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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 토드브라우닝(Tod Browning) 감독의 「프릭스(Freaks) 」 류미례
다큐멘터리 제작 공동체 푸른영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장애·여성·가난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다. rmlist@hanmail.net |
시대를 앞섰거나 시대와의 불화 때문에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소위 ‘저주받은 걸작’들이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려는 토드 브라우닝(Tod Browning) 감독의 「프릭스(Freaks)」처럼.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일주일에 한 편씩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주로 상업영화들이었다)를 소개하기 위해 영화사를 훑다 발견한 영화이다. 「세기말의 ‘이상한’ 영화사상 베스트 일백 편」이라는 글을 쓴 김홍준 감독은 「프릭스」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 ![]()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포털 검색창에 ‘프릭스’라는 단어를 쳐보니 2002년에 개봉했던 거미영화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 거론하려는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다. 1932년에 만들어졌던 영화, 당시 극장에서 많은 관객들이 기절하여 실려 나갔던 영화,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30년 동안이나 상영이 금지되었던 수수께끼 같은 영화. 바로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프릭스」이다. ![]() ![]() ![]() 장애-퀴어 이론가 엘라이 클레어(Eli Clare)에 따르면 프릭으로 불리는 이들은 각각 다른 유형으로 프릭쇼의 배우로서 활동했다. 즉 ① 백인 장애인과 비백인 장애인 ② 미국으로 납치되었거나 노예로 팔려 온 비백인 비장애인 ③ 미국의 비백인 비장애인 ④ 시각 경험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차이가 있는 비장애인. 예를 들어 수염 난 여성, 뚱뚱한 여성, 매우 마른 남성, 인터섹스 등. 의 네 가지이다. 그들은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전시물이었다.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연구자이자 인권활동가인 루인은 이러한 프릭쇼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관객들이 자신과는 다른(달라도 너무 다른) 프릭들의 몸을 보며 자신은 규범적이라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관음증 의례는 지배 규범의 한계를 공유하고 은폐하는 ‘유희’였다.” ![]() 「프릭스」는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하여, 공중 그네를 타는 미녀 곡예사 클레오파트라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저신장장애인 한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 ![]() 무대에 선 프릭을 구경하며 놀라고 공포를 표현하는 걸 즐기던 비장애인 관객들은, 그러나 그렇게 볼거리로만 존재해야 했던 프릭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자 그 상황을 참아내지 못한다.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세간의 혹독한 악평을 받았고 영화관들이 줄줄이 상영을 중지하면서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구역질을 하며 극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비장애인 관객들이 속출하면서 결국 영화는 30년 동안 완벽하게 외면당했다. 샴쌍둥이, 저신장장애인, 상반신만 있는 남자, 두 팔이 없는 여자, 양성인간 등, 그저 쇼의 볼거리로만 인식되던 프릭들이 선명한 캐릭터로 등장해 완전히 새로운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을 비장애인관객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 ![]() ![]() 실제로 당대를 풍미했던 서커스 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프릭스」의 장애인들은 그동안 봐왔던 어느 영화들과도 다르다. 심각한 기형의 사생아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부모와 가족의 사랑은커녕 인간적인 대접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엘리펀트맨」의 주인공과도 다르고, 과학자 아버지의 실험에 의해 태어난 「프랑켄슈타인」과도 다르다. 「엘리펀트맨」에서 장애인은 서커스쇼의 볼거리가 되어 비장애인들에게 스스로를 ‘정상인’이라 여기며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 그런가하면 「프랑켄슈타인」의 장애인은 ‘정상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드러냄으로써 동정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 ![]() 반면 「프릭스」는 기존의 장애/비장애 구도를 완벽하게 뒤집는다.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는 금발에 멋진 미모, 괴력과 멋진 육체를 가졌지만 누구보다도 악마적이고 비열하다. 반면 장애인들은 약한 자를 돌보고 불의를 응징한다. 이 영화의 어디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나 호기심은 발견할 수 없다. 손이 없어 발로 식사하거나 다리가 없어 손으로 걷고 사지가 없어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모습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낯선 존재들에 대한 호감과 믿음이 생겨난다. 그들의 세계는 비애나 동정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들은 즐겁고 당당하며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자신들의 세계에 동참하라고 촉구한다. ![]() ![]() ![]() 저신장장애인 한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피로연 장면에서 이러한 입장은 명확히 드러난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동료 장애인들이 “We accept her. One of us(우리는 그녀를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커다란 술잔을 돌릴 때, 잔을 받아든 클레오파트라는 “이 더럽고 불쾌한 병신들”이라고 욕하며 자리를 뜬다. ![]() ![]() ![]() ![]()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큰애 하은이를 임신했을 때 산전검사에서 다운증후군일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두 번째 검사를 했을 때 확률은 더 높아졌다. 한 달을 울고 다니다가 나는 나의 내면에서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이런 소리에 깜짝 놀랐다. ![]() ‘내가 뭘 잘못했을까?’ ![]() 지적장애인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만든,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던, 그런 나의 내면에, 그 무의식에, 장애는 천형이라는 전통적 인식이 그토록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애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무의식을 장악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 장애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는 시선의 권력에도 깊이 새겨져 있다. ‘보는 자/보이는자’의 이분법에서 ‘보는 자’는 끊임없이 권력을 행사하며 ‘보이는 자’를 대상화한다. 그리고 그 눈은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다. 장애는, 낯선 몸은, 규범적 세계에 섞일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 ![]() ![]() 「프릭스」의 가치는 이러한 시선 권력을 깨뜨린다는 데에 있다. 「프릭스」에는 개별 주체들 간의 세세한 차이는 무화시킨 채 단지 프릭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단일 집단으로 인식하던 기존의 시선이 없다.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은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즉 보임으로써)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를 강조한다. ” 카자 실버만 식의 보기는 개체들이 각 각의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설파한다. 그리고 우리는 「프릭스」를 통해 그 현실태를 본다. 「프릭스」가 구축한 시공간의 구조에서 우리는 단지 90분만을 할애하고서도 시선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프릭‘들’이 아닌 각자의 이름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과 사연들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 토드 브라우닝 감독이 이와 같은 영화를 만든 것은 당시 유행에 따라 가출을 해서 서커스단 생활을 경험했던 유년기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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