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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읽기 1

어제는 아라리오 서울에 가서 이지현이라는 작가의 개인전을
오늘은 갤러리 루프의 한일 교류 미디어 전시를 봤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아라리오 천안에 가서 중국 작가 치우지에의 전시를 봤구나.. 치우지에는 보다가 너무 웃어서 턱이 빠질 것 같았다.

남성작가의 자기 연민, 그것도 국가의 정체성과 자신을 거침없이 동일시하며 역사와 자신의 삶을 보는 방식, 별 다를 것도 없는 자위성 변주가 치우지엔의 작품에서도 또.!(정말 촌스라와~) 스위스에서  조부모와 함께 고립된 유년시절, 유학생활을 한 작가는 소위 1세계에 대한 엄청난 열등감과 비하를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치환한 듯. 그런데 그 방식이 또 여성을 대상화 하는 거다. 중국의 급속한 자본주의를 재현할 때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창녀'의 이미지 인데다가 '목화밭의 마오(2007)'라는 작품은 어떻고.. 헐.. 게다가 작가 자신은 카메라와 붓을 벗삼아 중국 회화의 화려한 풍경 속에 시선의 주체가 되어 있다. (얼씨구) 작품의 밀도나 형식의 새로움도 그것이 담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 자체를 미화시킬 수는 없는 게다.  그나마 1993년 작품(제목이 잘 생각이 안나네)이 제일 나았다. 목화밭의 외롭고 가녀린 소년인 작가는 타자로써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빽빽한 목화밭 속에서 그는 이국의 문물과 떨어져 잠시 몽상에 빠져 있고 자신이 만든 '중국'이란 가상의 공간 한 역사 속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있었다. 오로지 이 작품만이 나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안전한 거리에서 쿨~한 척 무언가를 비판하는 관조자가 아닌 그림 안의 대상으로 자신이 만든 세상을 용감하게 보여주며 '소통'이란 걸 시도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명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의 이지현 개인전은, 애초에 관조자로 주체(작가)가 있지 않았다.  일상의 물건들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에 거대하게 나타나고 사적/공적 공간의 위계를 과감하게 허물어 버리고 있다. 작품의 형식에 이런저런 미학적 수사를 달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걸 다 빼고서라도 이지현의 작품은 타자로써 위치지어져야만 하는 주체의 고민, 사적/공적 영역의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않은 작가 자신의 곤란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런 질문들을 담은 작품이야말로, 삶에 관여하고자 하며 자신의 위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불완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시선이 아닐까.


미디어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기술적인 현란함만을 좇는 작가들이 많은 듯 하다.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군이 미디어 작품들인 것 같다. 매체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고,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와의 유기적인 연관성에 대해 고민이 적을 수록 어정쩡한 조합이 나올 확률이 많다. 신기함, 볼거리가 아닌 미디어가 가진 급진적 소통방식을 감동이라는 정서로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음...


그래도... 이 모든 작품들, 전시회에 감사를!

마음이 많이...좋아졌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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