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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

<경계도시2>를 봤다. 이 영화 진짜 나쁘다. 아니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럽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지금은 감정이 앞서기에 정리해서 쓸 상황이 아니지만, 잊지 않으려 간단하게 기록해둔다.

 

1. 이 영화는 2003년 ‘송두율 사건’을 다루면서도 송두율 교수의 진짜 목소리는 전혀 전달하지 않는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은 고독한 ‘경계인’을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외면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2. 영화를 보고나서 많은 사람이 불편해하고, 괴로워하고, 반성하나본데, 당사자(또는 피해자)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하는 ‘반성’은 ‘음란하다’고 할 만큼 기괴한 짓 아닌가? (개인의 문제로 볼 게 아니라며, 운동을 생각해야 한다며 ‘전향’을 강요하는 이른바 진보 인사들의 기만에 충격을 받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모르던 바인가? 애써 보지 않으려 외면하던 진실은 아닌가?)

 

3. 나는 이 영화에서 딱 한가지를 보고 싶었다. 너무나 잘 아는 ‘송두율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말고, 경계인을 지향하다 실패한 인간 송두율의 고뇌를 말이다. 하지만 송 교수는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 대신 그의 부인이 단편적이나마 실마리를 던져준다. (경계인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내면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사회라니… 라고, 경계인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조금 더 기울게 되는 상황이라는 게 있다… 라고)

 

4. 그래도 남는 의문이 있다. 왜 송 교수는 마지막 대책회의에서도 입을 다물었나? 반면에 그의 부인은 어떤 힘 덕분에 말하고 저항할 수 있었던 걸까? 부인이 마지막까지 저항해 남편을 지켰는데,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모든 게 바뀌어 버렸는가? 그리고 ‘2003년 서울의 송두율’은 극악스럽게 몰아치는 좌·우파의 공세에 무방비로 당한 희생자일뿐인가? (도무지 이 영화는 이런 의문들은 따지려 들지 않는다. 게다가 감독은 송두율 교수의 말을 들을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뒤 그저 ‘레드 컴플렉스’라는 상투적인 틀에 ‘허깨비 송두율’을 풍경으로 끌어다 놓을 뿐이다.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분노가 치민다.)

 

5.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한가지를 깨달았다. 그건 한국이 송두율을 어떻게 ‘우리’로 받아들였는지(거부한 게 아니라!) 하는 것이다. 그 답은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거리 기자회견장에서 항의성 질문을 던지는 어떤 남성이 잔인하리만치 실감나게 들려준다. “이 나라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 살려준다.” ‘우리’로 받아들이는 행위, 그래서 “살려주는” 행위는 너무나 끔찍하고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행위다.

 

마지막으로 2003년 만들어진 <경계도시>에 대해 쓴 짧은 글의 맨 앞부분 세 단락을 덧붙인다.(2003년 3월에 영화도 보지 않은 채 청탁을 받아서 썼던 글인데, 뒷부분은 <경계도시2>가 나온 지금엔 무의미해서 생략한다.)

 

*-----*

<경계도시>가 던지는 질문

 

나는 송두율 교수를 잘 모른다. 영화 <경계도시>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어찌 하다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무슨 글을 써야할지 막막했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만큼은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인 셈이다.

 

<밥, 꽃, 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울산 현대자동차의 구내식당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이 정리해고된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지난 2001년 울산영화제에서 상영을 거부당했다. 감독들은 이 영화의 상영 거부가 울산 지역 운동단체들에 의한 검열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이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감독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밥꽃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고, 지난해 3월 서울에서 1천명정도의 관객을 모아 상영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나 또한 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밥, 꽃, 양>과 영화 제작팀인 라넷을 지지한 것은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아주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지한 건 노조나 운동단체들의 편견과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할 권리, 침묵당하던 식당 여성노동자들이 자신들을 드러낼 권리, 이 사회 전체에 대한 성난 외침의 자유,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그 내용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하 생략)

 

2010/05/04 23:48 2010/05/04 23:48
43 댓글
  1. luxnox 2010/05/05 09:22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보고 싶다는 호기심보다 앞서서 이제껏 보기를 미루던 영환데, 1번 읽으니 보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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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보라. 2010/05/05 19:25

    밥,꽃,양은 또박또박 흐트러짐 없이 이야기를 전해주었지요. 지금 오늘 긴박했던 만큼 절실했던 이야기들이 휘발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당시 마음 속 가둬 놓았던 답답함과 어쩔 수 없음은 여태 고스란히 남아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 마음 알 수 없게 된 세상이라지만 곱씹어 생각해 보면 언제는 그렇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근래 개봉한 다큐멘타리 영화 두 편 일부러 보러 갈 마음 들지 않아 발걸음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를 지옥이라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지옥을 본 사람이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회한과 통곡으로 오랜 시간을 묵묵히 살아온 어떤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책과 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경계도시를 보지 않았으니 영화에 대해 뭐라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밥,꽃,양 이야기가 나와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오래전 사람들 머리가 콘크리트로 가득 차 있을 때, '밥,꽃,양'과 '여성 100인위'는 사람들을 식겁하게 했지요. 뭐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이 대다수 였지만. 요즘도 물론,당연히 그렇겠지요.

    번역 작업 이야기를 들으니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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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5/05 22:52

      책과 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는 말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책이나 영화가 점점 더 망가지면서 사람들을 더욱 이상하게 몰아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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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음... 2010/05/05 23:53

    기대와 다르다고 나쁜영화라 하시면 만든 사람은 정말 할말 없어져요.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손가락 끝의 때가 더럽다 하시면... 전 만든 사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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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oya 2010/05/06 12:44

    저도 <음...>님의 말씀에 동감! 다큐라는 작업에서 이야기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건을 함께하고 기록하지만, 사건이 어느정도 정리되면서, 어떤 이야기를 꾸릴 수 있는지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또 저는 4번에서 말씀하신 그 순간에 감독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다큐작업자는 사건을 바라보며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건에 강하게 섞여있는 사람이기도 하잖아요. 그것이 모든 다큐의 딜레마가 아닐까요. 근데 저는 그런 순간에 주인공(여기서는 송두율 교수)을 더 철저하게 대상화하여 이야기를 더 '착취'하는 것은 결코 좋은 다큐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다큐감독도 아니고. 그렇게 한다면, 그러니까 거리를 두고 현장을 전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뉴스와 다르지 않을 듯. 다큐는 결국 감독의 이야기. 그러면에서 이런 딜레마는 다큐에 필연적이지 않을까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 때 무슨 생각이었나? 되돌아봤는데. 별로 기억나는게 없더라구요. 어쩌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지라 나의 어떤 층위에서 그 기억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결국 이 영화가 호평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송두율 교수 본인의 이야기는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에 있을 것 같은데, 영화본 이 후 급관심상승했지만. 시간관계상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어서, 추천해야할지 말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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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5/06 18:25

      영화평 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논하자는 것도 아니구요.

      아마 제가 글을 쓸 줄 몰라서 전달이 안된 모양인데, 저는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 겁니다. “왜 ‘송두율 사건’에 송두율이 빠져있느냐?”고 말입니다.

      저 영상 기록에서 딱 한사람, 송 교수의 부인만 저 질문을 제기합니다. 송두율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삶은 한국의 누구도 따져보려 하지 않으면서, 한편에서는 ‘간첩’이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사과하라’고 하느냐고 절규하잖아요?

      게다가 7년이 지나고도 상황은 그대롭니다. ‘송두율을 빠뜨린 채 ‘송두율 사건’을 되돌아보는 행위’, 저에겐 엽기적인 행각으로만 비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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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음... 2010/05/11 14:30

    저도 경계도시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무조건적으로 지지받는 모습들 속에 정작 송두율이라는 인간의 소외가 의외였습니다. 말씀하신 지적의 의미는 잘 알고 있었구요. 하지만 감독 또한 작품을 공개한 이후에는 해당작품에 대한 권한이 손을 떠난 후일텐데 의도에 기초한 반영과 표현이 온당했는가 아닌가를 따지기 보다 원래의 의도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영화외적인 소통은 불가능하다 보거든요. 그런 의미의 덧글이었습니다. 언짢으셨으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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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5/12 09:47

      언짢고 말고 할 일은 아닙니다. 그저 지칭하는 바를 분명히 하자는 거죠.

      한마디 덧붙이자면, 제가 첫번째로 문제제기하는 것은 저 영화의 의도 또는 태도입니다. ‘지식인’(지식인뿐인지 모르겠으나)의 영화 수용은 두번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영화부터 ‘송두율을 소외시킨다’는 게 제 주장의 핵심입니다. (영화의 의도가 뭐가 됐든, 그게 ‘송두율 사건을 통해’ 어떤 걸 보자는 것이니 필연적으로 ‘인간 송두율’을 거쳐가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는 게 제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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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J 2010/05/12 10:58

    개인적으로, 다른건 모르겠고, 영화를 보고나서, 송두율 선생은 좀 나이브하고 선생의 부인 정정희 여사는 강건하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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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5/12 14:03

      그래요. 잘 관찰하면, 사태의 실마리는 부인(정정희씨인가요? 저는 이름을 몰라서...)에 맞출 때 드러날 수 있다고 느낄 것 같은데... 정정희씨의 무엇이 그를 버티게 해주고 왜 오직 그이만 저런 태도를 지키는지, 참 궁금한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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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경계도시.. 2010/09/09 15:20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가 송두율을 소외시킨다고 하셨는데, 과연 영화가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것인지,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2003년의 한국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인지는 구별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송두율이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경계인이 발언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송두율의 '진짜 목소리'를 전달하는 다큐멘터리가 나온다면, 오히려 그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에 대해 의심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현실을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영화로 환원시켜서, 존재하지 않는 '덜 실망스러운' 현실을 상정하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 필요한 것은 "'경계인'을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외면하는' 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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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경계도시.. 2010/09/09 15:50

    2003년과 2010년의 현실이 같냐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사태가 일어난지 7년이나 지난 후 개봉하긴 했지만 제 생각에 그 7년은 2003년의 현실을 말하기 위한 토대가 형성되는 기간이었습니다.우리가 경계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더 많은 (꼭 시간과 비례하지는 않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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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0 09:51

      제 말은 ‘우리’ 또는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한국’처럼 모호한 이야기 말고 ‘이 영화’에 대한 겁니다. ‘이 영화’는 분명 송두율의 목소리를 빼먹고 있습니다. 물론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겠죠.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한국을 보여주려 하더라도 여전히,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소외를 다루는 영화이기에, 영화 또한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게 ‘윤리적으로’(영화적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문제 제기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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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0 09:55

      한마디만 덧붙이면, 실제로 영화는 의도적으로 송두율을 피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단독 인터뷰 기회가 있었으나, 정면으로 송두율과 맞서는 걸 회피하잖아요? 제겐 아주 징후적인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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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경계도시.. 2010/09/10 11:28

    음, 네 제가 어쩌다보니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군요. 저도 이 영화의 윤리적인 측면을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marishin님이 말하는 '단독 인터뷰 기회'를 중점으로 왜 이 영화가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닌지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경계인 소외'는 단순히 경계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인 소외'는 오히려 경계인에게 경계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조중동 및 한국의 운동진영마저 송두율을 소외시켰다고 할때의 소외란 그에게 경계인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marishin님이 5.에서 말하셨다시피 그를 어떻게든 '우리'로 편입시키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가 송두율을 소외시켰냐고 물어볼 때, 우리는 과연 영화가 송두율을 '우리'로 편입시켰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살핌에 있어서 카메라의 자백, 자신이 레드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백은 대단히 중요한 지점을 차지합니다. 만약 '단독 인터뷰 기회'에서 카메라가 송두율을 대면했더라면, 카메라도 어떻게든 송두율을 '우리'로 편입시켜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카메라의 자백, 당시 송두율의 심리적 상태, 엄연한 현실을 고려할 때 그 상황에서 카메라가 질문을 할 때 뜬금없이 '경계인으로서의 송두율'을 소환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송두율 또한 '경계인으로서의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카메라가 송두율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태도는, 역설적으로 송두율에게 말을 걸지 않음으로써 (침묵하는) 경계인을 소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침묵하는) 경계인을 소환시킨다는 것은 또한, 경계인을 침묵하게 만든 '우리'를 소환하는 행위였습니다. marishin님은 2.에서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고 반성이 가능하냐고 물어보시지만,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은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이 영화의 윤리적 기능은 여기서 나타나는데, 바로 '애써 보지 않으며 외면하던 진실'을 '우리'에게 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가 듣지 않았던, 우리가 소외시켰던 송두율을 영화가 대신해서 들어주고, 대신해서 받아주는 것은 그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7000원짜리 면죄부를 획득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불과하다고 봅니다. 송두율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소외시키지 않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 영화의 몫이 아니며, 영화는 바로 우리에게 우리의 몫을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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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경계도시.. 2010/09/10 11:46

    아.. 댓글 수정이 안 되네요. 마지막 문단에 조금 추가하겠습니다.

    '영화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 영화가 송두율 내지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고, 소외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은데 영화 혼자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영화한테 요구할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도 하나의 윤리일 수도 있겠으나,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또한 윤리이며, 특히 카메라마저 레드 컴플렉스에 사로잡혔던 송두율 사건의 경우에는 후자의 윤리를 선택하는 것이 나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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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1 20:58

      저로선 납득하기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1. “카메라가 질문을 할 때 뜬금없이 '경계인으로서의 송두율'을 소환했을 것 같지는 않으며”라고 하셨는데, 왜 “뜬금없”다는지도 모르겠고, 왜 도대체 영화가 송두율을 정면으로 대하면 ‘우리로 편입시키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당연시하시는지도 모르겠군요. 감독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는, 카메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상식입니다.

      2.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은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아도 가능합니다”라는 말도 참 당황스럽군요.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이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면 그게 반성인가요? 그런 반성의 내용은 도대체 뭔가요? 그런 반성은 잘해야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좀 무서운 생각이 드는군요.

      3. “현실적으로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은데 영화 혼자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영화한테 요구할 수 없다”는 말도 전혀 납득안됩니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동성애 영화는 어떻게 가능하고 이주민 영화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현실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하는 영화라면(물론 다른 형식의 행위라도 마찬가지지만) 발언을 들을 여건이 되어있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발언할 때 더 효과적일까를 고민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말씀하시는 이야기와는 완전히 무관한 맥락의 이야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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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경계도시.. 2010/09/12 02:34

    1. 한국 사회에 레드 컴플렉스가 만연한 이유가 단순히 한국인들이 바보이며, 우익의 전략이 탁월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레드 컴플렉스 너머에는 분단이라는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는 그 현실을 지속시키는 물질적 기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2003년의 한국 사회에서 송두율을 담아내는 카메라 역시, 그 현실의 물질적 기초라는 토대 위에 서 있을 것이고 그런 이상 레드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2003년의 레드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질문은 2003년의 카메라가 처해 있는 물질적 기초에 의해 한정됩니다. 물론 감독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카메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게 되지만 감독의 생각이 감독이 서있는 물질적 기초와 무관하게 발동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레드 컴플렉스를 지속시키는 물질적 기초에 서있는 카메라가, 갑자기 레드 컴플렉스에서부터 자유로워져서 송두율을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부당 전제라고 봅니다. 카메라가 레드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논증이 필요합니다.

    2.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당혹스럽습니다. 예컨대 marishin님이 저에게 말을 하시는데(그 말은 저에게 컴퓨터 게임을 덜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컴퓨터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marishin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저 marishin님이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저는 marishin님이 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더라도,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marishin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저 자신의 태도에 대해 반성할 수 있습니다. 송두율 사건에서 우리는 분단이라는 현실 하에 레드 컴플렉스에 매몰되어 경계인으로서의 송두율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카메라가 그의 말을 부당하게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는 우리가 레드 컴플렉스에 사로잡혀 그의 말을 부당하게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기 위해서 꼭 송두율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바꿔서 marishin님의 시각에 충실하게 한번 사건을 바라보겠습니다. marishin님에 따르면 영화는 송두율의 말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marishin님에 따르면 우리가 반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송두율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송두율의 말을 들을 수 없었던 영화 관람객 중에서 송두율 사건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marishin님은 그것은 반성이 아니라고 하시고 그 근거로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 않았다'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이 당사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반성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의 말을 들어야 반성이다'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주장에 불과하지, 주장에 대한 근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사자의 말을 들어야 반성이다'라는 것에 대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저는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아도,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할 수 있다'라는 것에 대한 근거로 marishin님이 언급하신 '반성하는 자'들을 들겠습니다. marishin님이 이 주장을 기각하시려면, marishin님이 본인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대셔야 합니다.

    3. 저는 '소수자에게 말걸기'도 하나의 윤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도,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담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윤리이자 영화적 가능성이라는 것이며,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영화한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한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영화가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동성애 영화는 불가능하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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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경계도시.. 2010/09/12 02:45

    추가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댓글 수정 기능을 넣어주시면 안 될까요?

    2. 영화는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을 이끌어냈고, 이제부터 당사자의 말을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반성의 내용은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레드 컴플렉스에 함몰되어 있던 우리의 태도'가 되겠습니다. '레드 컴플렉스에 함몰되어 있던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는 것이 어째서 이기적인지, 어째서 무서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논증도 부탁드립니다.

    3. 현실에 대해 발언을 하는 영화라면 현실적 여건, 즉 물질적 기초를 따지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가, 노동자가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여 자본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물질적 기초에 따른 노동자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대로 발언할 수 없는 노동자가 마치 제대로 발언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기만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꼭 다르라는 법은 없습니다. 송두율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시피 노동자도 자기의 처지에 대해 발언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유창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층위에서 분명 기만을 부린 것입니다. 만약 송두율이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하는 다큐멘터리가 기획되었더라면, 그것은 2003년의 송두율이 처해있던 현실을 완전히 은폐하는 것이며, 2003년에 그토록 비이성적이었던 관객에게 7년이 지난 지금 송두율의 이야기를 듣게끔 하여, 관객이 7년 전의 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죄의식을 매우 쉽게 풀어버리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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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경계도시.. 2010/09/12 02:55

    또 추가합니다. 더 생각을 정리하고 댓글을 하나로 달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설령 marishin님의 말이 다 맞다고 친다면, 카메라는 왜 송두율의 말을 담지 못했습니까? 카메라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요? 카메라의 의지가 부족해서, 카메라가 송두율을 소외시키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카메라의 생각은 2003년의 '우리'와 전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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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경계도시.. 2010/09/12 23:12

    아, 댓글 수정은 marishin님이 일부러 그렇게 설정해놓은 줄 알고 marishin님에게 부탁한 거였습니다. 제 불찰이 있었군요.

    적어도 송두율이 소외당하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는 점에서 서로 공감할 바탕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방법론적 접근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공감할 바탕이 서로 전혀 없는 것 같'다고 하시는 건 악의적으로 느껴집니다. 송두율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윤리적인 방법이 딱 하나는 아닐텐데 말입니다.

    여하간 일단락을 지으시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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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3 09:52

      송두율을 소외시키지 말자는 지점에서 공감의 여지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제가 유치한 수준은 아닙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시선의 “절대적” 비윤리성을 지적하며 그것이 바로 송두율을 또다시 소외시키는 것이라는 주장과, 여건이나 한계를 고려할 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도리어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는 주장 사이엔 공감의 여지가 없다는 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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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경계도시.. 2010/09/13 10:27

    개인적으로 제가 9월 12일 23시에 단 댓글은 대답이 필요한 댓글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도리어 marishin님께서 하신 대답이 제 원래 댓글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으로 느껴져 항의의 뜻에서 댓글을 추가하겠습니다.

    marishin님이 그런 '유치한 수준'의 말을 했다고 판단했다면, '공감할 바탕이 서로 전혀 없는 것 같'다는 말이 틀렸으며 그것이 틀린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틀렸다'고 한 것이 아니라 '악의적이다'고 했습니다. marishin님도 공감할 바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전혀 없는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marishin님과 저의 대화를 중단시키겠다는 악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악의적으로 느껴'진다고 한 것입니다. 그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marishin님의 원글이나 댓글에서 왜 "경계도시2"가 절대적으로 비윤리적인지에 대한 논증이 없거나 부족합니다. 이것이 공감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지 단순한 입장 차이가 공감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marishin님은 주장만 할뿐, 그 주장을 입증하지는 않으십니다. 저는 분명히 첫째, 카메라가 어떻게 자신이 처한 물질적 기초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둘째, 왜 당사자의 말을 들어야만 반성이 가능한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marishin님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marishin님이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설명하셨다면 제가 제 주장을 수정하거나 철회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도 저와 marishin님간에 입장 차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감할 바탕이 서로 전혀 없'다고 하면서 대화를 중단시키는 것은 marishin님의 불성실한 논증과정을 '입장 차'로 환원시키는 악의적인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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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marishin 2010/09/13 12:30

    어떤 대답도 안했다니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1. “첫째, 카메라가 어떻게 자신이 처한 물질적 기초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이미 이렇게 답했습니다.
    --- “감독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는, 카메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상식입니다.”
    --- “현실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하는 영화라면(물론 다른 형식의 행위라도 마찬가지지만) 발언을 들을 여건이 되어있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
    이렇게 말한 게 잘 이해가 안된다고 하실 수는 있습니다. 자세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이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간 것은, 이 문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를 들어 찍고, 편집하고, 나레이션을 넣고 하는 행위는 모두 영화감독 개인의 결단이자 자기 시각의 표현인 주체적인 활동입니다. 그리고 예술 행위에 있어서는 ‘물질적 기초’나 ‘사회적 여건’에 도전하고 그 한계를 거부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주체적인 활동도 길게 보면 ‘물질적 기초’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지금 이야기되는 것과는 맥락이 전혀 다른 이야깁니다.) ‘사회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니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옹호는 사실 옹호가 아니고 감독에 대한 모독입니다. (통속적인 대중영화를 찍는 감독일지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낼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해야 한다는 게 아주 난감하군요.

    2. “둘째, 왜 당사자의 말을 들어야만 반성이 가능한지를 물었습니다.”에 대해 저는 이미 이렇게 답했습니다.
    ---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이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면 그게 반성인가요? 그런 반성의 내용은 도대체 뭔가요? 그런 반성은 잘해야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좀 무서운 생각이 드는군요.”

    *-----*
    이 또한 이보다 더 긴 설명이 별로 필요없는 내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제 답변 속에 있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보면 명백해지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 질문이란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이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면 그게 반성인가요? 그런 반성의 내용은 도대체 뭔가요?”

    이건 간단한, 논리의 문제입니다. “송두율의 말을 듣지 않은 건 잘못이니, 이 잘못을 스스로 돌이켜 살피(반성)면”, 이 돌이켜 살피는 행위의 내용은 뭔가요? 당연히 송두율의 말을 들어야겠다는 거죠. 이게 무슨 논증이 필요한 이야깁니까? 반성의 진정성 문제지. 잘못(말을 듣지 않은 것)을 뉘우치기 위해 그 잘못(말을 듣지 않는 것)을 되풀이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걸 어떻게 더 자세히 “논증”합니까?

    3. 마지막으로 악의적이냐 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더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만 두겠다는 것이니, 이런 행위가 악의적이라고 느끼시면 악의적인 거겠죠. 어차피 저는 이번에 한 말보다 더 자세히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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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경계도시.. 2010/09/13 14:04

    아, 제가 직접적으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어떠한 (후속)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여나 오해가 있을까봐 '논증이 없거나 부족합니다'라고 표현했었습니다. 글을 보다 세밀하게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 첫번째 지점은 오히려 굉장히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군요. 예술의 미학성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니까요. 통속적인 상업영화 감독한테서 '물질적 기초' 운운하면 당연히 화낼 것입니다. 상업영화야말로 그런 물질적 기초를 깡그리 무시하는 환상을 스크린에 충실하게 담아, 그 환상을 대중에게 팔아먹는 것니까요. 송두율 사건의 물질적 기초를 깡그리 무시하는 상업영화란, 송두율이 갑자기 AK 소총이라도 들고 조중동 기자들을 다 쏴죽여버리고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입장을 말하자 온 국민이 감동받아 송두율을 동정하는 그런 영화겠지요. 이런 영화는 두고두고 절대적으로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의 윤리란 자신의 물질적 기초를 직시하고 그 물질적 기초에 함몰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행위겠지요. 그래서 거기서 약 두가지의 윤리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한 것인데, 하나는 자신의 물질적 기초를 반영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물질적 기초를 외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즉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있겠으며, 또 하나는 그 물질적 기초의 한계를 짊어진 채 일종의 말걸기를 시도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신뢰하지 않지만 그 가능성은 열어둡니다.

    "경계도시2"의 경우, 2003년의 촬영 도중 그 물질적 기초에 함몰되어 카메라 자신조차 자신의 물질적 기초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뻔했는도 불구하고, 물질적 기초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서 거기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는, 즉 어떤 미학적 틈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송두율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시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처했던 물질적 기초를 우리로 하여금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반성케 한다는 것입니다.

    2. 이 반성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다음 지점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겠지요.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그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과거의 잘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2003년에 소외당하는 송두율을 보여주고 있지, 2010년에 소외당하는 송두율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 어디에도 2010년의 송두율은 없습니다. 오로지 2003년의 송두율이 있지요. 이미 한 잘못을 보여주는 것이 그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반성이란 자기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는 일이며, 자기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기 위해 카메라에 비친 과거의 자기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는 것보다 효과적인 것이 어디있습니까? 참고로 '반성'은 영어로 'reflection'입니다. 본질적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이라는 것이죠. 이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자기 행위를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진대, 자기 행위를 돌아보기 위해 도대체 왜 반드시 송두율의 말을 들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반성을 한 다음 하는 행동이 송두율의 말을 듣는 것이지, 반성을 하기 위해 송두율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가 송두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카메라가 혼자 실컷 반성했다고 관객 앞에서 뽐내는 것이지요. 영화가 반성한다는 건, 송두율을 소외시켰던 자신의 시선을 관객에게 고백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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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경계도시.. 2010/09/13 14:10

    2. marishin님의 글만을 보자면 분명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송두율의 말을 듣지 않은 건 잘못이니, 이 잘못을 스스로 돌이켜 살피(반성)면”, 이 돌이켜 살피는 행위의 내용은 뭔가요?

    >여기서 돌이켜 살펴보는 행위는 송두율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송두율의 말을 들어야겠다는 거죠.

    >그 다음, 즉 자신을 돌이켜 본 다음 송두율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marishin님은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 = 송두율의 말을 듣는 것'으로 등치시키고 있습니다. 잘못된 등식입니다. 돌이켜 살피는 행위는 자신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지요. 자신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돌이켜 살피는 것이요. 이것이 선행되어야 송두율의 말을 들을 수 있지요.

    그렇다면,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 = 송두율의 말을 듣는 것'이라면, 송두율의 말을 듣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송두율의 말을 듣게 됩니까? 영화가 강제로 듣게 만들면 갑자기 그 말이 들립니까?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이야기군요. 그럼 marishin님에 따르면 누군가가 반성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강제적 우연'이 반드시 필요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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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경계도시.. 2010/09/13 14:22

    2. 살려달라는 피해자의 말을 듣지 않고 피해자를 죽인 살인자의 반성은 불가능하네요? 말을 듣지 않았던 대상이 이미 죽어버려서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수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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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marishin 2010/09/13 15:40

    1. “첫째, 카메라가 어떻게 자신이 처한 물질적 기초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하시는군요. “틈새라는 게 있다고.” 맞아요. 틈새 정도가 아니라 얼마든지 여지가 있어요. 그러니 이제 이 문제는 마무리됐죠? (그 틈새가 침묵이라고 보시는 거고, 반면에 저는 ‘그 여지’라는 건 레드 컴플렉스 따위는 무시하고 사람들이 준비가 되어 있거나 말거나 송두율의 말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서 듣는 것이라고 보는 차이가 있지만. 다만 이건 더 논할 여지가 없어요. 좁힐 수 없는 시각 차이니까요.)

    2. 반성의 문제. 이건 서로 시각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강제로 듣게 만들면 갑자기 그 말이 들립니까?”라고 하셨는데, 왜 영화 이야기를 관객 이야기로 바꿉니까? 첫번째는 영화의 시선이고 감독의 태도지, 관객이 아닙니다. (이 점은 제가 보기에 대체로 일관되게 보여주시는 태도인데, 저는 납득이 안돼요.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다큐멘터리 영화의 윤리 문제를 제기했지, 관객의 윤리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을 것이냐 아니냐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게 부차적이지 않은 사람은 흥행을 지상 과제로 생각하는 대중영화 감독이겠죠.)

    그래서 먼저 영화가 송두율의 말을 듣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동성애자 영화의 첫번째는 영화가 동성애자의 말을 듣고 그들의 모습을 있는 대로 보는 겁니다. 이주민 영화 또한 이주민의 모습을 최대한 가감없이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구요. 이게 안되면 ‘동성애자’, ‘이주민’은 구체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그저 ‘배경’이 되고 맙니다. 이것만큼 비윤리적인 행태도 별로 없어요.)

    물론 영화가 2003년에 개봉됐다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7년이나 지난 뒤에 ‘송두율’을 다루는 영화가 ‘송두율의 말’을 한마디 듣지 않는다면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영화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가 아무 정치적 고려없이 편집된 영화도 아니에요. 이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어요.
    (형숙이가 경계도시2를 다 만들었는데 '우리 안'의 민감한 부분도 있고 해서 공개하기 전에 함께 보고 의견을 나누고 싶다고 한 게 한 게 언제더라. 출처: http://gyuhang.net/1803 )

    저 영화를 다시 한번 보세요. 과연 감독이 송두율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지 하는 관점에서... (이건 제가 영화를 앞에 놓고 한 장면 한 장면 보면서 설명하기 전에는 납득이 안될 문제이니, 더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정말 댓글을 더 달지 않겠습니다. 말로는 서로 넘을 수 없는 문제라는 것만이 분명해졌으니까요.

    (여담인데, 살인자 이야기는 농담이시죠? 살인자의 반성의 핵심은,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살인을 반성하는 거잖아요.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핵심이라면 그건 살인자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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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경계도시.. 2010/09/13 16:02

    오해가 있는 부분만 풀겠습니다. 관객의 반성은 marishin님이 2.에서 제기하신 것이었고 저는 처음부터 거기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살인자도 농담아닙니다. 송두율 사건도 '소외시킨 것'의 부분으로서 '말을 듣지 않은 것'이고 이 구조는 살인에서도 같습니다.

    여하간 반성 문제에서 관객에서 카메라로 반성의 주체를 옮긴 건 marishin님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글의 2.를 근거로 관객의 반성을 말했습니다. 제가 9월 10일 11시에 단 댓글을 보면 반성 문제를 이야기할 때 분명히 '우리'에 대해 말합니다. 이건 솔직히 불쾌하지만 뭐.. 더 따지기 지겹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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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3 16:10

      아, 이 부분은 제 잘못이 있군요. 물론 저 부분을 썼지만, 그 이후 댓글에 대한 주 관심은 ‘영화’였기에 제가 간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보는 사람 문제를 영화와 동일시한 측면은 있는데, 이는 영화를 보고 반성한다는 건 ‘영화의 시선’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본 탓입니다. 사실 저 영화를 본 사람들 모두가 영화의 시선에 동의한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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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경계도시.. 2010/09/13 16:12

    관객의 '반성'을 '음란'하다고 한 본인의 글을 보란 말입니다. 그게 관객의 윤리를 따지는 것이지 영화의 윤리를 따지는 것입니까? 지겨워서 안 따지려고 했는데 인터넷 창 닫기 전에 원글을 읽는 순간 화가 나네요. 그러고선 저더러 왜 관객 이야기를 하냐고 비난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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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경계도시.. 2010/09/13 16:13

    댓글 못보고 달았습니다.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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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3 16:15

      다만 우리의 대화 중간에 제가 제 의도를 분명히 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초반에 “제 말은 ‘우리’ 또는 ‘송두율을 소외시키는 한국’처럼 모호한 이야기 말고 ‘이 영화’에 대한 겁니다.”라고 한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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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3 16:20

      그리고 이에 대해 두번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 네 제가 어쩌다보니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군요.” 그래서 전 그 이후에 계속 영화 이야기만 한 겁니다. 적어도 우리 사이에 오고간 말들에서 제가 말바꾸기를 한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기록으로 계속 남을 테니, 분명히 하자는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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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경계도시.. 2010/09/13 16:27

    아.. 그 말은 정말 부적절한 변명입니다. 영화를 '우리'와 분리시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만약 그러고 싶으셨다면 원글의 2.를 인용한 제 문제제기를 논점이탈로 바로 기각시켰어야지 거기에 대해 이해가 안 가서 기각시킨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뿐더러 marishin님도 '당사자의 말을 들어야 반성이다'는 본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반성에 대해 말하는 마당에 그것이 관객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 좀 웃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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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3 16:41

      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죠?

      우리의 대화에 한정하면 맨 처음에 덧글을 두개 쓰시자 마자 제가 바로 ‘기각’(?) 했잖아요? (나는 ‘영화’이야기하는 거라고..)

      그리고 반성의 문제는 일반론으로 번진 측면이 있죠. ‘말을 듣지 않는 반성이 과연 반성이냐’는 말로 말입니다. 이렇게 제 문제제기가 요약되니, 자연히 관객도 배제되지 않게 된 거구요.

      이 긴 이야기의 끝이 결국 제가 말을 바꿨느냐를 인정하느냐 아니냐라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냥 제가 “우리의 대화 도중에도 말 바꾼 걸로” 하겠습니다. 저에겐 달라지는 게 없지만 님께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으니, 제가 인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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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경계도시.. 2010/09/13 16:44

    분명히 하자는 차원에서 저도 몇마디 더 하겠습니다.

    첫째, marishin님은 원글의 2.에서 관객의 윤리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9월 10일 9시에 단 댓글에서는 "제 말은... '이 영화'에 대한 겁니다.'라고 하십니다. 이 발언은 marishin님 본인의 원글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말바꾸기'입니다.

    둘째, 저는 '영화'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지, '영화'가 '관객'이나 '우리'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까지, 그래서 '관객'과 '우리'를 배제한 채 '영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셋째, 원글과 댓글에서, '반성'이 나오는 맥락은 오로지 관객에 대한 것밖에 없습니다. '영화'에 대한 반성 이야기는 한번도 진행된 적이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제 말은... '이 영화'에 대한 겁니다.'라는 선언 하나가 marishin님이 말하는 모든 내용이 다 영화에 대한 것이라는 보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marishin님이 9월 11일 20시에 단 댓글은 제가 '반성'이라는 의미를 사용하는 맥락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때, marishin님 역시 관객에 대해 말했든가, 제 맥락을 무시한 채 부연설명 없이 '반성'에 대해 말했든가 둘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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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9/13 16:48

      1번은 제가 이미 인정한 부분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도 했고.

      2번은 전혀 다른 논점입니다. 적어도 저는 댓글에서 일언반구 해본 적 없는 이야기죠.

      3번은 님께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 같으니, 제가 인정하겠다고 이미 답했습니다.

      이제 정리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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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경계도시.. 2010/09/13 16:46

    저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저는 marishin님이 말을 바꿨다는 말을 먼저 꺼낸 적도 없습니다. marishin님이 주체를 '옮겨왔다'고 했지, 이것이 말을 바꿨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marishin님이 말을 바꾸지 않은 것에 대한 강박이 있으신 것 같길래 추가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말을 바꿨다'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marishin님이었습니다. 저더러 왜 말을 바꿨냐고 따지셨으니까요.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제'가 바뀐 것입니다. 왜 제가 그런 것을 의도했다는지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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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