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운동을 재는 척도에 붙인 이름이다.
운동의 전과 후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오직 유용성 때문이다.
오늘과 어제를 구분하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을 구분하고 유년기와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구분한다. 피부의 노화와 신체 장기의 퇴화를 시간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사실 물질 명사가 아닌데도 물질 명사처럼 실제 존재하는 어떤 사물처럼 생각한다. 마치 창 밖에 있는 저 나무 의자처럼 있다고 말한다.
"어디 한 번 보세."
안 보여.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 머리 속에 존재하는 관념이다.
근대 과학은 13세기 공공 건물에(당시 교회 건물의 전면) 등장한 해시계를 기점으로 성립했다. 시계의 등장은 시간을 머리 속에서 끄집어냈다. 산업혁명은 시간을 하루 단위에서 점점 세분해 한 시간, 삼십 분 단위로 구분했다.
근대 과학이 공간을 중심으로 사물의 운동을 탐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물의 운동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운동은 공간에서의 위치 이동, 이동 운동으로 정의된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 과학은 모두 공간에서의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시간은 어떻게 등장했을까?
근대 과학에 시간이 등장하면서 근대 과학은 현대 과학으로 전환된다.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과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과학은 물리적인 대상에 대한 탐구에서 관념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21세기에도 과학자들은 이 관념의 영역을 물리적 실체로 구현하기 위해 애쓴 나머지 스스로 물리적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뒤섞어 버렸다. 어떤 물리학자의 말처럼 과학은 마음과 통합되었다.
이런 걸 보면 현대 과학자들은 헤겔주의자들이다.
헤겔은 주체 밖의 물리 세계가 궁극적으로 정신의 운동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름 위대한 절대정신. 물리 세계는 절대정신의 자기 운동의 결과다.
만세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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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3 16:01 2023/08/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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