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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나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은 드물고, 내가 남에게 이와 같이 묻는 일도 거의 없다.
하 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이 어느 대학 나왔는지는 나의 관심사다. 묻지는 못하지만, 누가 "그 사람 어느 대학 나왔대"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무의식적으로 아주 짧은 순간에 아주 효과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추측할 수 있다.
신 기하게도 어떤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어떻게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알게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하거나, 대학시절에 운동한 이야기, 속해있던 조직 들을 이야기 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A는 서울대를 나왔대"
'머리가 비상하구나. 뭘 하건간에 탁월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겠어'
"B는 연세대를 나왔대"
'우수하겠지만, A만 못하겠구나'
"C는 동국대를 나왔대"
'무난하겠지만, A보다는 한참 못하고 B보다도 못하겠구나'
"D는 대학을 안 다녔나봐"
"독특한 사람이네"
위와 같은 사고과정이 머리속에서 일어날때는 위에 서술된 것처럼 명확하고 극단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덜하고 어떤때는 심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마치 움직이는 안개에 속의 구조물처럼 언제는 드러났다가 언제는 감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다.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완전히 똑같은 LEVEL TABLE을 가지고 있다. 1. 서울대 2. 연고대 하는 식의 레벨표를. 이 레벨표는 a.법대, 의대 b.경영, 컴공 하는 식의 하위카테고리도 가지고 있다. 이 레벨표상의 나의 위치는 정해져 있다. 이제 상대의 위치만 알면 나의 입에서 나오는 작게 터져나오는 감탄사(와우 혹은 음.... 혹은 에이)를 결정할 수 있고, 상대와 나 사이의 권력의 좌표도 완성된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자라고 있는 사람중에서 학벌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
진보진영도 예외는 아니다. "그 활동가는 관악 학생회장이었고, 그 활동가는 지방대를 다녔다더군"
"그 진보적 교수는 지방대 교수지만, 서울대를 나왔지"
"대단하시네요. 그 대학을 나왔으면 훨씬 더 편하게 살 수 있을텐데.. 운동을 하시고.. "
사실 운동권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상적으로, 또 자명하게
표출되진 않는다. 그것은 터부시 되거니와, 그것의
표출은 비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출되지는 않되, 각자 안에서 훨씬 더 은밀하게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학벌주의가 뼛속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직시하자! 운동권인 나도, 운동권인 당신도. 우리 머리속의 학벌주의 관념은 우리를 둘러싼 권력관계의 구조속에서 생산되어 우리에게 이식되었고, 지금 이 순간도 사회속에서, 개인 안에서 가공되고 생산되고 있다. 이것은 노력하여 없애야 할 그 무엇이다.
그것은 마치 남성 지배 구조속에서 자라난 사람이 여성주의를 학습하고, 소통하고 실천하며 내 안의 남성 중심성을 씻어내고 젠더에 기반한 권력관계를 해체해나가야 하듯이, 학벌주의 구조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내 안의 학벌주의 관념을 씻어내고 학벌에 기반한 권력관계를 없애기 위해 실천해야하는 것이다.
언어의 신중한 구사가 필요하지만, 말조심이 전부가 아닌 것 역시 젠더에 기반한 권력관계나 학벌에 기반한 권력관계나 마찬가지다.
집회를 나가면 서울대를 스스로 관악이라 칭하는 깃발을 보곤 하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그것은 대한민국 학벌주의 피라미드의 꼭지점으로서의 '서울대'라는 상징을 거부함으로써 학벌주의 그 자체를 거부하자는 취지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귀여운 애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앗, 이런 논쟁적인 발언을....ㅠㅠ)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 본질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서울대'라는 깃발을 '관악'이라는 깃발로 바꾸어 들고 있으면, 그것을 들고 있는 이의 마음이 다를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다를까? 아니면, 학벌주의 구조와 권력관계가 해체되는가?
'서울대'를 '관악'이라고 바꾸어 칭하는 것은 칭하는 이들 각자 스스로가 학벌주의 관념을 머리속에서 씻어내려 노력하고, 한국의 학벌주의 구조를 바꾸려는 실천을 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학벌에 기반한 권력관계가 억압임을 직시하고 깨어 나가자. 그 노력과 실천도 다른 노력과 마찬가지로 진보진영 운동권에서 시작하자
댓글 목록
C급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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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관악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학벌주의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네요...-_- 사실 서울대 학생들은 학벌주의에 관해선 별생각이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동숭동 세대와 차별화를 두고 싶어한다는 말도 있고, NL은 서울대라 하고 PD만 관악이라 한다는둥, 연건 캠퍼스랑 거리를 둔다느니 말은 많은데 실제 이유는 모호해요~ 여튼 요지에는 찬성합니다 ㅎㅎ부가 정보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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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이라는 호칭이 더 어이없는 자신감과 자만감의 표현으로 들림.부가 정보
고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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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란 간판없이 어떤 집단에 참여한다는 게 스스로도 특이한다고 느낍니다.그래선지 시간이 지날 수록 적극적이고싶지가 않아지죠.
그들은 아니라지만 끼리끼리가 느껴지거든요. 진보던 보수던 다...
서글프죠. 대표적인 거부반응 단어가 386
광고성 블로그를 제외한 진보넷 블로거의 99%도 대졸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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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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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생들은 학벌주의에 관해서 별 생각이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말이네요. 남성들은 남녀차별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별에 대해서 예민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반대로 여성인 저는 신경질적이라는 핀잔을 들을 만큼 예민합니다. 왜냐하면 그 폐해를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죠. 그래서...항상 가진자들은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같네요. 학벌주의의 혜택을 비교적 많이 받는 서울대 학생들 부터 학벌주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부가 정보
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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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관악'이라는 호칭에 뭐 그렇게 거창한 뜻이나 내막이 있는 것은 아니고, 연건캠퍼스하고 관악캠퍼스하고 구분하는 차원에서 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뭐 아님 말구...)'청년실업'을 이야기할 때 사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청년'이 대졸자들임은 다들 아실 겁니다. 이 땅에선 실업자를 이야기할 때도 대학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죠. 고졸실업, 중졸실업, 국졸(초졸)실업 이야기는 없죠. 학력이 없고 학벌이 없으면 이 땅에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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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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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사실 소위 일반대학에서의 학창시절이라는 것이 2년에서 4년이고, (5, 6년인 경우도 있지만) 인생에서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닌데, 어떤 사람의 삶을 절반 이상 규정한다는 게 정말 놀랍단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적으로 차별을 겪든 역차별을 겪든 그런 문제보다도, 제가 놀라웠던 건 스스로가 '어느 대학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하게 형성하잖아요.(자부심이고 뭐고를 떠나서) 정작 그 조직에 몸 담았던 시간은 2~4년 뿐인데 말이죠.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알엠 말에 공감 한 숟갈 더.)
(거기다 '관악'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지역명을 고유명사화하는 행위는 사실 좀 우스운 부분이 많다고 봄. 소위 여러 '명문대'들이 그 지역의 이름을 걸고 있다는 것으로 봐도 그렇고, 특정 클래스를 '강남 사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짓이 아닌가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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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엠님 말씀에 공감 하나 더 추가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