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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앉았다.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려두고 가만히 손가락의 느낌을 기다렸다. 손끝, 지문돌기의 아래에서 하얀 건반이 따뜻해지고 있다. 모든 물질은 자체의 파장을 갖는다고 그애가 말했었지. 소리를 내고 싶은 것은 건반일까, 손가락일까, 아니면 우리 둘의 파장이 일치해서 일어나는 신기인걸까. 진은 소리없이 건반을 반쯤 눌렀다.

 

" 사계, 어때? 봄, 여름, 가을, 겨울... "

 

진은 피아노 앞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애는 창 앞으로 가져다놓은 의자 위에서 무릎을 감싸안은 채 앉아 있었다.  짧아진 해 어스름이 창턱에서 그애의 옆얼굴을 지나 한쪽 어깨를 감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여름, 여름이 좋아. "

 

그애가 말했고 진이 손을 움직였다. 아버지가 본가에서부터 가져온 피아노였지만 우아한 검정빛을 조금도 잃지 않고 민감하게 공명해주고 있었다. 그애는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여름은 어둡고 불안하면서도 끈기있게 진을 끌고 갔다. 소리는 말처럼 뜻처럼 영혼을 가진 것처럼 방 안에 가득찼고 창문을 넘어갔으며 긴 계단을 지나 플라타너스 낙엽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그애를 찾아갔다. 파장이 맞으면 반응하는 전기석처럼 그애는 귀를 기울이고 걸음을 빨리 했다. 연습실 앞에까지 온 그애는 소리없이 문을 밀고 한발 두발, 그리고 멈춰선 채 피아노치는 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깨, 춤추듯 너울대는 팔꿈치와 길고 긴 손가락. 그애는 벽 앞에서 무릎을 구부려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가을의 짧아진 해가 이울고 장막처럼 노을이 연습실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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