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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체트킨: 시민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서평을 읽으며

 

 

요즘 관심사가 '금욕적 혁명가관'과 여성주의에 대한 것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고민을 던져준 기사.

 

조직 내에 성에 대한 담론이 부재할 때 성에 대한 인식은 철저히 가부장적 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없다는 건 곧 억압적인 것이기 때문에. 금욕적 혁명가관은 우리 운동에서 성적담론을 '공식적인'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이 영역을 벗어난 억압이 억압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고민을 던져준 부분에 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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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녀에게 덧씌운 편견
  • 체트킨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여성문제에 관심 많았던 마르크스주의자일 뿐이다

    클라라 체트킨: 시민성과 마르크스주의
    Tania Puschnerat 지음|Klartext-Verlagsges|463쪽|29.90유로
  • 입력시간 : 2008.02.22 16:22 / 수정시간 : 2008.02.22 16:33

    • ▲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페미니스트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의 1924년 사진. 체트킨은 레닌의 친구이기도 했다.
    • 현실 사회주의는 거짓말을 많이 하는 체제였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한 체제가 그토록 오래 존속되었다는 사실이다. 당 주변의 관변 역사학자들이 이 '거짓말 공화국'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면, 역사학은 가장 큰 피해자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의 선구자들도 추악한 정치권력의 거짓말 공세를 비껴 갈 수는 없었다.

      당 노선의 역사적 정통성과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기에,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검열과 거짓말의 유혹은 오히려 더 컸다고 하겠다. 마르크스·엥겔스를 비롯해 로자 룩셈부르크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전집이 1990년대 들어 새로이 편찬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의 역사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계기로 르네상스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교육자였던 클라라 체트킨의 생애를 재조명한 이 책도 어느 면에서는 '붕괴'의 산물이다. 보쿰 대학에 제출한 독일의 '교수자격논문'이 바탕이 된 이 책이 기존의 체트킨 전기와 다른 점은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모스크바와 동독의 자료들을 섭렵했다는 점이다.

      자료들은 주로 당의 공식노선과 배치되는 로자 룩셈부르크주의나 평화주의적 경향을 띤 체트킨의 후기 저술들인데, 그것들은 당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자료보관소에서 세월의 비판을 외롭게 견디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소장 페미니스트 역사가가 발굴해 낸 이 자료들은 '내면적 망명'을 택했던 클라라 체트킨의 노년을 잘 드러내준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체트킨은 코민테른의 실력자이자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이단재판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밀려 자기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독일 공산당의 결의안에 스스로 찬성표를 던지고, 노년의 체트킨은 '내면적 망명'의 길을 택했다. 정치적 금치산자라는 선고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이 이상한 투표는 '자아비판'의 한 방식일 것이다.

      저자는 미처 지적하지 못하고 있지만, 체트킨의 이 '자아비판'은 단순히 스탈린주의의 이단재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고육지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하린의 재판에서 보듯이, 부당하기 짝이 없는 비판이지만 사회주의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불명예쯤은 던져버릴 수 있는 헌신적 사회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적 정치재판에서 흔히 보여준 태도이다.

      헌신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집단심성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주술성을 보여준다. 탈주술화하는 이성의 과학적 사고방식은 '과학주의'로 전화되면서, 다시 주술화된 신념체계로 탈바꿈한다. 물질과 기술의 진보,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비전, 그리고 그 반종교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스스로 종교적 신념체계를 지닌 '정치종교'가 된 것이다. '구원'이나 '계시'와 같은 종교적 메타포들이 체트킨의 저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도 정치종교가 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클라라 체트킨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사회주의에 입문하기 전 체트킨을 지배한 것은 루터교와 자유주의였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이후의 체트킨에게서 발견되는 정치적 순결주의는 사실상 루터교적 청교도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훗날 러시아 인민주의의 금욕적 순수주의가 결합되면서 체트킨의 정치적 순결주의는 더 강화되었다. 정치적 순결주의는 자신을 향할 때 혁명가적 금욕과 절제, 규율의 근원이 되지만, 타인을 향할 때 무서운 억압이 된다.

      순수하지 못하고 평범한, 때로는 더럽기까지 한 일상의 욕망을 가진 보통사람들에게 정치적 순결주의는 근본주의적 기준을 요구한다. 그것은 오를 수 없는 저편 사람들의 기준일 뿐이다. 특히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정통성이 결합될 때, 정치적 순결주의는 제어할 수 없는 '폭주 기관차'가 된다. 순수, 순결, 정신위생 등의 용어가 파시즘의 어휘라는 점을 기억하자.

      체트킨의 정치적 순결주의는 개인의 권위적 성격과 결합되어 독특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신비적 해석이 레닌의 권위주의적 전위조직론과 아무런 갈등 없이 체트킨 내부에 공존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대의를 저버리고 일상의 욕망에 굴복할 때, 그들은 정치적 순결주의의 융단폭격적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프롤레타리아 개개인의 사소한 욕망은 집단적 주체를 대변하는 당의 의지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노동자·농민의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농민을 위한 마르크스주의'로 바뀌는 것이다. 러시아 대중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에 혁명에 더 유리한 조건인데, 문맹자가 위에서 부과한 규율에 더 충성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군사적 규율을 강조하는 레닌주의자로서의 체트킨을 보여준다. 무엇이 노동자·농민을 위한 것인지는 과학적 사회주의와 강철같은 의지로 무장한 당이 결정하므로, 이들은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체트킨이 구성한 프롤레타리아적 여성성은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혁명에 복무하는 훌륭한 전사를 기르는 '프롤레타리아 모성'론에서 우생학, 사회적 위생, 사회적 다위니즘의 담론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체트킨의 페미니즘이 부르주아 페미니즘에서 출발했던 흔적들은 이처럼 체트킨의 저술 도처에서 발견된다. 

      노동이 자본으로부터 해방될 때에만 여성해방이 이루어진다는 체트킨의 여성해방론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젠더와 계급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기보다는 젠더가 계급에 종속된 환원론적 계급본질주의가 드러날 뿐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체트킨에게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어렵다. 여성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평가가 더 온당하겠다.

    코민테른에서는 자신의 논적이었던 벨라 쿤과 칼 라덱을 '투르케스탄'이라고 은밀히 지칭했다. 헝가리인과 유대인이었던 두 사람으로서는 펄쩍 뛸 일이겠지만, 정작 더 펄쩍 뛸 사람들은 이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일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타타르 마르크스주의'에서처럼 '붉은 오리엔탈리즘'의 냄새가 물씬 난다. 클라라 체트킨은 결국 20세기 전환기의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졌던 미덕과 악덕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여성이었다는 점 때문에 미덕과 악덕의 대차대조표가 표준적인 '유럽 남성 마르크스주의자'보다는 더 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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