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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합의의 '10대 쟁점'…'10대 讀法' | |||||||
<분석> 전문가 진단 "'장밋빛'은 없다…곳곳에 암초" | |||||||
2005-09-21 오전 10: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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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소극적인 동기가 작용한 합의였던 만큼 성명의 문구 곳곳에는 참가국들이 편의에 따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여지가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발표 하루만에 튀어 나온 '경수로 제공 시점'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행동 대 행동'은 고사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말 대 말' 단계에서 조차 순탄치 않은 행로를 예고한다. <프레시안>이 앞으로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쟁점 10가지를 추려 그 독해법을 소개한다. ▶ 쟁점 1. '빠른 시일' vs. '적당한 시점' 핵 포기를 먼저 할 것이냐, 그에 대한 상응 조치를 먼저 할 것이냐는 문제는 2002년 2차 북핵 위기 발발 이후 전 시기를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핵심 쟁점이다. 북한의 요구 사항은 '체제 보장'에서 '불가침 조약' '경수로 제공' 등으로 변해 왔지만 누가 먼저 행동할 것인지는 북핵 문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한때 '동시 행동 원칙'을 들고 나왔지만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공동성명도 '핵을 포기하고 빠른 시일 내에 핵무기비확산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장·감독으로 복귀할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한다'고만 돼있고 선후 문제는 명시하지 않았다. 성명 다음날부터 북한은 '경수로 제공 먼저', 미국은 '핵 폐기 먼저'라며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는 듯한 설전을 벌였다. 이같은 논란은 무엇보다 북미 간에 자리하고 있는 극도의 불신 때문이다. 이는 국제적인 구속력을 가진 법·제도적인 틀을 갖출 때에만 풀릴 수 있다. 그러나 6자회담이라는 논의틀과 공동성명은 정치적인 구속력만 있을 뿐 법적인 강제력이 미흡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따라서 11월 시작되는 제5차 6자회담은 행동의 선후를 따지기보다 한쪽이 먼저 행동했을 때 다른 쪽도 약속을 지키게 하는 '강제력'을 담보하는 장이 돼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 쟁점 2. 평화적 핵 이용권 인정? 미국은 제4차 6자회담 휴회기간 동안 평화적 핵 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유연한 태도를 취해 왔다. 이는 1단계 회담의 휴회 이유가 평화적 핵 이용권을 둘러싼 논란이었고, 경수로 제공이 평화적 핵 이용권의 하위 개념인 것에 비춰볼 때 다소 모순된 태도였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 변화는 미국이 평화적 핵 이용권을 '이론적인 문제' '미래의 권리'라는 식의 추상적 개념으로 재정의한 데에 따른 것이다. '숨을 쉴 수 있는 권리는 누구나 있다'는 우리 정부 당국자의 비유대로 '평화적 핵 이용권'이라는 원론적 의미의 핵 주권은 허용하되 그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은 별개의 문제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적 이용권은 그러나 실험용 혹은 산업용으로 당장 핵을 이용할 수 권리를 뜻하는 것으로 미국의 개념과 논의 수준이 다르다. 이처럼 이번 공동성명에 포함된 평화적 핵 이용권 문구 역시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해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쟁점 3. 네오콘은 공동성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미 행정부가 이번 공동성명을 온전히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불법 행위에 대한 보상은 없다'는 원칙을 지속적으로 천명해 온 미국이 공동성명에 포함시키기조차 거부했던 경수로 문구가 불완전한 형태지만 일단 명시됐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성명 발표 직후부터 더욱 강한 어조로 북한의 선(先) 핵포기를 주장하는 것은 북한을 향한 외침인 동시에 북한과의 협상 자체를 거부했던 미 행정부 내 강경파(네오콘)들을 향한 '국내용'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부시 1기 대북 정책이 실패로 평가되면서 협상 기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경파들이 경수로 관련 문구를 빌미로 행정부 내 협상파들을 압박하며 공동성명을 사실상 무효화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쟁점 4. 남한내 핵무기 사찰 요구 가능성 '한국 영토에는 핵무기가 없음을 확인'한다는 구절은 이번 공동성명 중 눈에 띄는 대목의 하나다. 미국은 모든 핵무기 배치에 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 정책을 취해 왔지만 한반도에서만은 주한미군에 핵무기가 없다고 명시적으로 부인해 왔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91년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하겠다고 선언했고, 같은해 12월 노태우 대통령도 한국 영토와 영해 어느 곳에도 핵무기는 없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16일까지도 남한에 1000여 개의 핵무기가 있다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따라서 북한이 자신들이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국제적인 감시 체제에 들어가는 동시에 남한 내에도 핵무기가 없다는 것을 검증해야 한다고 요구할 가능성이 짙다. 이는 핵 폐기와 경수로 제공의 선후 문제 못잖은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또 설령 한국 영토 내에 핵무기가 없더라도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결국에는 펼 것으로 보인다. ▶ 쟁점 5. 북한은 '중대제안'을 받아들일까 우리 정부는 북한에 200만kW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중대제안은 신포 경수로의 종료를 전제로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취해 왔다. 문제는 공동성명에 '중대제안은 신포 경수로 대체용'임이 명시되지 않은 채 '200만kW의 전력공급에 관한 7월 12일자 제안을 재확인했다'고만 돼 있고, 북한의 수용 여부도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의 입장이 뚜렷한 상황에서 선뜻 전력을 받겠다고 하면 그것은 곧 신포 경수로의 포기를 의미하므로 북한 입장에서는 수용 여부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협상 전략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번 2단계 회담 초반 신포가 아닌 새로운 경수로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공동성명에는 단지 '경수로'라고만 돼 있어 신포 경수로의 끈도 여전히 쥐고 있다. 따라서 공동성명 이행 협상 과정에서 신포 경수로 공사 재개와 전력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할 수 있다. 경수로 제공의 모호함과 전력 공급의 명확함을 십분 활용한다는 시나리오인 것이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지만 북한이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한다면 협상 과정이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송전의 전제가 신포 경수로의 종료임을 수없이 공언한 우리 정부도 북한과 '퇴로 없는 싸움'을 벌일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 쟁점 6. 송전과 경수로 공사비, 이중 부담? 경수로 공사비 문제는 북한이 모든 핵을 포기하고 NPT·IAEA의 보장·감독으로 복귀할 경우에나 해당된다는 것이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의 공통된 인식이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0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경수로가 건설되지 않는다면) 송전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데 경수로 제공과 맞물리게 되면 어쨌든 총 비용은 줄어들 수 있다"는 계산법을 제시했다. 즉 경수로 건설이 완료될 때 송전을 중단하는 '한시적 송전'이 된다면 '무기한 송전'에 들어갈 비용이 줄어 총량상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공동성명의 약속대로 핵 폐기 수순을 밟아 경수로를 받을 수 있는 단계가 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이중 부담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신포가 아닌 곳에 경수로를 건설할 경우 공사비 자체도 만만찮을 게 분명하다. '케도 식의 부담', 즉 공사비 대부분을 우리 정부가 떠맡는 일은 없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희망사항'에 불과할 수도 있다. 또 5개국이 북한에 에너지(사실상 중유)를 제공키로 한 약속까지 이행할 경우 비용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내에서 또 다시 '퍼주기' 논란이 재현될 수도 있는데, '민족 경제공동체 구축을 위한 비용'이라는 우리 정부의 논리가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할지 의문이다. ▶ 쟁점 7. 평화체제를 위한 포럼은 자체 추진력을 가질 것인가 이번 공동성명에서 또 하나의 성취로 꼽히는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를 위한 협상'은 한반도에 잔존하고 있는 냉전 질서를 북핵 문제의 해결과 함께 해체하려는 시도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가 북핵 문제에 발목이 잡힐 경우,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2002년 북일 평양선언, 97년 제네바 4자회담 등에서 처럼 한반도 신질서 구축 문제가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지적이다. 평화체제 구축의 '진도'가 아무리 많이 나가더라도 문제의 핵심인 북핵이 꼬일 경우 사상누각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체제 논의가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북핵 해결이 우선 진전을 보여야 하는 것은 물론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노려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설령 북핵이 난항을 겪더라도 포럼이 자체의 추진력을 갖고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을 마련하는 장이 돼야 공동성명의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쟁점 8. 중국, 6자회담 발판으로 부상? 이는 북핵 해결 자체에서 나오는 쟁점이라기보다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서 나타날 중대한 문제가 될 전망이다. 6자회담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중국이 지역내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할 것이며 미국은 일본과 함께 이를 견제하려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측의 그같은 각축이 주로 한반도를 대상으로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국 언론들은 벌써부터 중국의 지역적 영향력이 확대되면 미국과 일본의 견제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우선 제5차 6자회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중국은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또 이번 공동성명에서 거론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포럼에도 참여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어 '중국이 관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꾀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 쟁점 9. 제5차 6자회담은 약속대로 열릴 수 있을까 이번 공동성명과 제5차 6자회담 사이에도 북미 접촉을 비롯, 참가국간 다각도의 접촉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 진단대로 공동성명은 북핵 해결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참가국들의 편의대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세부적인 협상거리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과거보다 더한 갈등이 노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행동의 선후차를 두고 성명 발표 다음날부터 벌어지는 논란을 볼 때 회담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하는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이 공동성명 문구 하나하나를 갖고 옥신각신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면 공동성명은 아무 강제력 없는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박순성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북미간에 실무 협상을 한 후에 6자회담을 한다는 식의 북미간의 기본틀이 없어 아쉽다"고 평했다. ▶ 쟁점 10. 북일 관계정상화 과정이 북핵 해결의 걸림돌은 되지 않나 공동성명에 북일 관계정상화 문제가 언급된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밝힌 '북한과 관계정상화 추진' 입장으로 탄력받은 바 크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관계정상화라는 표면적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북한과의 관계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는 일본이 북핵 테이블에까지 이 문제를 끌어들일 경우 공동성명 후속 회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북미간의 관계정상화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더군다나 '유엔헌장의 원칙과 목적을 준수'한다는 공동성명 2조의 이면에는 북한 인권과 미사일 문제가 함축돼 있는 것으로 보여 이 문제들이 북핵 테이블에 오를 경우 '혹 떼러 갔다 혹 붙이고 오는 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황준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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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이 6자회담 타결 하룻만에 경수로 건설 시기를 놓고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기존 신포 경수로 종료를 전제로 한 한국의 중대 제안과 6자회담 합의문에서 언급한 경수로가 서로 겹친다는 주장도 나와 논란이 거세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1일 열린우리당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해 "(북·미간 대립이) 앞으로 많겠지만 얼마든지 타결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복안도 있고 전략도 서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번 6자회담 합의문에는 "북한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며 "다른 참가국들은 이에 대해 존중을 표시하고,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고 되어있다. 경수로 제공 자체를 약속한 것도 아니다. 북한이 경수로를 제공해야 핵무기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한다는 주장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어림없다"며 일축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도 지난 19일 6자회담이 타결된 직후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NPT에 복귀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를 이행한 다음에 경수로가 제공된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차관도 같은 날 "북한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중국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문제는 북한의 핵 폐기는 '현재형'인데 비해 경수로는 '미래형'이라는데서 발생한다. 오는 11월 열리는 5차 6자회담에서 격론이 벌어지겠지만 결국은 '동시행동'을 최대한 충족하는 식으로 결론을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이 NPT에 복귀하고 IAEA 사찰을 수용하는 것과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 제공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북한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동시에 이행하는 방안 등이 논의 될 수 있다. 신포 경수로 놔두고 경수로 따로 짓는 건 낭비
그러나 현실은 간단치 않다. 지난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경수로 2기는 2003년 12월 완공이 목표였다. 그러나 신포 경수로는 34.5%의 공정을 보인 가운데 지난 2003년 11월 미국과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신포 경수로의 총 공사비는 46억달러로 계상됐으며 이미 15억4000만달러가 투입됐다. 총 공사비 가운데 70%인 32억2000만 달러는 한국이, 9억2000만 달러는 일본이, 나머지는 유럽연합(EU)이 부담하기로 했다. 미국은 비용을 내지 않는 대신 경수로 완공 때까지 연간 50만t(연간 5000만 달러)의 발전용 중유를 북한에 주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 7월 12일 우리 정부는 중대제안을 공개하면서 대북 전력 제공 비용을 신포 경수로 공사비 중 한국 부담금 32억2000만 달러 가운데 이미 쓴 11억7000만 달러를 뺀 나머지 돈에서 충당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200만㎾ 송전선로 건설에 6000억원, 변환 설비에 1조원, 변전소 2곳에 12000억원 등 총 1조7200억원이 중대제안 이행에 필요한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해마다 200만㎾의 전력 생산에 1조원 정도가 들 것으로 보인다. 만약 34.5%의 공정이 이미 진행됐고 15억달러가 넘는 돈이 투입된 신포 경수로를 폐기하고 다른 경수로를 생각한다는 것은 심각한 낭비다. 신포 경수로는 공사를 속개하면 4~5년이면 완공될 수 있지만, 새 경수로 건설에는 또 10년이 걸려야 한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우선 경수로 부지로 신포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지난 20일 "북한에 대북 송전을 하되 경수로가 완공되어 발전을 시작하면 그때 대북 송전은 중단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중대제안과 6자회담 합의문에 언급된 경수로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1조7200억원이나 들여 만든 송전 및 배전 설비가 경수로가 완공되는 즉시 필요없게 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는 것이다. 미국이 부담하던 중유 5개국 나눠 부담... 일본의 부담이 제일 클 듯 이번 합의문에는 "중국·일본·한국·러시아·미국은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 이어 "한국은 북한에 200만kw전력을 제공하는 2005년 7월 12일의 제안을 재확인했다"로 되어있다. 여기서 에너지는 중유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은 남한의 전기도 받고, 중유도 공급받고, 경수로도 얻게 되는 등 모든 것을 얻었다"고 볼멘 소리를 하고있다. 원래 제네바 합의는 경수로 완공 때까지 중유는 전적으로 미국이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중·일·러·미 등 5개국 모두 중유 공급의 당사자로 되어있다. 합의문에 각국의 구체적인 분담 액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협의를 해야 한다. 물론 현재 정부안에 따르면, 대북 송전은 오는 2008년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2008년까지는 국제사회가 중유를 북한에 공급하고, 이후 전력을 직접 제공하다가 경수로가 완공된 다음에는 이를 끊으면 된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과정을 겪을 필요없이, 제네바 합의 때처럼 중유만 제공하다가 경수로가 완공되면 이를 끊는 것이 더 간편하고 비용도 덜 든다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국제조사문제연구소 조성렬 박사는 "경수로가 완공된 뒤 송전 및 배전 시설은 필요없겠지만 통일에 대비해 북한에 대한 사회기반시설(SOC) 건설 차원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이후 경수로가 건설된다면 대북 전력 제공에 들어간 한국의 비용은 상계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박사는 "중유 공급의 경우, 미국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행정부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할 것"이라며 "한국은 전력제공을 하니까 빠질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본·러시아·중국이 대부분을 부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은 이미 북한에 상당량의 석유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곧 북한과 곧 수교협상을 하게 될 일본의 부담이 제일 클 것으로 보인다. |
9·19 공동성명, 제네바합의와 비교해보니 / 내용·형식 훨씬 포괄적 / 국제적 구속력 더 높아 |
[한겨레]2005-09-21 04판 04면 1096자 |
‘9·19 6자 공동성명’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 1994년 10월의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 이후 11년 만에 나온 역사적 문건이다. 이번 6자 공동성명(Joint Statement)과 제네바 기본합의(Agreed Framework)는 둘 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문서다. 그러나 두 문건은 합의 주체와 성격·내용·형식 면에서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 양자 합의였던 제네바 합의와 달리, 공동성명은 6개국의 다자 합의라는 점에서 국제적 구속력이 상대적으로 높다. 북-미 간 배타적 양자 교섭이었던 제네바 합의와 달리, 이번엔 한국과 중국이 적극적 구실을 했다는 점도 합의의 생명력을 높이는 대목이다. 내용적으론 제네바 합의가 영변 흑연감속로 등의 ‘동결’에 초점을 맞췄던 반면, 이번 공동성명은 “모든 핵무기와 핵계획의 ‘포기’”를 명시하고 있다. 핵 비확산협상 역사상 유례없이 포괄적인 규정이다. 대신, 관련국의 상응 조처도 포괄적이다. 제네바 기본합의는 북-미 관계의 “대사급 승격”을 밝힌 반면, 공동성명은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 추진으로 폭이 넓어졌다. 이는 북한의 외교적 숙원 사업이다. 제네바 합의는 흑연감속로 포기의 ‘대가’로 경수로 제공과 중유 제공 방안을 명시했다. 이번엔 ‘대가’라는 언급 없이,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논의”라는 추상적 문구로 대체됐다. 그러나 미국 등 5개국의 에너지 지원, 한국의 200만kW 대북 직접 송전, 6자의 양자·다자적 에너지·교역·투자 증진 등 좀더 근본적인 지원·협력 방안이 덧붙여졌다. 이번 성명에 △직접 당사자가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벌이기로 하고 △6자가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방안·수단을 모색하기로 한 것은 각별히 중요하다. 북핵 문제에만 집중했던 제네바 합의와 달리, 이번엔 북핵 문제를 ‘큰 산의 나무’ 또는 동북아 평화 프로세스의 일부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네바 합의엔 관련 내용이 없다. 다만, 북-미 양자 사이 구체적 행동규칙을 적시한 제네바 기본합의는, ‘말 대 말’ 합의인 이번 공동성명이 ‘행동 대 행동’의 세부 일정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추될 ‘준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
<6자회담 타결> '북핵' 6자회담-94년 제네바합의 차이점 |
[경향신문]2005-09-20 45판 05면 1425자 |
19일 2단계 제4차 6자회담에서 타결된 6개항의 공동성명은 19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에는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가정이 전제가 됐다면 6자회담은 북한의 생존을 전제로 한 '빅딜'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회담 방식=제네바 합의문이 북.미 양자회담 방식으로 타결됐다면 6자회담 공동성명은 핵문제의 협상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남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간 협상의 산물이다. 제네바 회담과 같은 양자협상은 어느 한쪽이 약속을 깨면 합의사항이 백지화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북측이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핵개발을 지속해온 만큼 먼저 합의사항을 어겼다고 주장하고 있고, 북측은 2003년까지 2백만㎾의 경수로를 제공하지 않아 미측이 합의문을 먼저 파기했다고 맞서고 있다. ◇의제=제네바 합의문이 북한의 핵시설 동결과 보상에 중점을 뒀다면 6자회담 공동성명은 북한의 핵무기와 핵관련 프로그램을 모두 폐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제네바 합의문은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 및 중유를 제공하고, 정치.경제적 관계정상화를 이룬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제네바 합의문을 통해 경수로와 중유공급 문제를 전담하는 국제컨소시엄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출범했다. ◇대북인식=미국은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만큼 합의사항 이행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94년 북한의 핵시설 단지인 영변을 폭격하려던 계획을 한국 몰래 세운 것은 미국의 대북 인식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하지만 6자회담에서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 권한을 보장하고 참가국 모두 대북에너지 제공의지를 명확히 한 것은 참가국들이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이 단기간에 붕괴하지 않고 '생존'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경수로=제네바 합의문과 6자회담 공동성명은 표현에서 차이가 있지만 대북경수로 제공문제에 관련한 문구가 담겨 있다. 6자회담 틀내에서 새로운 경수로를 요구한 북측에 대해 미측이 단호히 거부하면서 결렬 위기로까지 치달았던 회담은 비록 애매한 표현이지만 '경수로'란 단어를 공동성명에 집어넣으면서 극적 반전을 이뤘다. 참가국들은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조율을 마쳤다. 추후 '적당한 시점'을 정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북측으로서는 사실상 '빅딜'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협상중재=북측은 제네바 합의 당시 철저히 '통미봉남'(通美封南) 원칙으로 임했지만 6자회담 때는 '통한통미'(通韓通美)로 전략을 바꿔 남한의 중재를 적극 수용했다. 이번 회담에서는 남한이 사실상 협상을 주도했다. 베이징|박영환 기자 |
94년 제네바합의와 차이는‥ 미래 핵개발뿐 아니라 기존 핵도 포기 | ||||||||||||
[한국경제신문]2005-09-20 954자 | ||||||||||||
19일 2단계 제4차 6자회담에서 타결된 6개항의 공동성명은 1994년 체결된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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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
진보평론 제16호 |
류한수 |
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
“우리 사회는 크게 세 가지 분열의 요인을 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이고, 그 둘은 정치 과정에서 생긴 분열의 구조이며, 그 셋은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과 격차로부터 생길지도 모르는 분열의 우려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노무현이 지난 8월 15일 해방 60년을 맞이하여 오늘 한국사회가 어떤 위기(분열)에 처해있는지를 제시한 경축사 중 일부다. 이어 그는 각각의 원인으로 미완의 과거 청산, 지역구도/대결적 정치구도, 인재 육성과 생산설비투자를 소홀히 하는 기업과 고용의 유연성을 가로막고 있는 기존 노동운동(대기업노조)을 지목했다. 이것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노동조합운동이 노무현도 분석해보려 하는 한국사회 위기를 외면하거나 피상적으로 인식한다면, 그리하여 자신이 누려왔던 혹은 과거 누리고 싶었던 권리를 방어/쟁취하는데 급급하다면, 개혁을 선도하는 이 같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완전히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한국사회의 위기를 체험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누구든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운동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지지 없이는 임금 한 푼 올릴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위기인식에 뒤처진 노동조합운동은 이를 따라잡으려는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기된 사회적 의제를 급진화 한다는 미명아래 자신의 운동의 일부로 삼으려는 발상이 바로 그것이다. ‘x-file공대위’나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 같은 시도들 말이다.
이 같은 노선의 가장 큰 비극은 그 성공가능성을 철저하게 지배세력들의 성공가능성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몇몇 지역, 공장 노동자들이 이를 통해 약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에 대한 지배세력들의 통치체제의 확립이 노동자계급의 전반적인 지위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쯤은 최근 몇 년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IMF를 매개로 신자유주의자들이 확립한 지배체제 - DJ정권으로 통칭되는 지배체제가 확립된 이후 노동자계급이 어떤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는지를 떠올려 보라. 지배세력들의 이 같은 통치술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 지는 차치하더라도 설사 성공한다 한들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에 반하는 결과로 수렴될 일에 노동조합운동이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오늘 노동조합운동의 노선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토론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운동의 현 상태에 대한 진단에서건 노동조합운동이 처한 현실(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시대)에 대한 분석에서건 어떤 이유에서라도 말이다. 수많은 노동자운동 활동가들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집단적으로 토론을 벌여야 한다. 왜 오늘 노동조합운동이 전체 인민의 지지는커녕 노동자들 사이의 지지도 못 얻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단결(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어렵게 하고, 노동자계급내부의 위계(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중심국가의 노동자/주변국가의 노동자)를 극복하지 못하고, 노동조합 내의 민주주의를 요원하게 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이 어떤 것을 목표로 어떻게 해야 전체 노동자의 요구와 조화를 이루는지, 내부의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조직 내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는지, 나아가 어떻게 해야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 농민, 여성들 사이의 동맹을 가능케 하고, 착취질서를 폐절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산파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노동자의 시신을 놓고 ‘열사다’ ‘아니다’ 식의 논란을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여야 하는 비통한 현실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질라라비 9월호 발간사
1993년 새벽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러시아에 관한 명상"에 실린 노래다. 후손들에게...
작곡자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전화 한통화면 알아낼 수 있겠지만 모른 채로 놔두려한다. 그게 좋을 것 같아서다. 작사는 김정환 시, 노래는 윤선애다.
난 이 곡을 급격히 몰락하고 있는 민중운동, 이제가지 새벽이 해왔던 모든 시도들에 대한 새벽의 '애도'로 꼽는다. 물론 브레이트 시에 붙인 노래 '후손들에게'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스스로 해산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후손들이 없다.
nuovo라는 분이 bob.jinbo.net에 "윤선애씨 어디 계세요"라는 타이틀의 비라이센스(?) 음반을 올려 준 덕에 딱 10년만에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분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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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관한 명상" 중 '사랑'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둘이 되어
고단한 우리들의 앞날을 본다는 것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미래를 두 눈으로 바라볼 뿐
주인은 너희들(후손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더 나아가
눈물 흐린 시야를 보탤 줄 안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영원 불멸한 생애를 불태우고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그래 생애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눈물 혹은 기쁨일 뿐
일어서는 것은 오로지 세상 뿐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히 일어선다
비극의 의의는 어떤 혁명적 시도들의 실패의 장렬함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세대들이 유사한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전 실패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에의 보증을 이후 시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증가시킬 것을 촉구하는 데 있지도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비극의 의의는 혁명을 원하는 그 모든 동일자의 법칙(혹은 확신)은 예기치 못한 타자의 법칙(혹은 확신)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항상-아직 '유한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비극의 의의는 혁명적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빠져들 그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자가, 혁명의 주체가, 여전히 타자를 향해, 심지어 자신의 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내는 운동을 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비극을 실패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끝내 도래하여 그 모든 실패들을 '보상(redeem)'해줄 성공에의 촉구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결단론적인 비극 이해일 뿐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공유했던 이 위험한 코드를 반복하지 말 것.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정세'일 뿐이라는 점, 우리는 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세로서의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다수의 곤란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볼 것. 그리고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할 수 없는 다수의 목표들이 문제인만큼, 혁명은 여전히 어떤 '정치'가 가능해야할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 만일 혁명이라는 정세가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정세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것. 혁명 속에서 무엇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혁명 속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사고할 것.
"우리에겐 반역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인식하라!"
어제 장농이랑 냉장고를 함께 옮긴 사람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예고편을 보고서 이 영화 정말 봐야겠다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오동진의 극찬도 한몫 했다. 게다가 정성일 팬카페 사람들의 논쟁도 나를 자극했다. 어쨌든 영화를 봤다(이건 얼마만이더라?).
흔히 그의 영화를 '복수 3부작'의 맥락에 위치짓곤 한다. 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복수'가 중요한 소재인 건 분명하다. 어디선가 박찬욱은 그렇게 말했다(혹은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복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이므로 흥미로운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나 역시 이런 관점에 점점 더 이끌리고 있다.
복수가 언제부터 금기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다만 결정적 일보를 내딛은 것은 헤겔이라 들었다. 이른바 '인정투쟁'(특히 예나시기의 헤겔이라고 한다) 이란 복수라는 사적 정념을 정치라는 공적 실천으로 '지양'해 낸 것이다. 복수 대신 '재판'이란 개념이 들어오는데 이때 재판의 목적은 공동체의 복구다. 물론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식이 아니라 그에게 '시민권' 핵심적으로 ('변호'라는 형태로) '발언권'을 줘 재판이 기존 공동체를 '반성'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도록 재판 자체가 전환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나오는 헤겔의 놀라운 명제: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처벌을 의지해야 한다.' 이는 재판의 反-복수적, 민주적 개조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재판 더 넓게 말해 국가를 통한 공적 '인정'이 오작동하면, 적대나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복수는 항상-다시 되돌아온다. 좀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많은(아마 지금까지 모든) 국가들은 복수를 은밀히 조장해 왔다. 적대와 갈등을 중재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한 정당성의 침식을 이들의 사적 해결인 복수, 거기에 동반되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예방적 대항폭력'이라는 경찰적 정당성으로 보충해 왔기 때문이다. 국가의 타락은 개인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국가의 더한 타락으로 이어진다. 폭력의 악순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윤리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금기시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실재하는 상황/행위를 극(특히 비극)의 형태로 체험케 함으로써 갈등과 '책임'(respons(e)iblity)을 숙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이 이른바 '(재)주체화'의 특권적 계기
로 인정받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반민주적 결국 경찰적 국가(시민을 준-범죄자로 취급하는) 의 토대를 아주 근원적인 지점에서 해체할 수 있는 행위가 예술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복수 3부작'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계급적대가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상대방을 원수로, 자신을 보복자로 상상할 때 이 세상 위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실천을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를 하려는 모든 사람들 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노동자들에게, '나 너 착한 거 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된다... 부르주아들에게,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기 전에 뭔가를 해라...
'올드보이'에서 그려지는 것은 다른 식의 지옥이다. 그것은 푸코적인 의미에서 '지배'의 상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행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분석들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는 이를 지배(domination)의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 한 개인 혹은 한 사회적 그룹이 권력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그것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가역성(reversibility)을 피하는 데에 이를 때 (…) 우리는 지배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대면한다. 이러한 상태 안에서 자유의 실천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만 존재하거나 극단적으로 한정되고 제한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푸코,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中
알다시피 이우진은 오대수의 운명을 완전히 장악하여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저 끔찍한 바퀴로부터 빠져나오는 대가로 스스로의 파괴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지배'를 실행한다. '私刑'을 집행하는 감옥에서부터 정신을 장악하는 최면술, (최면술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차라리 지배의 어떤 극단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물론 그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에 이르는 저 까마득한 권력의 비대칭성의 지옥. 홉스가 말한 '베헤모스'(내전/자연상태)와 '리바이어던'(극단적 사회상태)은 둘다 지옥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리는 지옥은 어떤 것인가? 내가 인상적이었던 점은 행위자들('보복자들')의 위치가 극히 자의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전편에서 서로를 죽이고자 했던 류와 동진은 이제 사이좋게 유괴를 기도한다. 오대수의 최면술사는 그에게 식탁에서 개처럼 강간당한다. 이우진은 유괴/살해당한 원모의 자리에 가 있고 이금자는 백선생처럼 입이 틀어막힌다. 그녀의 방은 오대수가 갇혔던 감옥이 되고 그녀의 딸과 양부모는 독가스에 취한다. 한편 '통일의 꽃' 임수경은 장기수를 가둔 감옥의 간수가 되어 있고 '혁명운동'에 사용하려 했을 '법-구경' 총은 사적 복수의 도구가 되고,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물론 폐교의 '私刑'이 있다. 그것은 백선생에게 가장 잔혹한 복수이자
(자신에 대한 死刑/私刑 논의를 무력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다니!) 이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찬욱이 설치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의 복수연작 안에서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역할을 논다. 가장 잔혹한 폭력이자 절대악의 확실한 '폐제'이면서 보복자 자체의 해체의 시작이다. 적어도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원하는 효과를 거뒀느냐다. 여기서 박찬욱은 블랙코미디 기법을 전면화하면서 그의 말대로 하자면 '우습다라는 기조로 가다가도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으로 주저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웃은 게 조금 미안하게도 되는 그런 상태' 를 도모한다. 내가 볼 때 이는 통찰력있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는 잔혹이 反-희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점, 또한 거기에 모종의 '향락'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희극 자체를 분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웃는 자신 안의 잔혹과 관객을 대면시키면서 어떤 섬뜩함과 불편함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박찬욱은 세간의 평가보다 훨씬 순진하거나 아니면 희대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관객들이, 금자씨와 달리, 정말로 즐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위의 사실 곧 이 변증법적 전환의 실패를 뻔히 알고 있고 스스로 이 실패를 즐기면서도 정반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도리는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보다 훨씬 더 잔혹할지 모른다는 것, 잔혹한 '부정의 부정'을 경유해 구원으로 가는 숭고한 '부정신학'이 극히 도착적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복수는 나의 것'이 더 윤리적인 것 같다. 자신은 없지만 이 점에선 정성일 선생과 좀 의견이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난 두 가지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금자와 제니라는 '모녀' 관계가 성립됐다는 점. 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실패했고 '올드보이'에서는 양자 간의 책임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구성된 '부녀'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의 결론이 다르게 난 것은 그녀의 딸이 딸로서 살아있었고 엄마의 얘기를 (미도와 달리) 다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의 '혀'였다. 우리에게 혀와 입은 무엇일까. 낭시 식으로 말하자면 '노출'(ex-posure)이란 무엇일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친절한 금자씨 2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앞서의 글에서 인용했듯 박찬욱은, 특히 '사형' 장면에 관한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구조주의 이후 우리가 배운 것은 저자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저자조차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의 물질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박찬욱 스스로의 진술 인용으로 대체한 이 장면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이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우선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적어도 나에게는) 이 장면의 시작이 전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를 접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가 얼마 진행된 이후부터 난 백선생이 틀림없이 연쇄살인범일 거라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진 사정과 관련될 것이다. 아마 백선생이 금자의 아이를 데리고 살인현장에 나타난 그 끔찍한 장면에서부터 이는 거의 목적론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사형 장면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원-장면'(primal scene)이 된다. (박찬욱이 이 영화가 '동화'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동화는 '옛날옛적에'('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고 현존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런 금기 없이 향락을 즐기는 난폭한 아버지를 '폐제'하고 아들 간의 공모를 통해 금기/법, 따라서 '사회'를 정초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이 유족들의 잔혹(또한 우스꽝스러움)을, 혹은 그 장면을 보고 웃는 스스로의 잔혹을 느끼길 바랬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효과가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잔혹이 향락(과 그것의 전염)을 동반한다는 점을 박찬욱이 정말 몰랐을까? 더구나 절대악을 폐제하는 게 문제라면, 그 잔혹에는 모종의 정당화가 부여되지 않는가?
모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말했을 때 그는 적어도 이렇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며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순환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관찰자' 금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자는 어떤 의미에서 외부자/관찰자인가? 가장 모범적인 '리바이어던'으로서가 아닐까? 백선생을 죽인 후 누설을 걱정하는 유족들 앞에서 금자가 던진 협박을 생각해 보라. 감독의 의도야 어땠던 간에 바로 그 말 때문에 금자의 '유령성'은 '초-자아'의 그것으로 사후결정된다.
그녀는 '악/향락의 민주화'를 행했고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에 기반해 사회상태를 만들었으며 너무나 친절하게도 이 사회상태의 보증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녀가 이미 죽은 백선생에게 쏘아대는 총알은 실제로는 유족들에게 던지는 경고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와 놀라울 정도로 대칭적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이금자는 유족에게 '금기'를 범하게 했고 양편 모두에서 그/녀들의 상대방은 '혀'가 잘린다. 하지만 오대수는 무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자기 스스로 혀를 잘라낸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때문에 오대수는 영웅이 되고 이우진은 파멸한다. 하지만 유족은 (금자의 유혹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혀를 자르는 것은 금자(禁者!)다. 유족은 가련하고 추한 존재가 되며(계좌번호는 압권이다!) 금자는 '이드'의 사악함과 '자아'의 나약함 모두에 절망하는 '초-자아적' 영웅이 된다. 여기서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이 떠오르는 것은 나 뿐일까...?
그러므로 이금자는 성공한 이우진이다. 이때 자식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지난 번 글에서는 금자와 제니의 관계에 관해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를 남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전혀 아니다. 금자는 오대수가 아니라 이우진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지만 미도는 안티고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니는 초-자아적 영웅을 정당화해 주는 존재다. 먼 옛날 '조상'께서 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뇌를 겪었는지 대대손손 전해주는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나레이터'다. (따라서 이는 '낯설게 하기'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장면의 '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유족들의 혀는 잘리었고 이 히/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혀는 금자의 딸만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자가 처음부터 '친절한 금자씨'였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폭력과 잔혹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문제가 될 때 특히 오대수처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때 박찬욱의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홉스적인 것이었다. '공각기동대' 같은, 외양적으로는 '포스트모던'한 영화가 결국 로크적인 해결책('의식')으로 회귀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번 영화에서 박찬욱의 실패는 그가 너무 친절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이 제일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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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입 기능도 안쓰고 이런 긴 글을 싣는 만행을!!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