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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운동 살아남을까?

우리의 노동운동 내부에는 강력한 산별노조 체제인 독일 노동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듯 합니다. 독일 노동운동은, 상급 수준에서 정치적 협상을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코포라티즘(사회적 교섭주의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할 듯)의 전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독일 노동운동과 한 짝을 이루는 사민당이 우경화하면서 노조의 힘도 많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이 특히 그렇습니다. 지난 2005년 9월18일 총선에서 사민당이 기민당-기사련에게 1등을 내어주고 대연정의 하위 협력자가 된 것도 노조와 무관한 일은 아닌가 봅니다.

 

아무튼 총선 전에 쓴 글이지만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노동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Can Germany's Corporatist Labor Movement Survive?) 라는 제목의 글을 번역했습니다. 잉고 슈미트(Ingo Schmidt)라는 독일 노조 교육가이자 경제학을 가르치는 이가 아메리카에서 나오는 <먼슬리리뷰> 2005년 9월호에 쓴 글입니다. 독일 노조운동과 사민당,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문제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래서 독일 노동운동의 배경과 전통, 한계를 요약해서 이해하는 데 좋은 글입니다. 독일 총선 전에 쓴 것이어서 총선 결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한가지는,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곧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 아래서 노, 사, 정이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아주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서 자라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지금 같은 방식을 시도한다는 게 얼마나 가망성 없는 일인지도 느끼게 됩니다.


 

독일의 사회적 교섭주의 노동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Can Germany's Corporatist Labor Movement Survive?)

잉고 슈미트(Ingo Schmidt) 먼슬리리뷰 2005년 9월호 (원문 www.monthlyreview.org/0905schmidt.htm)

 

잉고 슈미트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프린스 조지에 있는 노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독일의 지역 노동 잡지인 <괴트링어 베트리브젝스프레스>(Goettringer Betriebsexpress)의 공동 편집인이며 아탁-독일의 과학자문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노동 교육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옮긴이 주: 사회적 교섭주의라고 번역한 건 Corporatism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형용사형인 Corporatist가 쓰인다.) 정치학자 정병기는 코포라티즘이 “국가기구의 적극적 중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자본주의 질서 유지를 부정하지 않는 노, 사, 정 3자의 정치적 협상과 교환이 사회갈등 해결의 핵심적 수단으로 제도화되거나 적어도 장기적, 지속적으로 기능하는 사회, 정치적 운영 원리와 과정이다.”고 정의했다. 이 말은 이 땅에 처음 소개될 땐 '조합주의'로 번역됐는데, 노동조합주의 등과 혼동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표현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아예 코포라티즘이라고 쓰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는 옳은 태도가 아니다. 요즘 우리 노동운동에서 자주 쓰이는 말 가운데 '사회적 교섭주의'라는 게 있다. 전투적 노동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은 강하게 비판하는 반면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코포라티즘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이 존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실제 내용도 대체로 비슷하다. 그래서 코포라티즘을 사회적 교섭주의로 번역하는 게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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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년동안 독일은 중도-좌파 연정이 지배했다. 이 정부는 1998년 선거에서, 유권자 대다수가 긴축 재정, 실업급여 및 사회보장 삭감, 임금인상 제한이 번영과 완전 고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보수세력에 싫증을 느낀 덕분에 구성됐다. 그렇지만, 새 정부의 정책은 이전 정부의 정책이 마치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회민주당(SPD)이 이끄는 새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뒤 복지국가가 확립된 이후 가장 심하게 노동과 사회복지 기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민당은 그동안 스스로를 복지국가 확장을 추구하는 중추 세력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들의 반노동자 행태는 지지자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복지국가의 해체는 지지율과 당원 숫자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고 대규모 항의 물결을 촉발했다. 하지만 정부에 도전을 제기할만한 운동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거리의 시위가 아니라 지역 선거에서 당한 일련의 완패가 결국 연방정부로 하여금 총선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이는 역설적인 상황을 촉발했다. 한편으로 기독민주당(CDU)이 일반적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다.(이 글은 9월18일 독일 총선 전에 발표됐다. 총선에서는 기민당-기사련이 35.2% 득표로 승리했지만 34.3%를 얻은 사민당과 차이가 거의 없어 독자 연정 구성을 못했다. 결국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이라는 뜻밖의 타협이 이뤄졌다. : 옮긴이) 다른 한편 기민당이, 무엇보다 사민당의 몰락을 촉발한 신자유주의적 정치를 지속할 것이라는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표면적 모순에 대한 한가지 설명은, 유권자를 동원하는 데 있어서 두 당이 지닌 서로 다른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기민당은 여전히 다양한 사회 계층에게서 지지를 끌어올 수 있는 반면, 사민당은 노동자와 실업자의 지지를 잃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과 반대일텐데, 기민당은 상류층 일변도 정당이 아니다. 이 당도 나름대로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에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완벽하게 형성된 적은 결코 없다. 사람들이 느끼는 국제 경쟁력 향상 필요성이 널리 수긍을 얻지만, 동시에 “복지국가 취향”도 강하다. 이런 모순된 공감대는 (서부)독일의 전후 역사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여전히 정치 정세에 결정적이다. 노조가 이런 공감대의 형성과 변화에 핵심 구실을 했다. 이 공감대는 수출 지향적 성장과 노동-자본에 대한 사회적 교섭주의적 중재에 대한 공감대다.

 

사민당이 신자유주의로 돌아서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노조 내부의 한 파벌은 사민당과 연대를 지속하는 쪽을 택했다. 이들은 이것이 보수주의자들에 맞서 복지국가의 존재 자체를 방어하는 유일한 길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에 반대한 소수 파벌은 한층 운동 지향적인 노동조합주의를 선택했다. 몇몇 노조운동가들은 새로운 당 건설을 착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지난 5월 연방 총선이 발표된 이후 노조 지도자들은 사민당을 차악으로 묘사하면서 다시 지지로 돌아섰다. 과거 사민당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 형성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노조의 승인을 받지 못하지만 묵인되고 있다. 독일 노조가 그동안 공식 노선에서 이탈하는 걸 억압해온 점을 고려하면, 이는 개방성 확대와 조합 민주주의를 향한 일보 진전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회 정치에서 노조의 목소리 상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조의 정치적 중요성 하락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굳어져온 단체교섭의 원칙들에 도전하도록 부추겼다. 아주 최근까지도 노조는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고 반면 고용주들은 이런 요구를 억제하려 했다. 이제 고용주들은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연장을 요구함으로써 주도권을 쥐었다. 공장 폐쇄 위협에 직면한 노조들은 일정 기간동안 일자리를 보장받는 댓가로 노동조건과 임금 저하를 종종 받아들인다. 노조의 핵심에 대한 이런 맹공격에 비하면, 이따금씩 항의시위와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가망없는 일 같다.

 

이런 현재 상황은 두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지난 30년동안 지속된 복지국가의 기본 제도가 속빈 강정이 되어가는 게 결국 복지국가 폐지로 이어질까? 그리고 두번째, 사민당과 노동운동이 직면한 현재 위기는 노동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열게 될까? 나는 이 두가지 질문을 검토하면서 한가지 가설을 따져볼 것이다. 이 가설은, 전후 노동과 복지국가의 역사는 고도의 제도적 연속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기간의 경제성장 둔화가 사회적 기준의 약화와 복지국가의 사회적 기반 붕괴를 초래했다. 사회보험과 단체교섭 같은 제도가 복지국가에 대한 지금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제도들이 체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복지국가가 가져온 일하는 이들 다수의 사회적 통합이, 과거에는 집단적으로 생산한 부 가운데 정당한 그들의 몫이라고 이해되던 것에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배제되는 걸로 대체될 수도 있다. 복지국가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했던 한 묶음의 제도에서, 체제 자체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새로운 중산층의 특권을 보호하는 장치로 바뀌어갈 수 있다. 나는 또 독일 노동운동의 주류에 깊숙이 박혀있는 일종의 제도 물신 숭배가 이런 변화에 맞서는 성공적인 투쟁 앞에 가로놓인 주요 걸림돌이라고 논할 것이다.

 

노동운동과 이 운동의 주류가 한 부분으로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교섭주의 복지국가를 이해하려면, 이들 근대적 현상에 포함되어 있는 중세 봉건적 유산을 고려해야 한다. 독일의 봉건주의는 다수의 지역 군주가 장악한 탈중심적 정치 권력, 지역 군주 위의 허약한 중앙 권력, 그리고 부유하고 강력한 수공업자 조합(길드)의 발전을 허용한 중세 도시들의 독자적인 경제적 자율성을 특징으로 했다. 이 분리는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업무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노동운동의 경향 속에 반영되어 있다. 노동쪽의 정치적 관심은 봉건 국가를 민주 국가로 변혁시키는 것이었고, 사민당 창당 초기에 이는 보통 '인민의 국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봉건주의의 분열된 권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민당은 인민 대중의 통일을 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민주 국가의 사회적 기반으로서의 계급 구별선을 무시하기도 했다. 이런 국가의 목표는 입법을 통해 일하는 이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고용주와 단체교섭을 벌이는 데 집중하게 됐다. 또 정치 행동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지 않으려 했는데, 특히 정치 파업에 더욱 그랬다. 노조가 원래 중세의 수공업자 조합에서 기인했기에, 노조는 스스로를 좁게 정의된 경제적 구실에 한정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숙련 노동자 조직화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강력한 생산중심주의 이념을 발전시켰다.

 

사민당과 노조의 분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에 아주 큰 논쟁거리가 됐다. 당시 독일의 제국주의적 공격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의회에 요청한 신용을 당이 승인했다. [이 때는] 동시에 노조 지도부가 자율적인 정치 행동에 개입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 공산당을 창당한 당내 및 노조내 좌파들은 전쟁 초기 대중을 지지세력으로 확보하지도, 조직적 능력을 지니지도 못했다. 전쟁 이후 상황은 훨씬 나빠졌다. 바이마르공화국[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혁명으로 제국이 붕괴한 뒤 사민당이 수립한 공화국이다. 1933년 나치 집권 때까지 유지됐다. :옮긴이]을 사민당은 자신들의 인민의 국가 전망을 구현한 것으로 봤고, 노동운동은 총파업 같은 대중 행동이 나치의 집권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때조차 공화국의 의회 지배 틀을 깨려 하지 않았다.

 

노조와 복지국가에 남은 봉건주의의 각인은, 요약하자면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뚜렷한 구별을 유발했다. 정치 투쟁은 의회 활동에 국한됐고 경제 투쟁은 노동계급 내 낮은 지위 계층을 상당 수준 방관자로 방치한 채 숙련 노동자 문제에만 주로 집중했던 것이다.

 

자본도 봉건주의에 의해 형성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봉건적 유산은 대학의 이론적 교육으로 보완되는 수공업적 조합의 산업 훈련 체계 도입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자리잡힌 기술 발전 경로를 따르는 점증적 혁신을 선호한다. 오직 산업 자본주의의 시작과 더불어서 독일은 몇몇 급진적 혁신을 보게 되는데, 이는 화학산업과 자동차산업의 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두 산업이 여전히 독일 경제를 이끌어가는 업종이라는 사실은 급진적 혁신보다는 점증적 혁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제 3위 업종인 공작기계 산업은 중세의 수공예에서 직접적으로 발전해나왔고 그 결과 중소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다. 반면 화학과 자동차 산업은 대기업들이 지배한다. 이 두 산업의 초기에는 수평적 집중이 우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아메리카 기업의 수직적 통합과 대비되는 것이다. 잠시동안 수평적 합병 우위의 상황이, 숙련노동의 사용을 포함해 오랫동안 형성된 노동 조직 형태의 지속을 가능하게 했다. 일관작업 방식의 생산이 폭넓게 도입된 이후에도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 생산방식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노동의 저하가 다른 많은 나라보다 훨씬 제한적으로 나타났다. 집약적 자본과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높은 노동력의 결합은, 혼란스런 시장 규제와 시장의 호황-불황 순환을 노동과 자본의 어깨 위에 똑같이 부과되는 사회적 교섭주의적 규제로 대체한다는 생각이 자라나는 바탕이었다. 노조와 사민당 지도부는 이런 규제가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계급투쟁을 피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경제 위기와 계급투쟁이 비이성적인 자본가와 비숙련에다가 거칠고 퇴행적인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봤다.

 

과학적 통찰과 이성에 근거한 사회적 교섭주의적 규제라는 개념은 산업계와 은행이 금융자본으로 뭉친 뒤에도 여전히 강력했다. 신용 규제는 변덕스런 시장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산업 생산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됐다. 이렇게 기업 차원의 경제 규제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암시하는 바는, 거시경제적 규제의 거부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은 급진적인 부류까지 포함해 노동운동 내부의 다수뿐 아니라 중산층과 지배계급의 다수도 공유하는 바다. 한편으로 과점 상태인 산업 부문 차원의 기업내 사회적 교섭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반케인즈주의적 태도는 널리 공유되는 합의가 됐다. 그리고 이 합의는 2차 대전 이후 줄곳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 서독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성격을 규정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독일식 경제 발전 모형은 경제적 번영, 정치적 안정, 사회적 타협을 우선하는, 계급의 경계를 넘어선 합의와 제도적 연속성뿐 아니라 강한 수출 지향성에 의해 모양을 갖췄다. 독일산 제품을 세계 시장에 파는 것이 제품 가치를 궁극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자 번영의 필요조건으로 여겨졌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합의는 외국 시장 정복의 중상주의 기획을 포함한다. 이런 경제 정책의 지배적인 목표는, 국제 경쟁력이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선거 문구가 되기 훨씬 전부터 독일 자본가 계급이 추구하는 것이었고 노동 운동 내부의 주류가 수용한 것이었다. 사실, 이는 제3제국의 패배 이후 자본주의적 세계로의 서독 재통합의 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초기부터 자본주의 발전의 한 부분이었으며, 파시스트 독재로부터 자본주의적일지언정 민주적인 공화국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를 띤 이런 내부적 사회적 교섭주의는 세계 시장을 향한 중상주의 정책에 의해 보완됐던 것이다. 이 둘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것이 지난 50년에 걸쳐 창출한 거시경제적 결과는 계속 변화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전후 시기를 1950년대와 60년대의 성장 순환기, 1970년대의 이행기, 1980년대와 90년대의 재분배 순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1년의 세계 경제 침체 이후 시작된 수축 경향을 띤 정체기로 나눌 수 있다. 자본주의 핵심을 이루는 다른나라들에서처럼, 첫번째 시기에 총생산은 전례가 없는 비율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명목상 수요는 더 빠르게 성장했다. 그래서 통화 팽창(인플레이션)이 가속화했다. 비록 점진적인 추세로 가속화했지만.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더 높은 실질 임금과 더 적은 노동시간을 획득했다. 전반적인 성장이 수출에 의해 유발됐지만, 이 때 단체 교섭의 주요 결과물인 실질 임금과 생산성 향상의 연계가 대중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과잉생산을 피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의 수출주도 성장은 세계적 범위에서 실질 임금 성장과 정부 지출이라는 기존 유형을 통해 균형을 맞출 수 없는 지경까지 과잉생산의 축적을 유발했다. 총수요 격차는 더 높은 실질 임금 성장 그리고/또는 증가하는 정부 지출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좌파 케인즈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전략이 실제로는 구현될 기회가 없었다. 여기에는 4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기술적 발전이 날로 더 자본집약적이 됐다. 마르크스 용어로 표현하자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이윤율 저하 압력이 가해졌다. 둘째, 최근에 생활수준 향상을 쟁취하는 법을 익히게 된 노동계급은 명목 임금인상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됐고 그럴 용의도 있었다. 셋째, 소득 분배 투쟁 과정에서 더 가속화한 통화 팽창이 수출의 주요 위협요인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지배계급 대다수는 노동자들의 교섭 능력을 약화시킴으로써 통화 팽창을 억제하고 이윤을 높이는 제한적 경제 정책을 선택했다. 넷째, 심지어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소수만이 좌파 케인즈주의로 가길 원했다. 통화 팽창 억제가 제한적 거시 경제 정책에 따라 고용이 저하되는 걸 뜻함에도, 운동의 주류는 감지된 통화 팽창 억제 필요성을 수용한 것이다.

 

통화 팽창에 반하는 쪽으로 돌아선 게 1980년대와 90년대의 재분배 순환기 도래를 이끌었다.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두가지 결과를 초래한 임금 인상의 억제다. 첫번째 결과는 통화 팽창 완화 절차가 본격화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실질 임금 증가가 생산성 증가에 뒤졌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이는 이윤율 상승을 이끌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중 소비의 성장 둔화와 실현된 이윤을 포함한 전체 성장의 둔화 탓에 이윤율 상승 속도도 떨어졌다. 축적이 이렇게 제한된 상황에선 노동시간 추가 단축조차 고용 저하를 막을 수 없었다. 실업 증가는 총 임금과 순수 임금의 격차 확대를 유발하기도 했는데, 이는 실업급여의 주요 재원이 임금 보수에서 공제된 충당금인 탓이다.

 

제한된 축적과 통화 팽창 완화의 두가지 과정은 세계 경제가 호황에서 불황으로 돌아선 2001년 독일 경제를 침체와 통화 수축의 벼랑으로 내몰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수출이 내수 촉진에 실패했다. 장기화한 긴축 재정, 억제된 임금 인상, 늘어나는 실업은 저축 여력이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한테 지출을 더 줄이게 만들고 고임금 노동자들한텐 저축을 늘리게 만드는 상황을 불렀다. 이런 현상은 노동자들이 과거처럼 사회복지 지원에 의존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심지어 늘어나는 수출조차 경제 침체를 막지 못했다.

 

이런 조건에서 사회적 교섭주의는 사회적 통합을 일궈낼 능력이 더 줄게 될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독일 복지국가의 두가지 기본 원칙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하나는 실업보험금과 은퇴노동자의 연금 같은 지불금이 대부분 총 임금에서 공제된 충당금으로 마련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수령액이 과거 받던 임금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전후 호황이 끝나고 이어서 대규모 실업이 나타나면서 초래된 복지국가의 재정 위기를 메우기 위해, 개인의 수령액이 지난 30년동안 조금씩 조금씩 줄었다. 종류를 가릴 것 없이 복지 지원금 수령 자격자는 늘어나는 반면 개인별 수령액은 줄면서, 국내총생산에서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정하게 유지됐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오직, 명목상 총 임금이 이 기간동안 늘어났고 이 덕분에 사회복지 세금의 재정적 기반도 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반적인 임금 보수가 정체되어 있거나 심지어 줄면서, 복지 지원금 대상자가 점점 늘어나는 문제뿐 아니라 이런 지원금을 뒷받침할 세입의 결여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다. 이는, 복지 체제에 기여하는 동시에 노동자 당사자에게 혜택을 주는 의미를 지닌 정규직 상시 일자리를, 최소한의 사회보장 외 모든 것에서 배제되는 비정규직 일자리로 대체하는 고용주들의 추세 때문에 더 악화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 침체는 유례없는 복지국가의 재정 위기와 복지체제 없이는 삶을 꾸려갈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지원금 감소를 초래했다. 복지국가의 제도적 환경은 그대로지만 복지국가의 성격은 바뀌는 듯 하다. 서로 다른 수준일지언정 사회 보장을 책임지는 체제에서, 중산층과 노동계급 내 상층부의 특권이 빈곤 노동자들과 실업자 그리고 날로 늘어나는 연금 생활자들을 희생하는 댓가로 유지되는 체제로 말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희생자들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지만 이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저항은 아주 약한 상태로 남아있다. 원인은 옛 형태의 복지국가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킨, 변화하는 계급 구성에서 찾아야 한다.

 

수출 지향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는 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독일 상황에서,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위에서 제시했듯 산별 노조주의가 더 높은 실질 임금과 복지국가의 재원 확보를 추구함으로써 구매력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수공업자 조합에서 물려받은 산별 노조의 생산중심주의 이념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억제하고 그로써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수출 증가를 위한 몰이와 자본의 대항 권력으로서 노조의 자아상은 언제나 경쟁하지만 그럼에도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형성해왔다.

 

이런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금속노조(IG Metall)는 많은 이유 때문에 중대한 영향력을 지녔고,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금속노조는 위에서 봤듯이 독일 경제를 이끄는 두 업종인 공작기계와 자동차 분야 노동자들로 조직된 노조다. 수출 산업에 가장 중요한 공급원인 철강생산 분야의 노동자도 포함된다. 게다가 이 업종들은 대기업부터 중소 규모 기업까지 모두 포괄한다. 이런 이질성은 세심하게 조율된 임금 등급에 반영되어 있다. 금속노조가 대표하는 서로 다른 업종과 직업은 노조에 특정한 지위를 부여했는데, 그건 독일 노동계급의 집단적 상상력을 아주 높은 단계로 형성하는 지위이자 다른 노조들이 뒤따르는 기준점을 세우면서 단체 교섭을 이끄는 지도자라는 지위다.

 

금속노조는 서비스노조(Verdi)에 대해서도 지도력을 발휘한다. 조합원 숫자가 금속노조보다 많은 서비스노조는 공공 부문, 운수, 무역과 금융 부문을 대상으로 한 노조다. 금속노조가 서비스노조보다 우위를 점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서비스노조는 불과 몇년전에 작은 노조들이 합친 조직이며 그래서 수십년동안 금속노조가 발전시켜온 일관성이 없다. 둘째, 계급 경계를 넘어서 널리 공유되고 있는 지배적인 생산중심주의 이념은 서비스 노동자를 높은 비용을 초래하지만 수익은 적은, 어느 정도 비생산적인 노동자로 취급한다. 이런 시각에선, 기술적으로 앞선 기계와 숙련 노동자를 결합시키는 산업 생산과 비교하면 서비스 분야 고용은 열등하게 보인다. 널리 퍼져있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이런 관점은, 노동과 자본에 대한 신고전주의적 개념에 이념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신고전주의적 개념에서 노동과 자본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생산 요소들이며 한쪽이 다른쪽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과 무관하다. 이런 이념을 몸에 익힌 금속노조와 다른 노조들은 작업 현장 또는 공장 단위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종종 중립적인 중재자 구실을 하려 한다.

 

대체로 독일 사회적 교섭주의에서 금속노조로 대표되는 노조의 위치는 상당히 모호하다. 한편으로, 노조는 한 업종에서 자본에 맞서 전체 노동계급을 조직하고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조는 노동과 자본을 함께 묶는 생산중심주의적, 중상주의적 사회 합의를 넘어설 위험이 있는 노동자의 투쟁을 제어해왔다. 보통, 사회적 교섭주의적 통합과 노동자의 자율적 주장의 균형은 일종의 '통제된 행동주의'로 유지될 수 있었다. 노조가 자율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국가 기구의 부분이 되는 일이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제할 수 없었던 일은 아주 드물다.

 

자본과 노동 관계의 사회적 교섭주의적 중용은 언제나 어떤 특정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이유는, 비숙련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부를 산출하는 데 오직 최소 한도만 기여한다고 간주됐다는 데 있다. 이는 서비스 노동자에게도 똑같이 씌워지는 불명예다. 이런 한계적 지위는 이 노동자들을 전체 임금 등급의 밑바닥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전후 번영기 동안엔 이런 노동자들이 많지 않았고 바로 윗등급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격차도 적었다. 저임금을 받는 그들은 여전히 숙련노동자와 동일한 계급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내부적으로는 얼마나 구별이 있건 하나의 노동계급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전후 호황의 종말이 경제 구조개편을 유발했을 때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사회적 교섭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두가지 분리가 지난 30년동안 점차로 나타났다. 첫째로, 단체 교섭의 합의에 따라 노동조건이 결정되는 노동자들과 저임금에다 자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제 노동 또는 임시직 노동을 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의 분리가 있다. 두번째로, 총 임금과 순수 임금 간의 이른바 쐐기가 있다. 이 차이는 실업급여, 건강보험료, 연금 지급을 위한 분담금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나타나 점차 확대됐다.

 

고용주들과 부르주아 언론들은 복지 체제의 수혜 대상인 노조 소속 노동자들을 상대로,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자발적 실업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그들[일하는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세금으로 충당되는 복지체제를 이용해먹고 있다는 주장을 퍼뜨리는 데 대성공을 거뒀다. 대량 실업 사태와 일하는 이들의 사회보장 수준에 가해지는 압력에 분노하는 대신, 자본가 계급의 복지 예산 감축 운동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확대되고 있다. 조만간 이런 복지 지원이 필요하게 될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예산 감축이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한 임금 동결과 노동시간 연장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다. 단체교섭이 적용되고 해고당하면 수당을 제공하는 일자리 찾기를 아무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전 노동을 받아들이는 게 새 일자리를 찾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계급의 규모를 줄이는 게 경제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난 유일한 것이다. 변호사, 각종 자문, 언론인처럼 독점자본주의 초창기까지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가되 전후 호황기에 큰 규모로 성장한 이른바 전문직들로 이뤄진 새로운 중산층은 그동안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부분적으론 이들 전문직이 경제 구조조정에 적극적인 세력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조조정 절차가 어렵지만 번영을 위해서 불가피한 과정처럼 보이게 하는 데 쓰이는 전문 기술을 제공하고 선전 활동을 창출했다.

 

이 중산층의 지위는 경제적 자본보다는 상징적 자본에 훨씬 더 의존하며 이 점이 그들을 부르주아지와 구별한다. 이런 이유로 중산층은, 특히 경제 침체기에 지위 상실을 두려워 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 그들은 복지국가를 포획하고 오래 역사을 지닌 노동계급의 기초 세력 가운데서 점점 많은 숫자를 이 시스템에서 배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 이념적으로 보면 이 공세는 '제3의 길'의 형태를 띠었다. 이 길은, 사람들을 활성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체제를 갖춘 복지국가를 통해 오래된 재분배 구조를 극복할 것이라고들 했다. 실제론, 제3의 길 정책이 소득 분배와 사회보장, 공공 서비스 이용 기회를 양극화했을 뿐 아니라 사민당에 중대한 변화를 유발했다. 사민당의 유권자 기반은 사회적으론 노조 조합원보다 언제나 넓었지만 노조원들은 사민당의 핵심이었다. 이 사실은 노조와 사민당이 독일에서 노동 진영의 두 축으로 떠오른 이후 변함 없었다.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사민당의 사회적 기반이 숙련 노동자들의 핵심에서 새로운 중산층으로 차츰 대체되고 있다. 정치적으론, 노동운동이 현재 두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그동안 잘 형성되어 있던 노조 대표성의 형식을 약화시킨 계급 구성의 변화다. 둘째는 이미 약화된 노조가 정치 영역에서 자신의 짝을 잃었다는 점이다.

 

대량 실업과 경제적 구조조정은 독일 사회적 교섭주의의 노동쪽 부분을 텅 비게 만들었다. 이는 사민당을 제3의 길 정당으로 변화하게 했으며 노조를 수세적인 태도로 몰아갔다. 필수 요소였던 단체 교섭과 복지국가를 포함한 사회적 교섭주의 전체가 전반적인 사회적 합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교섭주의의 허물지는 기반은 노조 조직만 흔드는 게 아니라 전체 정치 체제까지 흔들고 있다. 국가 기구들 안에 그리고 심지어 보수적인 기민당과 강한 규제를 받고 있는 장인적 숙련 산업(craft industries) 같은 특정 부르주아지 분파 사이에서도, 족쇄풀린 시장과 권위주의적인 정부의 조합보다는 자본과 노동 관계의 사회적 교섭주의적 중재를 선호하는 흐름이 있다. 하지만 인식해야 할 중요한 모순 한가지가 있는데, 그건 사회적 교섭주의의 위기에서 등장했으며 이 위기 대처법을 형성하고 있는 모순이다. 복지국가와 조직 노동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는 여전히 널리 퍼져있지만, 자본가 연합당과 같은 것들이 사회적 기준 약화를 계속 추구하고 있는 의회 체제 안에는 이 합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결론을 많은 이들이 싫어하지만, 그들의 정책들은 또 다른 합의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 몇십년동안 작용하고 있는 이 또 다른 합의는 세계 시장의 시험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이 서로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수출 증대를 위해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면 임금을 낮추고 복지국가를 해체해야 한다는 감지된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이런 모순과 사회적 교섭주의 위기에 대한 노조의 대응은, 잘못된 쪽으로 이끌려간 정치적 계급 때문에 압력을 받고 있지만 이미 검증된 이 진정한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교섭주의의 제도적 뼈대 옹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다수의 노조운동가들이 공유하지만, 여기에 결부되어 있는 전략적 주장은 서로 다른 두가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사회적 교섭주의 위기에 대한 보수적인 대응은, 단체 교섭이 사회적 보호가 아니라 자신들의 창조성에 대한 족쇄를 의미하는 세력인 고도 숙련 노동자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제3의 길 방식의 수사학을 취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노동계급 내 상위 계층이 품고 있는 환상 곧 단체 교섭보다는 개별 협상을 통해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노선을 따르는 노조 정책은 기껏해야 저임금에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 대한 상위 계층 노동자들의 우월적 지위만 지킬 것이다. 전체 노동계급을 하나의 영역 안에 모두 조직하고 내부적 차이를 조율하는 과거의 시도를, 노동 귀족과 무산자들의 깊은 분열이 대체할지 모른다. 이런 변화는 노조가 사라질 거라고 암시하는 게 아니다. 노조가 최근 사민당이 겪은 것과 유사한 변화를 겪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당장 위기에 처한, 노조와 사민당의 오랜 협력관계는 두쪽이 모두 제3의 길을 가게 되면 재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노조 내부에서 이런 사태 진전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사회복지 비용 삭감의 감지된 필요에 반해서, 경제 성장과 고용을 창출하고 복지국가에 대한 재정적 압박을 제거하기 위해 케인즈주의적 정책 도입이 제시된다. 이를 통해 사회적 기준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개선하는 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사민당이 이런 케인즈주의적 복지 전략에 등을 돌렸기에, 노조는 새로운 사회정의 운동과 같은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해 활동 영역을 단체 교섭을 넘어 정치로 확장해야 한다고들 한다. 사회정의 운동과 연대를 원하는 세력이 제3의 길을 취하려 하는 이들을 압도한다면 중요한 일보 진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몇가지 걸림돌을 극복해야 한다.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3의 길 정치가 소수의 노조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됐을 뿐 아니라 노조 조합원 내부에 사회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계급의 상층부 사이엔 경쟁력을 높이고 노동계급의 하층부와 연결을 끊음으로써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킬 여지를 보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생산성과 수입을 정규 교육과 연결짓는 생산중심주의 이념은 이런 관점을 옹호하고 그래서 진보적인 노조 정치의 주요한 걸림돌이다.

 

두번째 문제는 케인즈주의가 종종 경제적 번영에 기반을 둔 완전 고용의 길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태적 이유 때문에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성도 거의 없는 건, 다름 아닌 전후 번영과 같은 성장률을 회복하는 것이다. 저성장 또는 심지어 정체 상태 아래선, 임금과 사회적 비용을 줄일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삭감이 지속되어야 한다면, 이는 분명히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에게 분명히 유리하다. 번영기에 가능하던 것 곧 노동과 자본이 점점 커지는 파이를 함께 나누는 것은 성장률이 낮을 땐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소득의 '공정한 나눔'이라는 사회적 교섭주의적 개념은 대체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건 고용주들이 오래전부터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 곧 자신들의 적대 계급을 희생할지언정 고용주쪽의 몫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금속노조와 서비스노조의 지도부는, 마음에도 없으면서 말뿐인 친절로 거론되던 케인즈주의적 프로그램을 이 프로그램 실현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무너지기 시작한 뒤에야 채택했다. 경제 침체, 새로운 중산층과 불안전 노동자의 심각한 양극화가 확산된 상황에서, 사민당을 다시 케인즈주의로 돌아오게 설득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실패가 예고되어 있다.

 

최근 사민당이 총선 실시를 제기한 것은 제3의 길이 궁지에 몰렸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래서 노동운동이 당장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케인즈주의적 정책의 재창출을 시도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케인즈주의를 소진시킨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해야 하는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노조내 주류가 지금 이런 전략적 지향을 요구할 뿐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이 몇몇 노조운동가들은 사민당의 케인즈주의와 사회적 교섭주의 전통에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새 정당 곧 '일자리와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WASG) 건설에 착수했다.

 

이런 시도는 오직 서부 독일에서만 기반을 얻었다. 재정을 통한 자극과 재분배라는 개념은 이 조처가 전후에 확보했던 호소력과 유효성 대부분을 잃어버린 시기인 독일 통일 때까지도 동독엔 도달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독이 자본주의로 바뀌면서 나타난 산업 규모 축소는 적자재정이라는 개념의 평판을 훨씬 더 떨어뜨린 전례없는 빚더미를 촉발했다. 이런 비관론은 과거 동독 지배정당인 사회주의자통일당의 후계자이자 국가 사회주의 실패를 대표하는 정당인 민사당(PDS)이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민사당은 아직까지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지만, 번영의 이름을 내걸고 나타났으나 실업과 경제 침체를 유발한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불만만큼은 여전히 분명히 드러낸다.

 

'일자리와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과 민사당의 지역적 한계를 인식한 두 정당 지도자들은 둘이 뭉침으로써만 연방 차원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분명히 제기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결론냈다. 이 점은 순수하게 선거 차원에서 볼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당들은 총 투표의 5% 문턱을 넘어야 하는 탓에, 두 정당이 독자적으로 선거전을 펼치면 둘 다 실패하겠지만 연합해서 선거에 나서면 성공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

 

동부에선 국가 사회주의 역사라는 부담을, 서부에선 복지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부담을 안게 되는 두 조직의 연합은 주요한 전진을 대표한다. 이는 주류 지배 언론의 신자유주의적 논평자들의 광적인 분노가 증명한다. 역사가 어두움을 드리우긴 하지만 이 좌파 연합의 전망은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한 노동계급의 거부가 꾸준히 성장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연합이 떠오른 바로 그 시기에, 여론조사는 독일인 다수가 자본주의적 유럽 헌법을 거부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연합은 격렬한 논쟁 속에서 태어났고 신자유주의적 논평자들의 히스테리는 분파적 좌파의 독설적 비판과 조화를 이뤘다. 좌파의 비판은 완전히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합이 현재 자본주의의 경제 침체, 사회 양극화, 감지된 정치적 대안 부재에 실망한 많은 이들을 끌어들일 듯 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두 당은 9월18일 총선에서 득표율 8.7%라는 큰 성공을 거뒀다. : 옮긴이) 이런 실망과 함께 나타난, 더 공평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소망은 결국 동독과 서독에서 겪었던 노동의 옛 실패에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번역: 신기섭

2005/11/21 16:59 2005/11/21 16:59
댓글1 댓글
  1. EM 2006/07/08 02:52

    잘 봤습니다. 좋은 번역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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