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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리뷰] 달리는 아비는 멈추지 않는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달리는 아비는 멈추지 않는다. 

                                                                                                                     김봉재

김애란의 단편소설 ‘달려라, 아비’는 엄마와 단둘이 사는 사생아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작품의 소재가 주는 동정이나 연민의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채, 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작가관찰자 시점과 같은 대등한 시각으로,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그와 주변 인물들에 대한 변호나 사회적 요인들을 배제 시키는 대신, 각 등장인물들에 대한 존경(주인공을 자신을 포함한 respect!)을 통해 통속적 이야기들이 간과했던 매력을 찾아냈다. 예를 들면 어머니를 홀대하던 외할아버지가 임종을 직전 “그래도 내가 연애를 하면 작은 년이랑 하지, 큰 년이랑은 안한다.” 의 대사는 세대를 뛰어 넘는 주인공과 할아버지의 공감대인 동시에 독자들이 가진 두터운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사실은 큰 년 보다 니 어미를 더 사랑했다.” 따위의 값싼 감상에서 벗어나, 다분히 성적이고 직감적인 지문을 통해 사생아를 낳은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각을 오랜 삶을 살아온 한 남성의 시각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정숙치 못한 여자’가 아닌, 세대를 뛰어 넘어 ‘매력이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아버지의 경우도 “아버지를 보고 놀란 개가 짖자 온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기 시작했다.”는 지문에서 보듯이 혼전섹스나 동거 등이 주는 진부한 이미지를 벗고, 피임약을 사기위해 달리는 아버지를 ‘발정난 개’의 이미지와 코믹하게 연관시킴으로써 젊은 남녀의 섹스에 대한 도덕적 잣대를 보류시킨다. 따라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주인공은 ‘엄마’의 매력을 알아본 사람들로서 서로 깊은 원한을 맺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 어머니의 매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은 택시를 모는 엄마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보다 더 빨리 달리고 싶어서’라고 생각하며 여자 택시기사로 혹사당하는 엄마에게 돈을 탄다. 서울에서 여자택시기사가 당하는 수모는 마치 사생아를 낳은 여인이 당하는 수모와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엄마의 거친 언어와, 운동화를 구겨 신고 돈을 타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녀가정의 불우한 모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그들의 일상은 크게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간단한 서술로 단순화 시켰을 뿐 아니라 “새끼가 속도 깊고 예의까지 발라버리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만 같아서였다.”는 지문처럼 나름의 변호를 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회와 소통하는 ‘일상의 삶’이 아니라 ‘집안’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자 택시기사가 당하는 수모와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들의 일상의 삶(독자인 우리가 바라보는)은 사실 그들 자신이 느끼기에는 결국 남들과 다름없는 삶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미국에서 가정까지 꾸리고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접하면 서도 엉뚱하게 그가 잔디기계를 타고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궁금해 한다. 주인공이, 마치 천벌을 받은 것처럼 버림받고 죽은 그를 낭만적 인간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분명 어머니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간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 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주인공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거친 삶을 사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의미의 에너지라기보다, 삶에 대한 오기나 집착의 이유이며 자신의 존재 이유가 단순히 엄마의 ‘매력’ 때문이라는 가증스러운 사실에 대한 분노이기도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잘 썩고 있을까?’라는 엄마의 물음에 더 이상 뛰지 않는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놓아준다. 그들에게 모녀 삶을 선사한 한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고 계속해서 뛰기를 소망한다. ‘달려라 아비’는 가슴 시릴 정도로 밝게 세상을 사는 주인공이 아버지를 향해 외치는 격려이자,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해 왜치는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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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Written on the Wind (Douglas Sirk)

 

Written on the Wind (Douglas Sirk) 감상평                                                   김봉재



 미국의 연극평론가 에릭 벤틀리는, 훌륭한 이야기란 싸구려 이야기의 반대가 아니라, 통속극 더하기 무엇이라고 했다. 체홉과 스타니슬랍스키에해 완성된 사실주의극이 현재까지도 가장 익숙한 스타일로 받아들어지고 있는 지금, 아흔이 넘은 노(老) 평론가의 정의는 자칫 진부하거나 저급한 것으로 치부되기 쉬운 멜로드라마적 가치를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의 TV연속극을 통해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멜로드라마는 잘 짜여진(well made play) 극적 구성을 가지면서 주로 남녀의 사랑과 관련된 가정사를 다룬다. 물론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등과 같은 ‘낭만적 사회 멜로드라마’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것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극이나 영화의 경우, 긴장감 있는 단일 플롯의 사용과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들이 일반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멜로드라마는 집안일이 끝났을 즈음의 주부들을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저녁식사가 끝나고 저녁뉴스가 시작하기 전에 잠시 빠져들 수 있는 오락으로서의 느낌이 강하다는데 있다. 가정사를 주로 다루다 보니 그것에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관객층을 배려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데, 그들은 이미 멜로드라마적 특성을 어느 정도 규정하고 바라본다. 앞서 언급한, 평론가 에릭 벤틀리의 견해와 반대로 대다수의 관객은 멜로적 특성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이 오락으로써) 자신의 견해와 맞지 않으면 비난을 퍼붓거나, 시청자 게시판을 찾는다. 왜냐하면 관객의 입장에서 그것은 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더글라스 서크의 ‘바람에 쓰다.’가 명화로써 가치를 평가받는 것은 멜로드라마적 특성과 함께 그 무언가를 잘 섞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56년에 만들어진 ‘바람에 쓰다’는 고대 희랍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플롯, 인물, 성격 등의 중요 요소들을 잘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까닭에 일어나는 대중과의 괴리감 역시 일부분 존재한다. 물론 감정의 정화와 순화가 목적이라면 ‘바람에 쓰다’는 이것마저도 약간은 가지고 있다. 오이디푸스처럼 눈이 멀어지는 대신, 건실한 ‘미치’는 교도소에서 썩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쓰다’는 수많은 모순을 가진다. 그리고 이 모순들은 극의 멜로적 특성을 저하시키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나며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현실비판이다.

 영화는 카일이 총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간 후, 총성이 들리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의 부인 루시와 동생 메리리의 모습이 보이지만, 영화의 시작에서 관객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총을 맞은 듯 쓰러지는 루시와 역시 집 앞에 쓰러지는 카일의 모습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 인지 조차 모호하다. 그러나 묘하게도 중요인물 미치의 모습은 완전히 배제되어있다. 카일과 그의 부인 루시 그리고 동생 메리리는 해들리가의 사람들이다. 즉 모든 피해자와 가해자를 해들리가로 대변되는 어떤 집단속에 한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카일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자식들의 방탕한 행동에 의해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으로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완전한 남자 미치가 있다. 잘생긴 외모에 명석한 두뇌와 사나이다운 기질, 그리고 단단한 주먹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순수 학문으로 분류되는 지질학을 전공하고도 유전개발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창조해 낼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이 멋진 청년에 대한 열등감은 모든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바로 여기에 사회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총잡이를 아버지로 둔 미치는 건실한 자식의 미국적 표본이다. 그는 앞으로 미국을 이끌어갈 충실한 젊은이가 될 것이며, 모든 젊은이들은 그를 따라야하고 모든 여성들은 그와 같은 남편감을 골라야 한다. 영화는 마치 미치의 찬송가를 부르는 것만 같다. 약해빠진 낭만주의자 카일에게서 가능성을 찾았던 루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은 개조하지 않은 채 미치의 능력만을 탐했던 메리리는 혼자 남는다. 미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카일은 자신의 아기를 죽이고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모든 일들은 그들이 미치와 같이 이성적인 (혹은 미국이 지향하던) 판단을 하지 않은 채, 부모세대가 이룩한 경제적 풍요 속에서 미성숙한 퇴폐와 향락을 지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치의 사랑을 받았던 루시의 실패도 그런 비이성적인 것들 속에서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는 낭만주의적 사고의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목장의 총잡이인 미치의 아버지는 카일의 아버지와 달리 시골의 아담한 집에서 사냥을 즐기는 낭만적 성격의 소유자이다. 여기서 두 번째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영화의 기본 스토리를 미루어 이 영화는 분명 건실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미치의 아버지는 오히려 카일과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카일 또한 미치의 아버지를 어린 시절 원했노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다. 타락한 메리리의 경우 그녀는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놀던 때를 그리며 미치를 기다리는 것으로, 추억은 추억 속에 묻어 두라는 미치의 대사처럼 변한 것은 메리리가 아니라 바로 미치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완전한 해피엔딩이다. 미치는 메리리의 결정적 증언으로 무죄를 인정받고 루시와 함께 떠난다. 바로 착하고 건실한 미국적 영웅의 승리로 끝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미국적 영웅은 자신을 믿었던 모든 자들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는 곳은 해들리가가 아니라 먼 이국땅의 다른 회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앗아서 다른 곳으로 가는 그의 모습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 사회인 것이다. 또한 메리리의 증언은 그녀가 결코 타락하지 않았으며 순수한 마음만을 지닌 해들리가의 경영주로써 우울한 미래를 예상하게 한다. 할리우드가 서크에게 싸구려 스릴러나 멜로드라마의 시나리오를 던져주며 돈은 많이 못 주지만 잘해보자고 당부했다는 사실은 이국땅에 건너온 좌파지식인 감독에게 결코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런 그에게서 미치와 같은 미국적 영웅의 탄생과 단순한 소비사회비판이라는 미국적 사고에 입각한 눈으로 영화를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멜로드라마를 통한 사회비판이 이토록 힘은 얻는 것은 감독의 천재성과 더불어 멜로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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