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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OneDay Hof & Solidarit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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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히드를 돕는가?

왜 자히드를 돕는가?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겨울의 끝 무렵까지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농성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1년이 넘는 투쟁을 해왔던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접었을 때 그들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지쳐버린 몸을 뉘일 방 한 칸도 없었고, 당장 생활을 이어나갈 돈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호의적인 조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빈털터리인 채 한국 사회 속으로 다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농성을 정리하려고 어수선하던 그때 자히드가 붙잡혀 강제출국 조치를 당했습니다. 자히드는 2003년 겨울 농성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명동성당 들머리를 지키고 있었던 노동자입니다. 자기 의지로 투쟁을 시작했고 자기 의지로 농성투쟁을 정리하고자 했지만, 그는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이주노동자 투쟁에 관심을 가졌던 한국 사람들-와 자히드의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히드는 곧 기억 속에서만 만나는 인물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사회 속에서 숨어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말합니다. 귀향은 서글프게도 우리 한국 사람이 전통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만하게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도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자히드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한국에서 불의에 맞서 투쟁했던 대가를 고향에서 치르는 중입니다. 한국에 돈벌러간 아들을 믿고 빚더미에 앉은 가족-당연하게도 자히드는 농성투쟁을 하는 동안 자기가 모았던 돈을 다 썼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임금상황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난 부채, 빚쟁이들의 협박, 곱지 않는 이웃의 시선들이 그를 옥죄고 있는 것입니다. ‘말해요, 찬드라’가 생각납니다. 찬드라는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오늘 자히드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아니면 저기 어디에선가 삶이 계속되듯이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도 계속 됩니다. 자히드는 여전히 투쟁 중입니다. 고통, 불안, 회한, 가난, 질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특히 자히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현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에서의 투쟁을 반성하고, 후회하고, 자아비판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가 자기기만, 자기부정의 혼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다시 자히드와 연결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자히드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조그만 힘이라도 보탤 생각입니다.



왜 ‘자히드’인가? 농성투쟁을 하다가 강제출국 당한 노동자가 자히드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으로는 그런 이주노동자 모두를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자히드를 지원하는 것이 귀향한 노동자와 연대하는 아주 작은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원하는 움직임이 한국사회에서 아주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히드와 같은 당면 문제를 ‘개인의 문제’나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공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히드가 당면한 문제가 정말 사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사적 영역에서 고통 받고, 그것과 분리된 공적인 다른 영역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운동을 하거나 투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외부에 있는 어떤 누군가의 초월적 지상 명령 때문에 우리가 투쟁을 한다고 상상하고 있는 겁니까? 고통은 사적이지 않을 뿐더러, 사적인 것과 무관한 공적 목적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회피하는 공적 목적이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사적인 것’이라 치부하고 밀쳐두었던 그 말을 끌어내고, 그 말을 듣는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보내며, 연대를 하는 모임이나 활동들이 더욱 다양해지고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귀향한 이주노동자와 연대하는 것도 그런 활동 중의 하나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말을 잃은 귀향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합시다.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모아 줍시다.



*** 자히드 돕기 모금은 '이주노동자 합법화 모임' 통장으로 해주세요
국민은행   843101-04-026848   임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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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자히드는...

자히드와 처음 만나게 된 때는 2000년 4월이었다. 마침 그날은 우리 형의 생일이었는데, 나는 지역의 친구들과 함께 모처럼의 성대한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장식물들로 무대를 꾸미는 것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 상당히 곤란해 하고 있던 중에, 한 낯선 사람이 오더니 순식간에 멋진 필체와 천 장식 등으로 무대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다부지고 자그마한 체구의 낯선 사람이 바로 자히드였다. 그는 무대를 마술처럼 멋들어지게 꾸미고 나서는 특유의 끼를 발휘하여 음주가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처음 자히드를 만날 당시, 그는 남양주의 어느 공장에 근무하며 거리상으로 좀 떨어져 있는 마석의 한 방글라데시 공동체의 일을 맡고 있었다. 곧 이어 그는 마석과 송우리에서 방글라데시 문화제, 축구, 크리켓 등의 스포츠 행사, 각종 친목회 등의 일들을 조직하며 열심히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나와 자히드가 일하고 있는 남양주 지역에는 마석과 송우리처럼 이주노동자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곧 우리는 방글라데시 협동회(Bangladesh Mutual Association)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주노동자 상담, 친목회, 야유회, 산재 이주노동자 후원 모금 콘서트 등을 만들어 나갔다. 공장에서 매일 야근을 하는 나날 속에서도 우리는 시간만 나면 함께 공동체 일에 매달렸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공동체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적으로는 매우 풍성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해 왔던 공동체 활동만으로는 일터에서 자행되는 각종 임금체불, 퇴직금 미지급, 공장에서의 폭력과 폭언, 산업재해 등 이러저러한 노동탄압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작업장에서의 노동탄압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민주노총 평등노조 산하에 이주지부가 생기게 되었고 자히드와 나는 2002년 봄부터 이주지부 친구들과 활동하게 되었다. 자히드는 곧 다니던 공장을 그만 두고 의정부, 송우리, 포천을 아우르는 이주노동자 공동체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이주지부가 주관하는 각종 집회와 행사에 동료들을 지속적으로 참여시키며 노조활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이렇게 공동체 운동과 노조운동 병행하는 동시에 그는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 파병 반대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자히드는 90여명의 이주노동자 동지들과 함께 2003년 11월 15일에 단속추방 반대, 산업연수제와 고용허가제 폐지, 노동허가제 도입을 주장하는 기나긴 명동성당 이주노동자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이들은 명동성당 들머리에 친 텐트 속에서 지내며 혹한의 겨울과 삼복의 더위를 이기고 380일 동안 농성했다. 자히드는 끝까지 농성장을 떠나지 않은 몇몇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농성 중에 그는 주로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는 투쟁국장이 역할을 맡았다. 동지들이 하나 둘 출입국에 잡히고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질 때마다 힘 있는 발언과 몸짓으로 동지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한편 그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들의 열악한 생활을 알면서도, 투쟁이 끝나서 일을 하게 되면 곧 돈을 보내드릴 수 있을 것이라며 어머니를 설득하곤 했다. 그러나 농성이 끝나갈 무렵 자히드는 출입국에 잡히게 되고 어머니에게 한 약속은 지키지 결국 지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고국의 돌아가게 된 그를 맞이한 것은 빚에 쪼들린 어머니와 아직 일할 나이가 되지 않은 남동생 한명,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 세 명뿐이었다. 열심히 투쟁한 결과로 더욱더 혹독한 시련을 맞이하게 된 꼴이었다.



물론 단속 추방된 동지는 자히드 하나만이 아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가 단속 추방될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직면해서 우리는 “추방된 사람들을 일일이 다 도와줄 수가 없다”는 식의 집단 논리로만 접근할 것인가?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그 희생에 보답하는 일이야 말로 진정 밑으로부터의 이주노동자 투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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