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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만난 친구, ms-1

1. 그녀에 대한 첫 기억

 

   스물 한 두살 무렵이었나.

   그녀에 대해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을 때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할때부터 1학년 내내 그녀는

   나와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새침떼기같은 말투, 중가 이상의 브랜드를 입는 사람, 도서관에서 살고

   학과 모임에 잘 결합하지 않는 사람 ...

   그 시절 내가 다니던 학과는 데모과였다.

   그런 과모임에 잘 안나온다는 건, 데모도 잘 안한다는 거였으므로

   나와는 여러모로, 친해지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어울리는 친구도 달랐다.

   내가,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당구나 치고, 술이나 마시는

  꼴통들과 어울려 다녔다면, 그녀는 깔끔한 도서관학파들과 어우렸으니까..

  그런데, 어떤 계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와 이야기란 걸 하기 시작했고,

  (아마, 사회조사 아르바이트 때문이리라)

  그녀의 집에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은 철거가 결정되어있는 동네에 있었다.

  그녀의 엄마는 암에 걸려 바싹 마른 채로, 앓고 계셨고

  그녀의 할머니는 노환중이었고,

  그녀의 어머니가 그 수발을 다 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술을 낙으로 삼아 아픈 아내와 노모를 바라보고 있는

  오랫동안 무능함이 습관되어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고등학교때 암선고를 받으시고

  몇년째 투병하면서, 어머니가 꾸려오시던 가계는 더욱 어려워졌다고...

 

  그녀의 이미지는 중산층딸이었는데,

  그녀의 현실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에너지가 만빵이었다.

  투병중인 엄마에게 고모란 사람들이 자기 엄마를 잘 모시지 않는다고

  타박을 주는 날이면, 그녀는 당장, 고모들에게도 욕을 한다고 한다.

  아무말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그녀는 당당하게 고모들에게 맞서서

  엄마를 지키고, 고모들은 당신들의 부당한 언사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고 한다.

  고모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하는 그녀였다.

  엄마는 부드러우면서도 그녀를 살게 하는 가장 큰 힘을 가진 분이었다.

  그녀는 엄마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볶음밥을 잘 만들었고, 나는 그녀에게서 배운 볶음밥을 아직도 써먹는다.

  그리고, 그 나이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탕수육 요리도 척척 순식간에 해냈다.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한 후 그녀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그토록 만나질 수 없을 것 같은 태생적인 거리감이

  깡그리 사라지는 묘한 경험을 했다.

 

 이후, 2학년 때부턴가 그녀는

 얼렁뚱당 데모로 질서없는 생활에 허덕이는  내 손을 잡아끌어

 도서관에 데리고 다녔다.

 수업마치고 빈둥댈 틈없이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데리고 다니며

 도서관 주변의 일상을 내게 처음으로 알게 해주었다.

 (나는 그 때 이후로 도서관에 다니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그 학기에 학과 차석의 영광을 차지 했으며, 장학금이란 걸 받아

  부모에게서 받던 은밀한 질책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도 87년을 그냥 경과하지 못했고

  자신의 삶의 조건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데모질도 함께 했다.

  우리는 학과 여학생들끼리의 소통에도 함께 참가하곤 했다.

 

  이후, 그녀가 휴학을 하고, 나는 데모질을 하느라 바빠지면서

  서로 일상으로 붙어다니지는 못했지만

  가끔씩이라도 집으로 찾아가고 만나는 친구였다.

 

  그 뒤에도...

  존재하지도 않는 경계를 의식하여

  소통의 대상으로 삼지 않다가

  우연챦게 뚫어진 소통의 소중함을 절감케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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