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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믿어지지 않는 장난앞에서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깨지면, 세상이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내 삶을 보다 더 명확하고 치열하게 다룰 생각이다.
고난이 나를 단련시킬 것이다.
<우츄프라카치아 中>
사람들은 늘 권력의 그늘을 못벗어나는것같다..
집안도 그렇고 학벌도 직장도 그리고결혼도,,
난 우리나라 결혼시장을보면 참으로
미셀푸코가말한 "권력의 역학관계" 를 절실하게 느겨진다...
자기보다좋은 가문과 좋은 직장을 꿈꾸는 많은여자들과
또 경제불황시대에 맞벌이를원하는 많은남성들,,,,
이성은 하나의 장식품인가..
어쩌면 이성을 소유함으로서 자기를 드높이고싶다는것은
장신구로 자신을 빛내고싶은 의도하고 일맥상충하는듯하다..
암튼...권력의무서움은
우리 인생사 전반에 침투해있는것같다..
과거 자본주의이전시대에 영주와 농노, 또는 양반과상민 이라는 이미 고착화되버린 권력의
관계가아닌. 유동적이며 그리고 교활한 권력의관계..
언제든지
인간들이 자기들의 노력을통해얻을수있는 그 권력의 역학관계..
그 권력이라는 관계는 단순히 자본주의이전부터 있어왔던 근본의문제같다..
도리어 지금의시대에
생산관계의 역학관계만이 자본주의 모순의 근본이 아니라..
우리들 인생사 전반에 둘러 쌓여있는
그 암울한 계급적시각들..
'
특히나 한국의 현재 경제불황시기에
좋은직장과나쁜직장으로 자신들의 위치가 승격했다거나 하강했다라고
스스로의 線을그어버리는 그 절망의 몸짓들...
어떻게해서든지 신분상승했다라는 의미를부여하며 자족하는모습들..
그런 양태들이
조선말기 양반족보를 사서 흐믓해하는 농노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것은
나의착각일까나..
같은직장내에서도 ,,
권력의 역학관계..
학벌로서,..인맥으로서,, 또 본사와 지사간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
연인사이에서도,,
부모간에도,,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억압이아닌..
생활전반에 스며있는 그런 거머리같은..것들...
하긴 공산주의 종주국 러시아조차
관료계급을 귀족화하여 불렀다는데..
자본주의 첨단을 지향하는 한국이야 말할것도 없지///
좀더많은 공부를해야 할것같다..
예전에 단순히 생산관계 만이 전부인양 생객했던 나의시각도문제고,,
그리고,,
당시 운동이란것은
단순히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와의 문제로만 취급하던 우리학교선배들에게
조금실망이 느껴진다.
아니 사실 실망할틈도 없었다.
2년제라는 캠의한계인지 아님 그냥 당시 전대협말기,한총련의 추종이라는
특수의 상황때문인지, 계급의문제는 늘뒷전이었다.
학교때 술자리에서 한선배(지독히도 통일주의자였던)에게
"노동해방" 이 뭐냐고 물었다가 "잘먹고잘살자." 지극히
합리적인? 대답을 들었을때의오묘한기분?
암튼 이렇게고도로 복잡한 그리고 교묘한...계급테크놀로지사회에서
학교선배들이 그리도 간단한정의로 사회를해석하려했다니..
역시나..NL출신들의 한계인가..
아니 사실 당시 바깥에 단체들도 거기서 벗어나지못하는 단체가 많았다.,
어떤 언더단체는 도무지파가없는 그래서 어떤 일을하는데도
언쟁이 90%를차지하는경우가,,,,
단순히 서구식의민주주의만이 한국사회의 궁극의지향점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진보 세력들의 애틋한 몸짓이려니...
후후,,
군사파쇼독재의 후유증인듯..오로지 박정희,전두환만이 인민의 적 이라고생각
했던,,.
순진성들..
인민의적은 우리들 주위에 널려 있는데..
갑과을..과부장들과사원,..대기업과 소기업.. 본사와지사..
정규직와 비정규직,...
참으로 지배계급은 편할것이다.
예전에는 꼭 대중에게 분리정책을 의도적으로취해야만이 지배했는데
이제는 알아서들..서로가 서로를 계급화하고 분리하니 이얼마나 편한가..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사회계급도 오토매틱 설정이다..
세분화되어있는 ,,그래서 공동의
가치관과 관심사가적은....
그래서 뭉치기도어려운,,
같은 월급쟁이인데도,,
자기와는 다른높은존재라고생각하며 귀족노조라고 욕하게되고,,
그리고 그 귀조노조들도,,우월감에 차있고,,
가끔 Marx와 Budda 가 만나 세상에대해 얘기해보았으면 좋겠다는생각이든다..
공산주의라는 지향점은 과연 새존이말한 화엄의 세계와 맞닿아 있을까..
하는 의문들...
아피곤하다..
회사동기들하고 통영여행 갖다와서
이리도 피곤한생각이나하고 있다니..
나는 장차무엇이 될꼬,,
|
©2006 Kyosu.net Updated: 2006-04-03 12:03 |
필자는 1994년에 ‘초월에서 포월로’를 썼는데, 그 글의 부제는 “새로운 유목성 넘어 새로운 정착성으로”였다. 지금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이었지만 당시에도 이동통신기계의 발달에 대한 찬양이 벌써 고조되고 있던 노마디즘적 상황이었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사람들은 이제 정착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목생활 시대로 들어선 듯하다. 사람들은 일종의 이동성 존재가 된 듯하다. 이름하여 새로운 노마드. 앞으로 한 동안 그런 삶의 양식에 대한 헌사가 쏟아질 것 같다. 그러나 엄격하게 보면, 이 새로운 유목성 혹은 이동성은 우리의 몸이 이제 땅의 무게에서 벗어나 가볍게 이동한다는 데 놓여있진 않다. 그 점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점만을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정착성이 생성된다는 데 있다. 다만, 과거의 정착성은 이동성과 반대되는 소극적인 현상인 반면에, 이 새 정착성은 최고도의 이동성을 확보한 상태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이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매우 느린데도 보통 빠름보다 빠른 더 빠른 상태…가만히 있어도, 가장 멀리 간 상태.”
김진석 / 인하대·철학 필자는 하이델베르크대에서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해석학.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외에서 소내로’ 등의 저서가 있다. |
이정우 교수의 비판을 읽고
김영현(소설가)
고등학교 때 나이 많은 괴짜 고전선생이 있었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 데카르트는 ‘미친 놈’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야말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생각 없이’ 멀쩡하게 잠을 자는 사람을 데카르트 식대로 하자면 ‘없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가 “방법서설”을 읽는 동안에 그이의 그 무지스런 말이 늘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생각한다, 회의한다’(cogito)는 물론 그이가 단순하게 이해해버린 개념과는 달리 매우 복잡하고 논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재의 근거를 ‘회의하는 자기’라는 자기 내부에서 찾았던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적 태도는 내게 존재의 객관성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떤 외연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 정체성은 오로지 신만이 (모세가 떨기나무 뒤의 불꽃을 향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신이 한 대답 즉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가 바로 신의 정의 중 가장 어렵고 완전한 것 중의 하나이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심하는 능력을 가진’ 자기 이성에 근거하여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연 그럴까. 괴짜 고전선생의 무데뽀 적인 단순성이 지닌 진리는 과연 없는 것일까. 단순화는 대체로 오해와 무지, 무지로부터 기인한 용기로부터 출발한다. 이를테면 알렉산더의 칼과 같은 것이다. 매듭을 풀어달라는 질문에 알렉산더는 칼로 매듭을 짤라버리는 것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알렉산더의 무지와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렉산더적 접근법이 때로는 사물을 분명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회색이 지배적일 때는 때때로 무지한 양단논법이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주기도 하는 법이다.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날카로움을 넘어 조롱적이고, 차갑고 경멸적이다. 도사의 눈에 비친 잘못 걸려든 ‘도사 앞에 요령 흔드는 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규석이 짚은 헛다리를, 감히 들뢰즈와 카타리를 논한 오버를, 거침없는 언어로 질책한다. 함부로 철학을 논하는 자에 대한 엄정한 철학 교수의 분노와 푸른 서슬이 느껴진다.
하지만 전공자라면 전공자다운 도량이 있어야 한다. 내가 전문 작가라 하여 내 앞에서 ‘소설’을 논하는 자에게 함부로 화를 부리지는 않는다. 충분히 듣고 천천히 따져서 고쳐주고 바로잡아 줄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주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리석은 비전공자’ 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달을 가르키며 흥분하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 모양을 가지고 흠을 잡아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이 책은 철학책도, 들뢰즈나 카타리를 논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천규석은 60년 초에 귀농을 하여 평생 동안 농사를 지으며 혼자 공부해온 사람이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지켜보았고, 지금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쌀개방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이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이 중의 하나이다. 그가 십년 전에 쓴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나 재작년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쌀의 민주주의>를 보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왔고 살아가는 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가속화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소농 두레 공동체’야 말로 하나의 대안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이번에 이정우가 조롱 섞인 언사로 비판해놓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에서도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정우의 비판은, 하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의 짧은 평문은, 그야말로 내가 이렇게 논해야할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지 의심스럽지만, ‘노마디즘’ ‘들뢰즈’ ‘철학’이라는 것들을 천규석이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하나, 하는 일종의 전문가적 핀찬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전공자는 아니지만, 천규석의 책을 내고 그의 책 뒤에 짧은 언사를 쓴 사람으로서, 그의 비판에 대한 나의 소견을 몇마디 적어보겠다.
먼저 유목주의로 해석되는 ‘노마디즘’에 대한 저간의 ‘허리멍텅한’ 이해와 나아가 몰이해에 대한 이정우의 비판이다. 천규석은 이 점에서 분명한 실책을 범하고 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고 단언하면서 먼저 개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이정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빈정거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나는 한평생 다양한 종류의 담론을 가로지르며 사유했지만, 외국 땅이라고는 나이 45세에 처음 밟아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노마드인가, 정주민인가?’ 그리고나서 그는 나아가, ‘한국에 노마드니 유목주의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정말 ’사유‘해본 적이 있는가? 사유를 하여 글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노마디즘이란 무엇인가?’ 하고 일갈하고 있다. 나는 개념의 엄밀함을 생명으로 하는 철학자다운 그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충분히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천규석의 잘못만은 아니다.
사실 지금처럼 ‘노마디즘’이란 말이 광범위하고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우스개말로는 ‘바람의 딸’이라는 한비야처럼 세계를 싸돌아다니는 것을 노마디즘의 표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고전선생의 말처럼 일말의 진실이 깃들여 있긴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의한 국경을 초월한 정보의 교류 형태나 전환된 사고방식을 의미하기도 하는가 하면, 좀 더 진지하게는 다원주의(pluralism)라는, 이것 역시 매우 복잡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것인데, 철학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진리의 무정형성 (들뢰즈적 표현을 쓰자면 진리의 리좀적 체계라고 하고, 나의 약간 문학적 해석에 의하면 진리의 윈도우적 체계, <도스적 체계에 대비하여>,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과 결부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이런 애매모호한 상태로 노마디즘이 우리 시대를 횡행하는 하나의 유행적 언어코드로 작용한지는 오래되었다. 여기서 천규석이 ‘어떤 노마디즘’을 침략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는 지는 엄밀하지는 않으나 책의 문맥을 통해 대충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다. 천규석이 이해하고 있는 노마디즘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양면의 얼굴을 지닌 세계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작고 가난하지만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유린하고 있는 그 모든 힘을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정우가 굳이 이를 비판하려면 다만 빈정거릴 것이 아니라 (그는 천규석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마디즘을 입에 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못마땅해 하고 있다!), 자신이 먼저 ‘진지하게’ 고민하며 정확하게 정립한 바른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천규석을 비판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들뢰즈에 대한 천규석의 비판에 대한 이정우의 비판이다. 이것은 천규석이 백번 들어도 옳은 지적일 터이다. 적어도 들뢰즈에 관한한 이정우가 틀림없이 ‘선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들뢰즈나 카타리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천규석이 ‘고전선생’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천규석이 ‘오해’한 들뢰즈가 과연 ‘없는’ 것일까. 이정우가 엄밀함으로 천규석이 잘못 읽은 문맥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당신 입 다물어!’하고 감히 소리칠 수 있는 것일까.
들뢰즈가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질 수 없는 철학자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신주단지처럼 철학교수들이 모셔두고 아껴야하는 대상은 물론 아니다. 칠십년대 중반 학번으로 헤겔의 세례를 받았던 (헤겔의 ‘대논리학’과 임석진 교수의 ‘헤겔에서의 노동의 개념’을 번역한 이을호군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헤겔의 전도사였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헤겔과 그의 제자들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더구나 실천을 요구하는 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오는 동안 헤겔이 뿌려놓은 개념은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매우중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한번도 밖에 대놓고 떠들지 않았지만, 그 헤겔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들뢰즈였다. 그와의 만남은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야말로 일대 충격이었다. 문학적 비유로 하자면 태양계라는 진리 체계 (헤겔의 철학 체계)에 살면서 그것을 우주로 생각해오던 사람이 어느날 은하계, 나아가서 초은하계와 우주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자유로움’과 동시에 막막한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나의 순진한 독서에 기인한 ‘오해’로부터 빚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면 나 역시 이정우 같은 이로부터 분노에 찬 ‘무지’에 의한 용기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조금 ‘해방’시켜준다면 우리는 자신의 ‘고백’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엄밀한 개념이 때때로 우리의 사유를 방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는 사유 역시 경험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철학 체계와 만나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는 그 사람의 경험이다. 개념이 ‘유리알 유희’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하여 그것 역시 경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문하는 자들의 독선적 경험이야말로 경계해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용기있게, 사족을 달자면 들뢰즈는 그저 들뢰즈일 뿐이다. 그는 서구 관념론이 이른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자 통로일 뿐이다. 우주와도 같은 막막한 심연 앞에 그는 우리를 끌고 갔지만 그는 자신의 절망을 벗어나지 못했고, 마침내 ‘자살’을 했다. 나는 오히려 전공 학자들, 말끝마다 들뢰즈를 들먹이며 난해한 언사를 늘어놓은 자들에게, 거꾸로 묻고 싶다. ‘너희들이 그의 막막함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느냐?’ ‘ 왜 너희들은 단 하나도 따라 죽은 사람이 없느냐?’
천규석을 굳지 변호하자면 그는 단지 들뢰즈에게 ‘기대어’ 국적없이 돌아다니며 공동체를 마구 해체하고 짓밟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기대어’ 선 곳이 바로 이정우 같은 사람에게 무례하고 무식하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 어디에도 철학책이라는 말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철학에 대한 옹호 부분이다. ‘2500년간 숙성된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전공자의 준엄한 명예선언이다. 누가 감히 철학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가, 하는 투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데 대한 항의라면 길거리에 있는 ‘철학원’을 보고 분개하는 것이 더 맞을는지 모른다. 사실 철학이란 말은 오랫동안 참으로 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스개말로 철학과 학생들은 철학과에 들어갈 때도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면 질문에 시달리다가 졸업할 때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철학을 논리학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헤겔 철학은 헤겔의 논리학이고, 칸트 철학은 칸트의 논리학이며, 불교철학은 불교 논리학이라는 식으로), 어떤 사람은 사물에 대한 설명방식, 혹은 해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정립하려고 애쓴 사람도 있다. 나아가서는 (별로 신통치는 않지만) 생의 지혜,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긴 그 속에 세계에 대한 자기 방식의 이해와 해석이 존재하는 것일테지만.) 어떤 사람은 극히 좁고 엄밀한 체계로서의 형이상학 내지는 메타학을 지칭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천의 고원”이 서구 관념 철학이 최종적으로 이른 하나의 탈출구라는 점에 대해서는, 비록 순진한 오해일는지는 모르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철학’에 대해 우리들이 떠들어대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누구나 조금씩의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면 ‘그것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길거리의 ‘철학원’이 대학의 철학보다 못하다고, 비교거리는 아니지만, 할 것도 하나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한 이정우 교수는 우리시대에 드물게 보는 철학자이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지금처럼 ‘진리의 보편성과 객관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목말라하는 후학들에게 참으로 귀한 지침이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규석 선생은 평생동안 농촌을 지키며 소농공동체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어쩌면 그의 삶은 들뢰즈가 그토록 증오하던 강고한 중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유와 맞닿아있을 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무엇을 고민하고 사유하고 있는지는 참으로 알기 어렵지만 그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진지하게 말을 꺼낼 때는 그가 하고 하는 말의 핵심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예수를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예수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이 말을 하고 다녔다. 처음엔 예수를 측근에서 모시고 경험했던 제자들은 그런 그가 무척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것이 만인의 철학이다. (끝)
홍윤기교수, 이정우 대표에 직격탄… 노마디즘논쟁 가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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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06-06-01 09:00] | ||
경과는 이렇다. 천규석은 그의 책을 통해, 요즘 지식인들이 되뇌는 유목주의(노마디즘),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결국 제국주의·침략주의 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들뢰즈·가타리가 만들어낸 유목주의와 현실에서 유통되고 있는 유목주의는 어째 어긋나 보인다. 박정희 찬양자이자 극우논객으로 꼽히는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가 90년대 후반 ‘몽골벨트 취재보고’ 기사를 연재한 것은 그 징조의 하나였다. 생명사상을 부르짖던 김지하가 유목주의를 언급하는 순간 ‘박정희식 파시즘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도 한 예다. 무슨 텔레콤이니 경제연구소니 하는 곳에서 최신 디지털 기기 좀 팔아보겠다고 ‘디지털노마드’ 운운하는 현상은 또 다른 차원의 예다. ●이정우 “유목주의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 이에 프랑스 철학에 천착해오던 이정우 대표는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를 통해 천규석을 격렬하게 비판했다.‘그것들과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와는 무관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한다.’는 게 요지다. ●홍윤기 “들뢰즈·가타리가 개념 정리 안한 탓” 홍 교수가 비판의 포문을 여는 지점은 여기서부터다.‘알지도 못하면 입다물라.’는 서평은 “도저히 ‘철학한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쓸 서평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원전을 읽고 오랫동안 철학해온 사람만 들뢰즈·가타리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원서 패권주의’이자 ‘전공자 독점주의’다. 비유하자면 “농사꾼이 농사를 아는 사람들만 자기가 농사지은 쌀을 먹으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진지하게 철학하려는 태도만 있다면 약간 미숙하고 불안하더라도 도와줘야지,‘네가 뭘 알아.’하고 쏘아붙일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홍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천규석이 유목주의를 이해 못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마디즘 해설서를 써냈던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조차 ‘명확한 개념정의가 없다.’고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천규석도 들뢰즈·가타리가 핵심개념을 정리해두지 않았다 비판한다는 것이다. 즉,‘개념도 정확히 모른다.’는 이 대표의 비판은 천규석이 아니라 들뢰즈·가타리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은 천규석 아닌 들뢰즈·가타리에게” 홍 교수는 “국가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는 천규석의 급진적 생태주의가, 이정우의 학문권력의식과 철학파시즘 때문에 제대로 해독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내용을 담은 홍 교수의 ‘철학에서의 파시즘과 철학할 권리’는 이번에 발간된 계간지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Copyrights ⓒ서울신문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와 주체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의 얼굴’, ‘접힘과 펼쳐짐’, ‘사건의 철학’ 등이 있다. |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등의 공저와 ‘의사소통의 철학’ 등의 역서가 있다. |
빗속에서 춤을 추는 나무처럼 춤을 추어라!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나무처럼 춤을 추어라!
온몸의 에너지가 춤에너지로 변하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된다.
바람을 따라서 몸을 좌우로 흔들거나 움직여본다.
바람이 그대의 몸을 관통하여 흘러가고 있음을 느껴보라.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나무가 되어 보는 게 어떤가?
온전히 나무가 되어보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나무다!
열린 공간으로 나가서 나무들 사이에 서본다. 그리고 나무가 되어간다.
그리고 나무가 되어간다. 바람이 그대를 관통해 불어오고 있다.
나무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대가 곧 나무가 된다는 것은 굉장한
이완과 기운을 북돋아주는 효과를 낸다.
우리는 누구나 원시적인 그 에너지의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무가 그대 앞에 있다. 나무에게로 가서 대화를 나누어 본다.
나무를 깊게 껴안아주어 본다. 갑자기 잃어버렸던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그대에게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열린 공간인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방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서본다.
그리고 그대 자신이 나무가 되었다고 상상해본다.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대가, 나무가....
춤이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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