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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체트킨: 시민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서평을 읽으며

 

 

요즘 관심사가 '금욕적 혁명가관'과 여성주의에 대한 것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고민을 던져준 기사.

 

조직 내에 성에 대한 담론이 부재할 때 성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가부장적 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없다는 건 곧 억압적인 것이기 때문에. 금욕적 혁명가관은 우리 운동에서 성적담론을 '공식적인'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이 영역을 벗어난 억압이 억압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고민을 던져준 부분에 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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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녀에게 덧씌운 편견
  • 체트킨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여성문제에 관심 많았던 마르크스주의자일 뿐이다

    클라라 체트킨: 시민성과 마르크스주의
    Tania Puschnerat 지음|Klartext-Verlagsges|463쪽|29.90유로
  • 입력시간 : 2008.02.22 16:22 / 수정시간 : 2008.02.22 16:33

    • ▲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페미니스트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의 1924년 사진. 체트킨은 레닌의 친구이기도 했다.
    • 현실 사회주의는 거짓말을 많이 하는 체제였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한 체제가 그토록 오래 존속되었다는 사실이다. 당 주변의 관변 역사학자들이 이 '거짓말 공화국'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면, 역사학은 가장 큰 피해자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의 선구자들도 추악한 정치권력의 거짓말 공세를 비껴 갈 수는 없었다.

      당 노선의 역사적 정통성과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기에,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검열과 거짓말의 유혹은 오히려 더 컸다고 하겠다. 마르크스·엥겔스를 비롯해 로자 룩셈부르크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전집이 1990년대 들어 새로이 편찬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의 역사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계기로 르네상스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교육자였던 클라라 체트킨의 생애를 재조명한 이 책도 어느 면에서는 '붕괴'의 산물이다. 보쿰 대학에 제출한 독일의 '교수자격논문'이 바탕이 된 이 책이 기존의 체트킨 전기와 다른 점은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모스크바와 동독의 자료들을 섭렵했다는 점이다.

      자료들은 주로 당의 공식노선과 배치되는 로자 룩셈부르크주의나 평화주의적 경향을 띤 체트킨의 후기 저술들인데, 그것들은 당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자료보관소에서 세월의 비판을 외롭게 견디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소장 페미니스트 역사가가 발굴해 낸 이 자료들은 '내면적 망명'을 택했던 클라라 체트킨의 노년을 잘 드러내준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체트킨은 코민테른의 실력자이자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이단재판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밀려 자기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독일 공산당의 결의안에 스스로 찬성표를 던지고, 노년의 체트킨은 '내면적 망명'의 길을 택했다. 정치적 금치산자라는 선고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이 이상한 투표는 '자아비판'의 한 방식일 것이다.

      저자는 미처 지적하지 못하고 있지만, 체트킨의 이 '자아비판'은 단순히 스탈린주의의 이단재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고육지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하린의 재판에서 보듯이, 부당하기 짝이 없는 비판이지만 사회주의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불명예쯤은 던져버릴 수 있는 헌신적 사회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적 정치재판에서 흔히 보여준 태도이다.

      헌신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집단심성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주술성을 보여준다. 탈주술화하는 이성의 과학적 사고방식은 '과학주의'로 전화되면서, 다시 주술화된 신념체계로 탈바꿈한다. 물질과 기술의 진보,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비전, 그리고 그 반종교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스스로 종교적 신념체계를 지닌 '정치종교'가 된 것이다. '구원'이나 '계시'와 같은 종교적 메타포들이 체트킨의 저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도 정치종교가 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클라라 체트킨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사회주의에 입문하기 전 체트킨을 지배한 것은 루터교와 자유주의였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이후의 체트킨에게서 발견되는 정치적 순결주의는 사실상 루터교적 청교도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훗날 러시아 인민주의의 금욕적 순수주의가 결합되면서 체트킨의 정치적 순결주의는 더 강화되었다. 정치적 순결주의는 자신을 향할 때 혁명가적 금욕과 절제, 규율의 근원이 되지만, 타인을 향할 때 무서운 억압이 된다.

      순수하지 못하고 평범한, 때로는 더럽기까지 한 일상의 욕망을 가진 보통사람들에게 정치적 순결주의는 근본주의적 기준을 요구한다. 그것은 오를 수 없는 저편 사람들의 기준일 뿐이다. 특히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정통성이 결합될 때, 정치적 순결주의는 제어할 수 없는 '폭주 기관차'가 된다. 순수, 순결, 정신위생 등의 용어가 파시즘의 어휘라는 점을 기억하자.

      체트킨의 정치적 순결주의는 개인의 권위적 성격과 결합되어 독특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신비적 해석이 레닌의 권위주의적 전위조직론과 아무런 갈등 없이 체트킨 내부에 공존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대의를 저버리고 일상의 욕망에 굴복할 때, 그들은 정치적 순결주의의 융단폭격적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프롤레타리아 개개인의 사소한 욕망은 집단적 주체를 대변하는 당의 의지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노동자·농민의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농민을 위한 마르크스주의'로 바뀌는 것이다. 러시아 대중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에 혁명에 더 유리한 조건인데, 문맹자가 위에서 부과한 규율에 더 충성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군사적 규율을 강조하는 레닌주의자로서의 체트킨을 보여준다. 무엇이 노동자·농민을 위한 것인지는 과학적 사회주의와 강철같은 의지로 무장한 당이 결정하므로, 이들은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체트킨이 구성한 프롤레타리아적 여성성은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혁명에 복무하는 훌륭한 전사를 기르는 '프롤레타리아 모성'론에서 우생학, 사회적 위생, 사회적 다위니즘의 담론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체트킨의 페미니즘이 부르주아 페미니즘에서 출발했던 흔적들은 이처럼 체트킨의 저술 도처에서 발견된다. 

      노동이 자본으로부터 해방될 때에만 여성해방이 이루어진다는 체트킨의 여성해방론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젠더와 계급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기보다는 젠더가 계급에 종속된 환원론적 계급본질주의가 드러날 뿐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체트킨에게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어렵다. 여성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평가가 더 온당하겠다.

    코민테른에서는 자신의 논적이었던 벨라 쿤과 칼 라덱을 '투르케스탄'이라고 은밀히 지칭했다. 헝가리인과 유대인이었던 두 사람으로서는 펄쩍 뛸 일이겠지만, 정작 더 펄쩍 뛸 사람들은 이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일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타타르 마르크스주의'에서처럼 '붉은 오리엔탈리즘'의 냄새가 물씬 난다. 클라라 체트킨은 결국 20세기 전환기의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졌던 미덕과 악덕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여성이었다는 점 때문에 미덕과 악덕의 대차대조표가 표준적인 '유럽 남성 마르크스주의자'보다는 더 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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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론타이의 ‘날개달린 에로스’와 여성해방

    *지난 1월 노학연 정치학교 강좌를 위해 쓴 글.  

     

     

     

     

     

    콜론타이의 ‘날개달린 에로스’와 여성해방

     

     


    1.  콜론타이를 왜 그리고 어떻게


    나는 최근,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활동가들에게 ‘여성해방을 향해 투쟁하려면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하라!’고 말하는 활동가들과 조직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중 한 조직은 조직 내 여성활동가 대회에서 각자 자신이 조직한 훌륭한 운동에 대해 한 명씩 발표한다고 하고, 또 다른 어떤 조직은 3.8 여성의 날에 (투쟁의 성격과 관계없이) 신문 지면을 통해 ‘열심히 투쟁하는’ 여성을 활동가들의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노동해방연대]의 ‘독일사민당 속의 로자 룩셈부르크 : 진정한 여성해방의 길을 보여주다’1)라는 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여성활동가가 남성활동가 못지않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경우 여성들에 대한 편견을 벗어던질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여성이지만 탁월한 두뇌와 실천력을 보여준다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의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맑스만이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지도자도 있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만큼 여성들의 해방을 달성하는 데 가치 있는 사건은 없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러한 견해와 대비하여 재밌게 살펴볼만한 사실이 있다. 바로 같은 독일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인 클라라 체트킨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모두 뛰어난 혁명가로서 자존심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클라라 체트킨이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투신한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

    우리가 지금 ‘사회주의자’로서 ‘여성해방’에 대해 논할 때, 여성으로서 어려운 조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훌륭한 운동을 조직한 것에 주목해야 할까, 아니면 여성으로서 ‘사회적으로’ 처해 있는 조건을 변혁해내기 위한 투쟁을 조직한 것에 주목해야할까? 제노텔3)을 폐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러시아에서 여성을 가족에 계속 묶어두기 위해 노력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가부장적 성격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세력들이 바로 전자에 손을 들어줬다. 남성(혁명가)만큼 능력을 키워 여성의 권리를 찾자는 주장을 하기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를 내세우는 입장은 여성억압 해소를 개인의 능력과 의지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오히려 자유주의의 견해와 맞닿게 된다.4)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볼셰비키의 가부장성을 드러내면서 콜론타이에 주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5) 하지만 콜론타이의 구체적인 혁명운동 속에서 성의 관계에 관련한 사상이 어떤 이론적, 실천적 문제를 제기하는 지에 대해서는 풍부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사회주의 운동이 콜론타이의 사상 중 무엇을 쥐고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기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이 강좌를 개설한다는 소식에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한 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강좌’라며 강좌를 준비한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반기는 반면, 그 정반대에서는 ‘사회주의운동’과 ‘맑스주의이론’ 강좌들에 ‘껴있는’ ‘젊었을 때나 관심 있을’ ‘자유연애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당시 러시아에서는 콜론타이는 ‘도전적인 자유연애의 대변자’, 심하면 ‘방종한 성관계의 여왕’6)이라는 호칭이 붙여졌다시피 그의 연애사와 연애관에는 왜곡된 낙인이 찍혔고. 그의 업적과 사상은 가려졌다.7)

    실제로 성문제는 우리 조직과 운동 내에서 아주 자주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이에 대한 적절한 담론이 미리 형성되어 있지 않을 경우,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자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 많이 피를 보게 된다. 나는 한 편으로 우리 운동이 자주 직면하는 성문제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 나갈 때 콜론타이의 사상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러시아의 혁명적 시기에 등장한 사상으로서 ‘새로운 사회가 형성해야할 성의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콜론타이의 사상을 러시아의 혁명적 시기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이 가족형태, 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밝혀야 한다. 더 나아가 이는 그 이후 페미니즘8)의 성과로부터 어떻게 풍부하게 만들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으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이 글에서 이에 대한 풍부하고 나름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질문을 많은 동지들과 공유하는 것만으로 힘에 겹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강좌를 통해 많은 고민을 나눴으면 한다.


    2. 역사적 유물론과 성의 관계

    공산주의적 사회 질서는 가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답: 남녀 관계는 사회가 간섭할 필요가 없는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 즉 순전히 사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적 소유의 폐지와 자녀들의 공동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 결과, 사적 소유를 매개로 지금까지 결혼의 토대가 되어 왔던 두 가지, 즉 남편에 대한 아내의 종속과 부모에 대한 자녀의 종속이 없어진다. 이것이 공산주의적인 부인 공유제를 반대한다고 떠들어대는 고결한 속물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부인 공유제는 전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에 속하는 관계로서 오늘날 매음이라는 형태로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매음은 사적 소유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서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적 조직은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폐지할 것이다.

    -엥겔스, [공산주의의 원칙들]


    맑스와 엥겔스는 법, 예절, 도덕, 문화 따위와 마찬가지로 가족형태 또한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소유관계(계급관계)의 변화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된다고 말한다.9) 물론, 자본주의적 가족제도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뿐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바가 없다는 점에서 한계적이지만 맑스와 엥겔스가 가족형태에 대해서도 유물론적으로 파악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이후 인류학자들과 여성주의자들의 비판10)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유물론을 바탕으로 계급관계의 변화와 가족형태의 변화 사이의 연관관계를 이끌어 내려한 점에서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엥겔스는 일처일부제의 기원이 사유재산의 상속에 있다는 분석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족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로부터 엥겔스는 타락한 부르주아지 가족과 대비해 프롤레타리아트 가족 부부의 평등함을 강조하면서 경제적 관계가 아닌 성애(sex-love)를 바탕으로 한 평등한 가족이 등장할 것으로 보았다. 엥겔스는 성애가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라고 봤다. 따라서 자본주의 이후에 일처일부제가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사이에 평등한 관계가 올 것이라는 입장이다. 레닌은 훗날에 “엥겔스는 『가족의 기원』에서 공동적인 성관계가 개인적인 이성간의 사랑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더욱 순수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지적한 바 있습니다.”11)라고 말하는데, 이는 엥겔스가 1:1의 관계 자체를 인류사에 있어서 진보라고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것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다. 훗날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통해 국가의 역사적․계급적 성격을 밝히고 사회주의 혁명의 과정에서 국가의 문제를 다룬 것에 견주어, 콜론타이가 가족형태와 성의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라는 글을 통해 그는 친족 남성간의 유대를 강조함으로써 국가 방어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려한 고대, 중세 기사들의 ‘플라토닉 러브’와 그 이면에 존재한 강간․‘은밀한 관계’를 통해 봉건제를 강화한 중세, 육체적 사랑과 결혼을 합치하게 함으로써 연애를 탄생시킨 근대를 분석한다. 그렇다면 콜론타이는 이러한 역사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할 때 가족형태와 성의 관계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된다고 보았는가?

    러시아의 1918년 가족법은 당시 그리스정교의 영향 아래 일반화되어 있던 ‘죽을 때까지 깨지지 않는’ 결혼을 폐지하고 시민법에 의한 결혼을 제도화했다. 그 이전 해에 수립된 이혼법과 함께 이 법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 자본주의 국가들에 견주어봤을 때에도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조치였다.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노동의무제 하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확대되는 가운데 이혼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상황은 여성들의 사회적 권리를 현저히 확대했다. 하지만 이 법은 아버지가 자녀를 부양해야 한다는 점, 아이들을 부양하기위해 함께 어른과 아이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 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내전이 시작되면서 남성들은 전쟁터에 나가고 여성들은 노동의무제 아래 공장에 나가는 상황이 되자 가족은 사실상 해체되기 시작했다. 당시 볼셰비키의 대부분이 가족 역할이 유지되기를 바란 반면 콜론타이는 이 위기를 다른 방향으로 극복하자고 제기한다. 콜론타이는 혁명이 가족형태와 성의 관계의 변화를 담보해야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볼셰비키 내에서 강력하게 주장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운동의 강령적 요구로 가족형태의 문제를 다시 세워내자는 것이었다.

    물론 레닌을 비롯하여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볼셰비키들도 앞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과 함께 부르주아 가족제도가 파괴될 것이라고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제도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는 이들이 앞에서 언급한 엥겔스의 배타적 ‘성애’개념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관계가 유지될 것이라는(유지할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의 관계와 공동체를 배제하고 이성애 중심의 부부를 ‘정상’으로 두게 된다. 이로부터 젠더이데올로기가 강력한 사회에서 여성의 성역할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혁명을 지켜내면서 여성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언급한 레닌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드러난다.


    “우리 공산주의 여성들은 모든 분야에서 방법상 효과적으로 젊은이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성애의 연장이 될 것이며 그것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레닌에 대한 회고


    콜론타이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차이는,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전반적 노동의무제를 통한 경제적 독립이라는 여성해방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에서 더 나아가 심리적인 독립을 위한 가족의 해체와 자유로운 성의 관계를 제기했다는 측면에 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새로 등장할 관계가 어떤 것인가’이다.


    3. 콜론타이의 ‘날개달린 에로스’

      

    콜론타이는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가 그 사회에 부합하는 성의 관계를 조직한 것처럼, 공산주의사회에서는 노동자들 사이의 동지애에 기초한 관계는 집단의 유대를 강화할 프롤레타리아트의 도덕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도덕에 의해 공식화된 요구에 답하기 위해서 이러한 경험들이 세 가지의 주요 원리에 합치해야만 한다; 1. 관계에 있어서의 평등 (남성이기주의와 여성 개인에 대한 노예적 억압의 종식) 2. 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부르주아 문화에 의해 고무되는 소유 관념) 3. 동지적 감성,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능력 (부르주아 문화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날개달린 에로스”의 권리를 요구할 때, 동시에 노동 계급의 이상은 이러한 사랑을 집단에서의 사랑-의무라는 더욱 강력한 감정보다 중요시하지 않는다. 아무리 집단의 두 구성원간의 사랑이 위대할지라도, 두 개인을 집단에 결합시켜주는 유대가 항상 선행할 것이고, 더욱 강해지고, 더욱 복잡하고 유기적이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 도덕은 모든 이에게 사랑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 도덕은 모든 이에게 집단을 필요로 한다.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함께 심리적 독립을 이뤄낼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고, 이로부터 부르주아적 소유의식을 탈피한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는 콜론타이의 소설을 통해서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붉은 사랑」에서는 육아의 사회화가 이루어진 조건 아래에서 아이를 가진 주인공이 더 이상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지 않은 상황이 되자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장면을 그린다. 「삼대의 사랑」에서는 어머니의 연인과 섹스를 한 딸이 도덕적 잣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배타적인 사랑의 폐해를 비판한다. 이 두 주인공은 모두 콜론타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여성상이라고 볼 수 있다.

    “남편에게는 가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헤어졌어요.”  ……  “애를 가진 몸으로 혼자서 어디를 갈 겁니까?” “하지만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내일 직물공장으로 갑니다. 거기엔 직물 짜는 여자들로 이루어진 좋은 단체가 있어요. 우리는 모두 거기서 함께 일할 거예요. 탁아소를 조직할 거예요.” 그녀는 다른 여자들에게 공산주의 방식으로 애를 어떻게 키우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  ……  “조직이 길러줄 거야. 우리는 간호원을 편성할거야. 보육원도 세우고. 너도 애들을 좋아하잖아. 그렇게 되면 그 애는 우리들의 아기가 되는 거지. 누구나가 아이를 갖는 셈이지.”    

    -콜론타이, 「붉은 사랑」


    “…… 전 어머니가 불행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하지만 아무 것도 그녀에게서 안드레이의 감정을 빼앗아간 것이 없는데! 왜 그걸 어머니가 이해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안드레이는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고 그 누구와도 관계 못하게, 어머니에게 그렇게 꼭 묶어 둘 수는 없는 거예요.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안드레이와 친하고 말하자면 그가 어머니보다는 제게 훨씬 더 솔직하고 정신적으로 저와 더 가깝다는 것이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머니 말이 우리가 키스를 한 것은 제가 어머니한테서 안드레이를 ‘빼앗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드레이를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게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분명히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한다면 항상 함께 있고 싶을 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주고 그 사람 생각만 하고 그를 돌볼 테지요...... 하지만 누군가 제게 평생을 안드레이와 함께 있으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고맙다는 말뿐일 거에요.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우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좋은 동료에요.”

    ……

    “어머닌 제가 그 중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하시는 거에요. 제 나이에 사랑도 없이 몸을 허락하는 것은 비정상적이고 도의에 어긋난다는 거죠. 하지만 전 어머니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게 훨씬 더 간단하고,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어릴 때를 기억하면 그때 어머닌 콘스탄틴과 제 아버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얼마나 절망에 빠져 있었는지 몰라요. …… 그렇지만 어머닌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했지요. 둘 다 사랑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두 사람 다 어머니를 사랑했고요. 그래서 그들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 가슴을 쥐어뜯었지요. 그러다가 결국은 서로 증오하며 원수지간으로 끝나버렸고요. 전 그 누구와도 미워하며 헤어지진 않겠어요. 더 이상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별하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 제가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았음을 그들은 알아야만 해요.”

    -콜론타이, 「삼대의 사랑」


    그렇다면 무엇이 ‘날개 달린 에로스’이고, 무엇이 ‘날개 없는 에로스’일까? 콜론타이는 ‘날개 없는 에로스’의 대표적인 예로 성산업, 성폭력을 말한다.


    한 편으로 건강한 성적 본능은 자본주의의 기괴한 사회 및 경제적 관계에 의해 건강치 못한 음욕으로 왜곡되어버렸다. 성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폭음이나 폭식 등에 의해 돋구어지는 욕망이라든지 왜곡된 음욕과 같은, 즐거움을 얻은 방식처럼 말이다.

    ……

    남성은 비록 특정한 여성에 대하여 어떤 성적 욕망도 갖지 않더라도 그녀를 통해 그의 성적인 만족과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어떤 여성에게든지 접근한다. 매춘은 이렇게 왜곡된 성욕 충족의 조직화된 표현이다. 만약 여성과의 성교가 기대한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남성은 모든 종류의 타락으로 빠져든다.

    -콜론타이,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하지만 이처럼 콜론타이가 분명하게 제기하는 경우12)를 제외하고는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 특히 다음 인용한 부분과 「삼대의 사랑」을 비교할 때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양면성 즉 "날개달린 에로스"의 복잡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한 남자가 많은 여자와 혹은 한 여자가 많은 남자와 갖는 "에로스 없는" 성적 관계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 감정이 관여되지 않은 관계는 불운하고 해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공동체를 피폐화하는 문제. 성적인 문제 기타 등등)

    -콜론타이,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사랑은 우정, 정열, 모성적 따뜻함, 매혹, 모성적 포근함, 동정, 경애, 친밀함 그리고 다른 많은 감정의 면모들이 조합되어 얽혀있는 것이다. 감정이 관계한 범위가 넓어서 육체적 매력과 감정적 친밀함이 용해되어있는 속에서 본래의 “날개달린 에로스”와 “날개없는 에로스”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육체적 매력의 요소는 결여하고 있는 동지애적 사랑, 한 사람의 일에 대한 애정 혹은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사랑, 그리고 집단에 대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영성화된’ 그리고 그 생물적인 기초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도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콜론타이,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삼대의 사랑」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 감정이 관여되지 않은’이란 표현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지칭하는 것일까? 콜론타이 말한 ‘공동체를 피폐화하는 문제. 성적인 문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삼대의 사랑」에서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그려낸 반면,「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에서는 당내 보수적인, 가부장적인 다수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의식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날개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의 구분이 어려움은 콜론타이 자신도 토로하는 부분이다.

    다른 쟁점으로 넘어가자면, 나는 현재 콜론타이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한 가지 경향으로서 ‘프리섹스주의’ 혹은 ‘자유연애’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흔히 이를 옹호할 때 근거로 제시하는 사상이 콜론타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섹스를 무겁게 여기는 것, 배타적인 성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것이며, 또한 조직 내 활동가들 사이는 동지적 관계이니 콜론타이가 말하는 자유연애를 하자”는 주장은 현실에서 긍정적 측면과 위험한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콜론타이 자신의 언급(관계에 있어서의 평등, 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현실을 바라봤을 때에도 그 위험성은 감지할 수 있다. 좌파건 우파건 ‘동지적 관계’에서 여전히 성별위계는 존재하며, 수십 년간 형성되어온 남성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운동사회성폭력근절을 위한 100인위원회 활동을 통해 드러났다.13)

    또한 다양한 성의 관계가 확대되고, 이를 성에 대한 담론으로 확대한다면 여러 가지 성 지향에 대한 억압적 시선이 문제임을 드러내주는 계기가 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로 ‘감춰진다면’ 프리섹스주의는 오히려 폭력적, 위계적 관계를 드러내지 못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특히 이를 조직적인 원칙처럼 담론이 형성될 경우에는 스스로 충분히 고려할 여유의 폭이 좁아지면서 이후 이에 대해 성폭력적이라고 인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젠더이데올로기가 명확한 사회에서 프리섹스주의가 남성에게는 능력으로 여겨지는 반면, 여성들은 ‘헤프다’는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는 점은 이런 위험을 가중시키다. 이에 대해서는 조주은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프리섹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은 진정한 프리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섹스주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여전히 남성들의 욕망으로 치환되기 쉽다.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

    -조주은,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물론 자유연애는 현실의 일처일부제가 강제하는 위선적 관계를 지양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긍정성이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서 자유연애 혹은 프리섹스주의의 긍정적 측면만을 강조할 경우 문제가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콜론타이 스스로도 ‘행복한 시기’가 오기 까지는 수 세대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4) 자본주의가 이성애 남성을 중심으로 차이가 있는 것들에 대한 차별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한 이 사회에서 전면적으로 ‘행복한 시기’가 올 수 없을 것이다. 이를 극복한 사회에서, 어려서부터 질투와 경쟁심이 아닌 공동체 의식을 교육하고 이들이 자라나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확산될 때 진정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그동안 서로의 차이가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억압을 유지해 온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많은 역할을 해왔다.


    4. 레닌의 ‘금욕적 혁명가’관의 문제점


    이제 레닌의 입장을 살펴보자. 레닌이 콜론타이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며 비판한 것은 드물지만 그가 ‘물 한잔’이론이라고 낙인찍고 있는 부분에서 암시적으로 콜론타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적관계와 결혼의 영역에서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보조를 맞추면서 말입니다. …… 젊은이들에게 금욕적인 자기 부정이나 그 추잡한 부르조아 도덕을 설교하는 것보다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육체적으로 강하게 느껴지는 성문제가 이런 시기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토록 위세를 떨치는 일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혁명적이고 공산주의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나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까다로운 금욕주의자로 비칠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의 이 소위 새로운 성생활 - 그리고 성인들의 경우에도 빈번히 - 은 나에게 대개가 순전히 부르조아적이고 단지 과거의 그럴듯한 부르조아 갈보집을 확대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들의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식대로의 자유와 연애와는 어떤 공통점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젊은이들 중 어떤 사람 가운데 일부분은 이 물한잔의 이론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  나는 저 유명한 ‘물한잔의 이론’이 전혀 비마르크스주의적일뿐 아니라 게다가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고생각합니다. 성생활에서 작용하는 것은 자연이 부여한 것뿐만이 아니라 높은 수준이든 낮은 수준이든 문화이기도 합니다. 엥겔스는 『가족의 기원』에서 공동적인 성관계가 개인적인 이성간의 사랑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더욱 순수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지적한 바 있습니다.  ……  정상적인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궁창에 드러누워서 흙탕물을 마시려고 하겠습니까? 혹은 많은 사람들의 입술로 그 가장자리가 더럽혀진 유리잔으로?  ……  내 비판이 금욕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  공산주의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즐거움과 힘을 다른 무엇보다도 완전한 애정생활을 통해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과다한 성적 생활은 즐거움도 힘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 그들에게는 체조나 수영, 하이킹 같은 모든 종류의 신체단련, 그리고 다양한 지적 관심을 가지고 학습하고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을 가능한 한 공동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  나는 정치문제에 사랑을 개입시비고 있는 여성이나 여자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남성을 신뢰하거나 그들의 끈기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성생활의 방종은 부르조아적인 것이며 몰락하는 현상입니다.”

      -클라라 체트킨, 「레닌에 대한 회고」


    소련에서 성문제에 관련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잘킨드에 의하면, 실제로 레닌은 ‘성적팽창’은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며 ‘섹스의 마취를 종교의 아편에 일치한 현상’으로 바라보았다.15) 길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이 인용문을 볼 때 레닌이 사실상 금욕주의자(과다한 성적생활에 대한 경계, 그런데 과다한 게 대체 뭘까?), 순결주의자(시궁창, 더렵혀진 유리잔 비유)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레닌은 아직 ‘사랑의 성(性이 아닌 聖)스러움’을 옹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닌이 크룹스카야와 부부관계였고 이네사 아르망과 연인관계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이를 ‘개인의 성향’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16) 이러한 금욕주의, 순결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성적보수주의와 가깝고, 따라서 젠더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의 성욕에 낙인을 찍고, 다양한 성생활․성적 지향을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레닌의 이러한 입장은 잘킨드에 의해 ‘혁명적 승화론’으로 정립된다. 이는 레닌의 “우리는 우리의 도덕성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사실들 및 필요성으로부터 우리의 도덕성을 연역하고 있다.”는 언급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성생활을 규제해야할 필요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넘쳐나는 에너지를 딴 데 쓰지 말고 투쟁에 집중하고,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스포츠나 문화를 즐기라는 주장을 정교화한 것이다.17) 이는 스탈린 시대에  ‘금욕적 영웅주의’로 등장했다. 이는 스탈린이 여성의 성역할을 강조하는 가족강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펴 나간 것과 관련이 깊다.

    ‘연애는 나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성적인 담론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남성활동가들의’ 성적 보수주의는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태도가 ‘활동가로서 완벽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와 맞물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레닌이 강조하고 이를 스탈린이 소련사회의 가부장적 성격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이 ‘금욕적 활동가’론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가식적이라서 문제라기보다, 성폭력을 비롯한 성적인 문제에 대한 담론을 원천 봉쇄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문제다.


    5. 나가며


    콜론타이가 혁명기에 여성해방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 것에 대한 당시 볼셰비키 내부에서 드러난 차이에 대한 평가와 이 논의로부터 현재 제기되는 자유연애의 긍정성과 위험성, 성적보수주의가 문제가 되는 경우까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여러 주제를 두서없이 다뤘다. 여성해방을 향한 사회주의자의 강령으로서 무엇을 정립해야 하는지의 문제에서부터 현재 우리 운동에서 제기되는 성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까지 가볍게 다뤄야할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문제에 대해 고민할 때 기본적으로 취해야하는 태도에 대해 귀감이 될 만한 콜론타이의 글을 인용하면서 마치려고 한다.   


    “사랑”에는 다양한 측면과 양상이 있다. 시대를 거쳐 발전되어 오고 동시대인들에 의해 경험되고 있는, 감정의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측면들이 그러한 일반적이고 부정확한 용어에 의해 은폐될 수는 없다.

    -콜론타이,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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