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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몇 주 전에, 로스엔젤레스를 다녀와서 느꼈던 약간은 불편했던 마음의 정체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다 보니, 그 중 한가지가 대도시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커다란 도시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옆에 있지만, 그래도 곳곳에 공원과 커다란 나무가 울창한 이 조그만 소도시의 한적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번잡하고 혼탁한 공기를 가진 로스엔젤레스의 분위기가  치안에 대한 개인적인 불안함을 더욱 더 가중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건 아마 익숙함의 문제겠지요.

 

10여년전 서울에 처음 왔을때 느꼈던 그런 생경스러움도 얼추 10년 넘게 살다보니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예전 생각을 하게 되니, 학부때 학교앞을 벗어나 조금 걸어가서 만나게 되는 유흥가에 점점이 박혀 있던 작은 서점들이 생각납니다. 주말 오후 나른한 시간이 되면, 난생 처음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던 어리숙한 학부생이 별로 갈 곳이 없죠. 그러면, 괜히 학교에서 궁싯거리다 오늘은 무슨 껀수가 없을까 싶어서 서점 근처의 메모판을 찾아 천천히 내려가곤 했습니다.  오후 3-4시경, 처음 서점에 앉아서, 새로 나온 소설책을 뒤적뒤적 거리다, 엉덩이가 아플만하면, 짐짓 무슨 볼일이 있는 것처럼 그 서점을 나서서, 조금 아래로 더 내려가서 다른 서점으로, 그리고 또 다른 서점으로. 조금 예전에 나온 책 중에 재미있는 내용을 읽게 되면, 근처 작은 헌책방에 가서 그 책이 있는가 한 번 확인한 후 없으면 다시 돌아와 책한권 사는 것이 커다란 재미였습니다. 물론, 시위가 없는 주말에 저처럼 이렇게 저렇게 돌아다니던 친구나 선배들을 만나면, 근처에서 소주한잔도 빠질 수 없는 과정 중에 하나이기도 했지요. 근데, 얼마가지 않아서 한 서점이 없어지고, 그리고 또 몇년 있다가 한 서점이 없어져, 이제 지금 그 도로 변에는 이제 작은 서점은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헌책방이 두개나 생겨서 작년 겨울에 잠시 찾아갔을 때 바삐 세군데 서점을 순례하면서, 예전에 느꼈던 그 즐거운 느낌을 가져보려고 했었습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큰 대학이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변 상가에도 이곳저곳 서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혼자서 미국에 온 어리버리한 아저씨는 주말에 갈 곳이 별로 없기에, 또 서점 순례를 한답니다. 5분 정도 옆길로 새서 이 작은 도시의 중심가쪽으로 가면 미국에서 유명한 Barns & Nobles 란 대형 서점 체인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그랬듯이, 그런 큰 서점에서는 골목길 작은 서점에서 느낄 수 있는, 뭐랄까, 주변에서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숨소리, 낡은 책들에서 나는 냄새들.. 그런 것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학교 문을 나서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 있습니다. Cody's Book 이란 서점인데,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일층은 새책, 이층은 중고책을 팝니다. 특히, 소설이 굉장히 많아서, 특별히 무엇인가 사려고 들어가지 않는 한 굉장히 오랬동안 책구경을 하게 된답니다. 이곳에서 돈계산 하는 흑인 아저씨가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를 너무 닮아서, 처음에 깜짝 놀라기도 했구요. 1956년에 코디 형제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아주 유명한 서점이라 유명한 책 저자들의 사인회도 합니다. 최근에 [황제의 새로운 마음]을 썼던 유명한 영국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의 새 책 사인회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놓쳤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Moe's Book 이란 곳이 나옵니다. 이곳은 언제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작은 서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답니다. 그런데, 4층으로 나눠져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고 특히 지하로 내려가면 SF 중고책을 어마어마하게 진열해 놓고 있어서 무척이나 즐거운 책 구경을 할 수 있답니다. 규모가 커서, 신기한 책들(음악, 미술, 영화와 관련해서 사진이 많고 커다란)이 많아, 한장씩 넘겨가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 서점 맞은 편 모퉁이를 보면, Shakespeare & Co 라는 중고책 전문 서점이 있습니다. 이곳은 진짜 중고책 전문서점이라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중고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끔씩 이곳에서 원하던 소설책을 4분의 1가격으로 사는 횡재를 하곤했답니다. 그런데, 서점의 이름처럼 한쪽 구석은 완전히 셰익스피어에 관련된 책들만 모아 놨더라구요. S. J. Gould의 책들도 거의 모두 구비가 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사회과학 책도 굉장히 많이 팔고 있어서(거의 모든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 촘스키 콜렉션등등) 이 책동굴에 들어가면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나오게 된답니다.

 

조금 더 집쪽으로 걸어내려가다 보면 구석 외진 곳에 BookZoo라는 중고책방이 있습니다. 이곳은 가로세로 4미터 정도 되는 아주아주 작은 가게에 두꺼운 안경을 낀 청년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곳입니다. 아주 멋진 전위적인 pop과 jazz 음악이 흐르고, 이상하지만 뭔가 있는 Herb향을 맡으며, 노란 조명아래 사다리를 받치고 꼭대기에 있는 책들을 구경하다보면 꼭 책 한권을 사서 나오게 됩니다. 그럼 Book Zoo라는 도장이 찍힌 1달러짜리로 거스름돈을 줍니다. 그 도장찍힌 돈은 가게앞에 진열된 책을 살때 2달러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가게를 보통 아침 10시에 열고 저녁 10시에 닫는데 중간에 SIESTA(낮잠시간)가 있다고 하는데, 이 서점은 낮에 가본 적은 없어서, 진짜 문닫고 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네군데 서점은 한 길따라 죽 이어져 가면서 있어서, 꼭 한 곳을 들리게 되면 연달아 들어가게 된답니다. 조금 옆쪽으로 빠지면 까페와 함께 있는 클래식음악과 관련서적을 파는 서점과 또 다른 중고서점 두군데가 있는데, 그곳은 잘 발길이 닫지 않더라구요.

 

결국 엊그제도 저녁밥도 거르고 서점들을 돌고 돌아 책을 두권사왔습니다. 모두 중고로 싸게 사서 기분도 무척이나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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