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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럽헌법 논쟁'을 주목하여야 하는가?
[주장]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끝'과 대안 찾기
2005년 09월 05일 김덕민 기자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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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
진보평론 제16호 |
류한수 |
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
비극의 의의는 어떤 혁명적 시도들의 실패의 장렬함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세대들이 유사한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전 실패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에의 보증을 이후 시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증가시킬 것을 촉구하는 데 있지도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비극의 의의는 혁명을 원하는 그 모든 동일자의 법칙(혹은 확신)은 예기치 못한 타자의 법칙(혹은 확신)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항상-아직 '유한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비극의 의의는 혁명적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빠져들 그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자가, 혁명의 주체가, 여전히 타자를 향해, 심지어 자신의 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내는 운동을 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비극을 실패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끝내 도래하여 그 모든 실패들을 '보상(redeem)'해줄 성공에의 촉구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결단론적인 비극 이해일 뿐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공유했던 이 위험한 코드를 반복하지 말 것.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정세'일 뿐이라는 점, 우리는 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세로서의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다수의 곤란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볼 것. 그리고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할 수 없는 다수의 목표들이 문제인만큼, 혁명은 여전히 어떤 '정치'가 가능해야할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 만일 혁명이라는 정세가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정세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것. 혁명 속에서 무엇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혁명 속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사고할 것.
"우리에겐 반역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인식하라!"
'레닌과 간디'라는 짧은 발표문은 그동안 발리바르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요체를 단숨에 드러낸다. 바로 '대중운동'이 그것이다.
사실 대중운동은 고유한 '개념'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아마도 '대중'(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 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론들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와 관련해 언급된 스피노자의 경우, 이 문제와 직결된 그의 정서론은 아직까지 영어로도 적당한 책을 찾기 힘드니 제대로 된 접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프로이트의 경우, '비판적' 독해를 통해 재구성해야 하는데 프로이트 자체를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렇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면 시행착오를 거쳐서라도 어떻게든 도모해볼 수 있을 거다. '레닌과 간디'는 그런 점에서 무척 중요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불어로 읽었기 때문에...) 발리바르는 레닌과 간디를 시빌리테의 정치 안에서 구별되는 계기로 파악한다. 레닌의 경우 핵심은 대중운동에 힘입어 극단적 폭력을 정치(가 가능한)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집약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이다. 이는 간디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점이며 혹은 차라리 간디(의 정치)를 가능케 한 것은 레닌(의 정치)다. 하지만 레닌은 '내전'의 문제를 알맞게 다루지 못한다. 알다시피 레닌의 내전론은 'PT 독재'로서 '국가를 통한 국가의 소멸', 'PT(의) 독재'(곧 BG에 대한 독재)의 'PT(에 대한) 독재'로의 도착 이라는 난문에 부닥친다. 레닌에게서 이에 대한 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며 불리한 정세의 과잉결정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몇몇 천재적이지만 일시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국가 소멸의 조건의 생산'은 알맞게 사고되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내전' 혹은 차라리 '계급투쟁'의 문제를 군사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혁명적 폭력과 타협적 비폭력으로 양극화됐다.
간디가 입장하는 곳은 정확히 이 지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자구대로 하자면 이는 '진리의 힘'이다) 는 민주주의의 봉기적 전통을 재전유한 것이고 때문에 말의 강한 의미에서 '혁명'에 관한 재정식화다. 문제가 '진리'인 한에서 간디는 어떠한 종류의 '타협'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공민적 불복종'은 아주 강력한 '비합법주의'를 띤다. 발리바르가 그의 작업을 네그리의 '구성권력'과 연결시키는 것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논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간디는 레닌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곧 '공세적 비폭력'의 '건설적 비폭력'로의 전환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후자를 생산하는 전자의 실천을 발명하기 위해 '아힘사'(a-himsa, 비-증오)를 도입한다. '적에 대한 개방'을 통해 스스로의 관점을 전환하는 '대화주의', 대중행동(곧 대항폭력)의 자기제한적 실천, (그리하여 '최종적 전투'라는 관념의 완전한 기각) 그러니까 '혁명 안의 혁명'. 이것이 바로 시빌리테의 간디적 계기다.
하지만 간디 역시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여기서부터는 불어 해석이 안 되서 자의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그가 폭력의 문제를 (레닌과 달리) 추상적 곧 종교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폭력을 악화시키는 객관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변혁할 수 있는 정세적 실천을 (아마도 레닌만큼은)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무능력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지도자에 대한 사랑' 으로 봉합했고 이같은 동일화가 도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대로 사고하고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닌과 간디의 대화가 역설하는 것은 폭력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는 것, 계급투쟁('내전')의 문제를 非군사적인 방식으로 곧 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자는 것, 그리고 대중운동 및 집단적 주체화에 고유한 '정서적 투여' 또는 '동일화 과정'의 문제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아마 레닌과 간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스피노자나 (개조된) 정신분석학이 거론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내 생각에 '사회운동'이라는 말보다 '대중운동'이라는 말이 더 알맞은 것 역시 이 문제('대중들')를 정면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은 대개 정치운동을 그 대쌍으로 하고 국가에의 포섭을 역사적 사회운동이 타락한 원인으로 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조야하다. 前레닌적이고 前간디적이다. 레닌과 간디에게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 한계는 위의 진단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다. 난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다만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이 지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며 우리에게 정말 긴급한 것은 그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대중운동'이다.
올해 있었던 여섯 명 노동자의 죽음, 또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함께 목숨을 끊은 일가족들, 또 수능성적을 비관해 투신한 학생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자살한 두 명의 이주노동자. 이 모든 이들의 죽음은 말의 고전적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간결하게 잘 제시해 주고 있다. “자살 가능성을 통해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끊임없이 비극의 자료가 되어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 3막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있어!” 반면 차마 죽을 용기가 없어, 또는 일종의 본능으로 하루하루 목숨의 끈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시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그저 있음’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들이다. 지하철 구내 바닥에 깔린 몇 장의 신문지에 얹혀서, 또는 손 시린 쪽방의 바닥에서 차가운 사물성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힘겹게 ‘자기’를 유지해가는 이들에게 삶이란, 무의미한 고통의 나날이리라. 비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과, 사물과 ‘자기’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풍경의 상태로 견뎌가고 있는 이들 중 과연 누가 더 딱한가 따지는 건 그야말로 야만적인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하고 야만적인 건 “노동자들이 분신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한국의 현 대통령의 발언이다. 노무현 정권은 거듭 자신들 정권의 기반은 도덕성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들에게 이 말은 그들의 政敵들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자,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신뢰의 호소일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입에서 노동자들의 분신, 죽음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발언이 나온다는 건 자못 충격적이다. 그는 비극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한가하게 비극을 반추하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너무 어려운 걸까. 하지만 어쩌면 그의 두 가지 발언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헤겔이 칸트의 도덕의 추상성을 비판한 이래, 도덕과 윤리는 동의어가 아니라 오히려 동음이의에 가깝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개개인의 도덕적 품성이 아무리 뛰어나고 도덕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해도, 그것이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려에서 유리돼 있는 이상, 또는 사회적 관계의 추상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한, 도덕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이 자신들 개개인의 도덕적 결백성(이것이 사실인지는 의심스럽지만)을 주장하고 또 이를 스스로 확신하는 한, 자신들의 뜻에 거스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만큼 더 비도덕적이고 사익에 골몰한 사람들로 보이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자살에서 목적 달성을 위한 고도의 계산된 수단을 보고, 국익을 위해 파병을 결심하고 인간사냥과 다름없는 이주노동자들 추방에 골몰하는 야만적인 모습이 나오는 건 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극우 꼴통’이라고 조롱하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당수 장-마리 르펜은 자신의 노선을 아주 놀랄 만큼 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나는 내 딸들을 내 조카딸들보다 더 사랑하고, 내 조카딸들은 내 사촌들보다, 내 사촌들은 내 이웃들보다 더 사랑한다. 정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프랑스인들을 더 사랑하며, 누구도 내가 달리 말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르펜의 이 명제에서 한국의 현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리게 되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한국 사회는 야만사회인가. 이 질문은 뜬금없는 것도, 과장된 수사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한낱 수단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타인의 생명 및 안전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에서 이는 매우 절박한 정치적?윤리적 질문이다.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 없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지속적인 야만의 퇴치 없이 가능할 수 없다는 건 근대 정치의 핵심 원리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임을 자부할 수 있으려면 도덕과 국익으로 포장된 야만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야만이냐 시민문명이냐, 이것이 문제다. 진태원 / 서울대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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