흑색 법의 《종교》로도 감추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내일이라도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가 따딱한 고체가 아니라 변화할 수 있으며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유기체라는 예감이 지배계급 안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자본론 제1권 서문' 중에서 /김수행 비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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