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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88만원 세대에 대하여

 

 

 

 

우석훈.박권일. 2007, <88만원 세대>, 레디앙

 

 

 

무엇이 문제라고 단순히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문제인지 따져 보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와 관련해서는 항상 ‘같고도 다른’ 이들을 생각해야 하며, 문제를 풀어나갈 이들을 누구로 보는가와 관련해서 ‘따로 또 함께’ 할 이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바로 “88만원 세대론”인 듯하다. 사회적 양극화와 생존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취업의 증가라는 현실 속에서 “88만원 세대” 담론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이러한 담론을 수용하게 될 맥락을 고려해 보면 몇 가지 의문점들이 생긴다.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은 88만원 세대뿐인가?
 

내가 세대 담론에 강한 의심을 품는 이유는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고전적인 명제의 신봉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이에 따라 집단을 분류하여 하나의 사회적 주체로 호명하는 것은 대부분 그 집단에 의해 자체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지배적인 사회적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국사회에서 가깝게는 1990년대 초중반에 등장한 “신세대”, “X세대” 등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세대 담론은 1980년대의 사회적 격변의 시기 동안 저항의 주체였던 젊은이들을 소비의 주체로 설정하였고 실제로 순응하도록 만들었다.
 

그 밖에도 세대 담론은 특정한 사회적 집단을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특징을 지닌다. 서구의 “68세대”나 한국의 “386세대”가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세대 담론에는 일반적으로 특정 세대가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낸 주역이었다는 의미와 함께, 이들이 변절하였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먼저 “68혁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68세대가 1960년대 후반에 저항의 물결을 만들어 낸 대학생들을 주로 지칭하는 반면, 당시에 그런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 냈던 이들을 세계적 차원에서 돌이켜보면 베트남과 동유럽 같은 제3세계의 민중들이었음 또한 분명하다.
 

68세대는 다른 측면에서도 재조명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서구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과연 순응하고 변절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68세대 담론에서 유럽의 학생운동 세력들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흐름을 만들어 내며 사회적인 세력으로 응집된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특히 미국사회에서는 이들이 지배질서에 쉽게 포섭되고 순응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미국사회에서도 사실상 ‘변절자’들은 소수일 뿐이라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변화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지배질서 안에 들어가 그 안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이들은 쉽게 주목받을 수는 있어도 그 힘 또한 쉽게 잃고 만다. 반면, 68세대에 포함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다른 새로운 변화의 흐름의 밑거름을 만들고 있다.
 

한국의 386세대 역시 이와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386세대는 1980년대 학생운동의 주역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중에서도 제도정치권에 진입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68세대와 마찬가지로 386세대를 후자의 의미로만 지칭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68세대가 2차 대전 이후 서구사회의 ‘풍요 속의 빈곤’에 저항한 이들이었다면, 386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군부독재의 권위주의에 도전이라는 시대의 부름을 받은 이들이었다.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남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이라는 말에 대학생들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노동현장에 투신하고 사회운동에 헌신했고, 결국 1987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의 진전을 이뤄냈다. 1990년대 이후 386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힘을 등에 업고 제도권에 진입한 정치인들이며, 오늘날 민주개혁세력이라 자칭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386세대에 해당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별다른 민주개혁도 이뤄내지 못한 ‘민주개혁세력’과 거리가 먼 이들로서, 풀뿌리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68세대와 386세대의 사례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 주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훗날 우리가 ‘무슨무슨 세대’로 불릴 수 있다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저항적 움직임을 보여주었을 때에 그러할 것이다. 둘째, 변화를 가져왔던 세대들은 그 자신들에 고유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에 천착하였다. 요컨대 “88만원 세대” 담론이 오늘날 젊은 세대들을 순응이 아닌 비판과 저항의 주체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이 특정 세대에 고유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고민하는 것은 젊은 세대들의 문제는 물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 세대에 고유한 문제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할 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예컨대 “88만원 세대”라는 외부로부터 부과된 문제설정에 집착할 경우, 억압받고 배제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대부분 “기성세대”라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 특히 대학생들의 경우 세대라는 문제의식은 쉽사리 “몰락의 두려움”에 영합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보기에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는 절대적인 생존권의 문제라기보다는 특정한 구조 속에서의 문제이다. 즉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함을 은폐하면서 우리가 겪는 문제들을 어쩔 수 없는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회로부터 부과되는 경쟁의 강요보다는 경쟁의 내면화가 문제일 수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경쟁을 쉽게 내면화하고, 따라서 저항적 세대 담론조차도 왜곡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문제는 좀 더 장기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전통의 측면에서도 파악될 수 있다. 한 마디로 한국사회에는 집단적 자기존중의 전통이 취약하다. 이는 식민 지배와 미군정, 군부독재 등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자산과 지위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자기존중이 짓밟혀 왔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는 국가, 가족, 회사와 같은 허구적 동질성을 강요당해 왔고, 이러한 자기존중 전통의 부재는 자신을 존중하기보다는 “위만 바라보는” 부정적 전통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대 담론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개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라는 인식에는 “88만원 세대론”에 동의한다. 분명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는 적다.
 

한편, 88만원 세대론에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집단들 중 하나가  대학생들일 터인데,  최근 대학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다름’이 부각되면서 무언가 ‘함께’ 하기 어렵다는 지적들이 많다. 그런 지적들은 ‘개인화’를 문제의 원인으로 파악하는데, 나는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개인이 온전한 개인이지 못한 상황이 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함께’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거나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970-80년대에 한국사회의 변화의 원동력이 된 학생운동의 ‘함께’ 함의 힘은 시대가 대학생들 개인에게 부과한 고뇌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개인화되어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모두들 ‘함께’ 하고 싶어 하고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너무나도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을 갖추려는 노력보다는 ‘포기할 것은 포기하려는’ 노력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모든 면에서 주변 사람들과 맞춰 가려고 하면 내 중심을 잃게 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는 구심력이 아닐까? 오늘 우리들을 ‘무슨무슨 세대’로 부르는 논의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자기 자신을 찾아 나가며 함께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훗날 우리가 어떤 세대로든 기억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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