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스는 여기서..."로 시작되는 끝에서 네번째 문단을 보면...
(1) 먼저 그 문단의 "게다가..."로 시작되는 문장부터가 제 책에서는 독립된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2) 또한 그 문장 앞에, 즉 "...적절하다"로 끝나는 문장 다음에 한 문장이 추가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3) 한편 그 바로 앞에, "인간이...나타난다"라는 인용문은 출처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4) 이상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서.. "맑스는 여기서..."부터 "게다가..." 바로 전까지, 즉 제 책에는 하나의 독립된 문단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봤습니다. (곰탱이 님 번역에 약간의 수정/의역을 했고, 앞서 말씀드린 추가된 한문장을 넣었습니다.)
맑스는 여기서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계지점에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인간학으로부터 인간 존재에 상응하는 사회상태를 끄집어내고 있으며 그 사회상태를 이상(Ideal)으로서 현실성에 대립시키고 있다. 그가 다른 곳에서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세계를 인간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는 한, 이러한 공동체가 소외의 형태로 나타난다”(Ⅳ.2/452; 40/451, Herv. von mir)고 말한 것도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소외의 상태에서 소외되지 않은 상태로의 이행이 마치 인식(깨달음, Erkenntnis)의 문제인 것처럼 드러난다.
(5) 위에서 보시듯이, 한 문장이 추가됨으로써 의미가 훨씬 더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 같은 문단의 맨 마지막 문장: "이 형태들은..."
여기서 주어 sie는 Sost를 받습니다. (Sost가 여성인가보군요.) 따라서 이 문장은 "그녀는..."으로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보다는 "본질"이 의미를 더 명확히 전달해주는 것 같습니다.
-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에서는 위 본문의 딱 중간쯤에 있는 "맑스가 인간 유적 존재의 대상화를..."로 시작되는 문단부터가 "제6절"입니다.
- 한편 "맑스가..."로 시작되는 그 문단과 그 다음에 있는 짧은 문단에서는... 저자 하인리히는 맑스가 내용적으로는 포이어바흐를 넘어서고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탱이 님의 번역에서 이게 좀 불명확한데... 어쩌면 그것은 판본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진 판본에는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는데... 그것을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곰탱이 님의 번역을 약간 수정했고, 또 제가 가진 책에서는 그 아래 있는 짧은 문단과 통합되어 있습니다.)
맑스가 인간 유적 존재의 대상화를 대상적 생산으로 파악하고 이 생산을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할 때, 포이어바흐의 비역사적인 인간학은 이미 잠식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유적 존재의 내용적(inhaltliche) 규정에만 적용된다. 맑스의 담론 구조(Struktur)는 여전히 하나의 인간학적인 존재철학이다. 이는 특히 유적 존재의 사회성에서 뚜렷해진다. 포이어바흐에게서 이러한 사회성은 “인간과 인간의 통일”로서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나타난다. 맑스는 이런 견해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포이어바흐의 영역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실재/현실(gesellschaftliche Wirklichkeit)은 인간적 본질의 객관화(Objektivierung)로 이해되고, 사회성은 개별적 개인들에 내재한 유적존재를 통해 나타난다. 맑스는 단호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서야 좀 봤네요. ^^;;
먼저 제가 가지고 있는 2006년도 판에는, 위 절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단 말씀을 드립니다. 즉 "제5절 인간의 본질"과 "제6절 코뮤니즘: 기원과 유토피아" 이렇게요.
(1) 두 번째 단락, 주37 바로 다음에 "공책"은 "수고" 또는 "노트"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2) 주41 다음 문장에.. "헤겔 논리학"이라고 하신 것은 "헤겔식 논리"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바우어가 헤겔의 "논리학"의 한계를 못 벗어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헤겔을 비판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논리 안에 갇혀있다는 게 맑스의 바우어 비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맑스의 경우엔, 이 당시까진 헤겔의 논리학을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3) 그 다음 단락.. <경철수고> 인용부분. "...노동을 존재로서, 즉 인간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서..."를 "...노동을 본질로서, 즉 자기를 입증하는 인간의 본질로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4) 제가 위에서, 곰탱이 님이 "존재"라고 번역하신 Wesen을 "본질"이라고 바꿨는데요, 이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독일어로 Wesen이 두 가지 뜻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저는 이번 절에서는 대체로 "본질"이라고 해야 의미가 더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위에 썼듯이 이 절의 제목도 "인간 존재" 대신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 것이고요. 물론 어떤 경우엔 "존재"라 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제가 "본질"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헤겔도 그렇고 포이어바흐도 그렇고... 당시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나름대로 규정합니다. 이번 절에서도 드러나듯이 맑스도 적어도 <경철수고>에서는 그런 "관행"(?)을 따르는데... 그는 포이어바흐의 "유적존재"라는 규정을 인간의 "본질"로 받아들이면서도, 헤겔이 (비록 사변적인 형식으로였지만) 강조한 그것의 "역사성"도 함께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맑스의 이러한 태도, 즉 인간의 "본질"을 어떤 식으로든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태도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자취를 감추죠. 그러면서 그는 인간이란 그저 현실에서 그가 맺고있는 관계에 의해 규정될 뿐이라고 말하는 거구요.
결국 이 모든 과정에서... 맑스의 문제는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것으로 요약될 것 같습니다. 이번 절은 바로 그러한 과정의 한 국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판단하고, 그렇다면... Wesen도 "존재"보다는 "본질"이라고 번역해 주는 것이 더 명확하지 않겠냐는 거죠.
에구... 주절주절 많이 늘어놨네요. ^^;;; 이거...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를 한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수 있는 만용이 아직 남아있다니 놀랍기도 합니다. ^^;;;
난 어제 눈이 너무너무 펑펑 쏟아 지길래, 사진 이빠이 찍었는뎅...ㅋ 사실, 어제 저희 단체 송년회가 있던 날 였거든요. 뒷풀이 하는데 계속 눈이 쏟아져서 결구 밖으로 다 다오고 말았다는...신나게 눈싸움도 하고...정말 너무 오랜만에 보는 환상적인 눈이었습니다..(담부턴 혼자 술 드시지 말고, 저를 불러주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