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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17
    노예는 어떻게만들어지는가..(2)
    검은눈썹
  2. 2007/08/17
    고난이 나를 단련시킬 것이다.
    검은눈썹
  3. 2007/08/17
    재밌는 논쟁이있어서
    검은눈썹

노예는 어떻게만들어지는가..

강유원 씨글이다...작년에 그가 강의한  "선언"을 읽고

재미있어서 가끔싸이트가는데 

재밌는 사람이다..

  

보니까 수유너머와 이진경을 무던히도 싫어하는것같던데..

나같은 범인이야  한반도에서 내놓라하는 재야 수재들의

논쟁을 그냥 담너머로 즐겨보는것도 재밌는지라..

여기저기 그들의 얘기를 귀에 다주어 담는다. 

가끔나도 제대후에

워하던대로  사회대학을가거나 독일유학을 갔으면 어떻게되었을까 하는아쉬움이든다..

그넫 어쩌랴,,

지금 그냥 이걸로도 좋다..

뭐 제도권이 가르쳐주는거 이상으로 날 만들어나가면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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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marius.net 에서 퍼옴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21세기에는 '창의력 있는 인간', '자발적 인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교육해 나가는 인간',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로운 창조자만이 이 시대에 살아남을 이야기는 새삼스러운게 아니다. 어느 기업에서든지 비용절감을 위해서 혼자서 여러가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게 되었고, 계획의 수립부터 실행까지 꿰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즉 아이디어를 내서 그것을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만들고 직접 수행해내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21세기에는 '창의력 있는 인간', '자발적 인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교육해 나가는 인간',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로운 창조자만이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사회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 나가므로 주어진 일만 해서는 금방 도태될 것이며, 그에 따라 자신이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게 이런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논조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운게 아니다. 어느 기업에서든지 비용절감을 위해서 혼자서 여러가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게 되었고, 계획의 수립부터 실행까지 꿰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즉 아이디어를 내서 그것을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만들고 직접 수행해내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실행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반복되는 일을 되풀이 하는 사람, routine laborer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이런 사람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한국은 여전히 낡고 답답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 개조라는 자각을 가지고 기업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구성원 거의 모두가 기업의 요구를 지상명령으로 여기면서도 그것에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창조적인 사람이 되도록 온갖 교육을 다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노예나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다. 창조적인 인간이냐 아니냐는 특정한 지식이나 재주를 가졌다는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태도나 정신적인 자세이므로 주입할 수 없고 몸에 저절로 익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서 창조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려면 한국 사회의 모든 집단들, 즉 가족, 학교, 회사 등에 개인의 개성과 창의력이 생겨나고 발전될 수 있는 멘탈리티가 있어야 한다.
멘탈리티는 정신적인 것을 주입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육체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생겨난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여서 그의 정신적인 것들 역시 육체적인 것의 반복적 습득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 인간의 반대말은 노예적 인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창조적인 인간이 될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노예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노예가 어떤 육체적, 물질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지를 알면 그것을 극복하고 노예가 아닌 존재, 더 나아가 창조적인 존재로 변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듯해서이다. 노예는 우선 몸뚱아리만을 가지고 육체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니 사람으로 취급되지조차 않는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을 하는 주요 목적이 영토확장이었다면 부수적인 목적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 전리품 중에서 노예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고대 사회에서는 농경지에서의 직접적인 생산물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더 나아가 사회 집단의 주요한 부의 원천이었므로 그것을 늘리는 방법은 영토를 확장하고 그 땅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사람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로 부려 먹어야 했으므로 고대 사회에서의 전쟁에서 대량 살륙을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노예가 필요치 않은 경제체제를 가진 집단만이 대량 살륙을 저질렀는데 징기스칸이 이끌던 몽골 군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할 때의 병력이 10만 정도 되었는데 이들은 수레에 가족들까지 싣고 다니면서 싸웠다. 어떤 지역에 쳐들어 갈때에는 기마병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싸움을 끝내고 정벌한 지역을 초토화하며 모든 주민을 죄다 죽여 버렸다. 계속해서 이동을 해야 했으므로 포로를 잡아서 노예로 삼기 보다는 그냥 죽이고 가는게 훨씬 편리했을 것이다.

유목민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족들은 노예획득을 위해 전쟁을 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고대의 전쟁은 오늘날과 같은 총력전이 아니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회에서 높은 대접을 받는 전투집단이 따로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전쟁기에도 평화롭게 생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전투집단이 전쟁에서 지게되면 이 보통 사람들이 노예가 되어 팔렸다. 그러므로 전투집단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존중은 대단했다. 자신들이 노예가 되느냐 마느냐는 이들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말도 잘 듣고, 모든 의사결정을 이들에게 맡기는 삶을 살았다. 전투집단은 농사를 짓거나 생업에 종사하는 일을 천하게 여겼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지배자, 전사 등과 같은 구별은 고대 사회의 이런 신분계층을 잘 보여준다. 또한 전투집단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용기 -- 이것은 좋은 말로 표현한 것이고 사실은 잔인함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 였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나 <<오딧세우스>>는 전사들의 그런 잔인함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전투집단과 보통 사람의 명확한 구별이 많이 없어진 것은 로마 시대에 들어서였다. 로마에서는 시민만이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고, 그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싸우지 않으면 나라가 위험하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신이 노예가 되느냐 마느냐가 특정 전투집단에 달려 있는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고대 사회의 패권을 거머쥐고 천년의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면서 동시에 그러한 책임에 걸맞는 권리를 가진 시민들의 공동체가 그것이다.

로마 제국의 쇠망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제국 말기의 용병들도 그 원인을 차지한다. 말기로 들어서면서 제국의 방어는 더이상 시민들에게 맡겨져 있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직업군인제도가 생겨서 좋았겠지만 로마를 로마답게 했던, 시민의 권리와 책임에 근거한 공동체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제국 말기의 로마 시민들은 전투집단에게 자신의 생존을 의존하는 반노예상태였던 것이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을 필요가 없어진 것은 사람이 노동력의 주요한 원천이 아니게 되면서부터이다. 물론 사람은 중요한 노동력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능력있는 사람'만이 주요한 노동력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중요한 노동력이 아니게 된 것은 제법 되었다. 공업이 발전하고 기계가 사람의 노동력을 상당 부분 대치하게 되면서 사람 값은 계속 떨어져왔고, 그것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극소수의 사람, 즉 '창의력 있는 사람'외에는 쓸모있는 사람 취급을 못받게 된 것이다. 21세기가 창의력있는 인간을 요구한다는 것을 뒤집어 말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버려도 된다는 뜻이 된다. 기계가 힘든 일을 대치하므로 육체적인 노동력조차 불필요하다. 그들은 고대의 노예만도 못한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사회 구조와 경제 체제는 대부분의 사람을 폐기처분하고 있다.

지금까지 노예적인 인간을 '노동력'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이제부터는 일종의 정신적 측면에서 이 주제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노예 상태는 자유로운 상태의 반대말이다. 창의력있는 인간이라는 것의 기본도 사실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먼저 자유롭지 않으면,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고 머리 속에 아무리 창의적인 생각이 있다해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다면 그 생각은 무의미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 창의적인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않게 된다. '창의적인 인간'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가능하고 그런 까닭에 자유로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이라 하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한다' -- 맞는 말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반대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즉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권을 남에게 넘기고 그냥 하루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모습, 그것도 개인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힘있는 사람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는게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신경써서 앞뒤를 재고 선택을 해야 하고,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골치아픈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몸이 피곤해지기 십상이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칠 위험마저 있다.

구체적으로 누가 위에 있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을 듣고 사는 것만이 노예처럼 사는 건 아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이 검증되지 않은채 사회에서 떠돌아 다니는 풍문에 자신의 삶을 맡겨서 사는 것도 노예처럼 사는 것이다. 뼈빠지게 고생을 해봐서 내린 결론이라면 모를까, 애초부터 '돈이 최고다'라는 말만 믿고 돈독이 오른채 사는 것이라든가, '영어 하나만 잘하면 끝난다'라는 말만 믿고 죽어라 그것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도 사실은 노예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렇게 사는게 편하다. 정말 편하다. 어차피 인생이란게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고,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다. 그러니 뭐 '의미'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하면서 사는 건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도 아니니 대충, 남들 사는대로 사는게 최고라는 생각이 나쁠게 뭐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굳이 인간의 본질은 자유라는 명제를 논증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예상태에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걸 더 좋아하면 그게 더 본질에 가까운게 아닐까? 아무리 그렇다해도 여기서 이야기를 그치면 너무 비참하니까 현대에 들어서 왜 사람들이 노예처럼 살게 되었는가를 따져 보기로 하자.

바로 앞에서 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과 관계있다고 말했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아가려면, 그것도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당장 점심때 뭐 먹을까부터 날마다 선택하는게 귀찮고 번거로워서 아예 메뉴를 정해놓고 배급해주는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이건 뭐 대단한 선택은 아니다. 이에 비하면 선택이 아닌 결단이라 해야 할만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앞으로의 진로, 결혼 시기, 결혼 상대자, 가족 문제, 직장 생활, 죽을 때 매장으로 할 것인가 화장으로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이게 오늘날 현대 사회의 도시인이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선택과 결단을 할 수 있을까?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고는 선택을 할 수가 없다. 당면한 주제에 대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어림잡아 하다가는 큰코 다친다. 이게 그냥 하는 말인거 같지만 우리의 일상을 잠깐만 돌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버스 하나 타고 내리는 것도 어렵다.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지방 도시에 갔을때 버스 차비가 얼마인지, 교통카드를 쓰는지 아직도 토큰을 쓰는지 모르면 버스 타는 것도 걱정이다. 그러다보면 택시나 타게 된다. 서울에서는 '내리실 분은 벨을 누르시오'라는 안내에 따라 내릴 때가 되면 벨을 누르면 되지만 지방은 어떤지 잘 모른다. 많이 다녀본 사람이 아니면 어렵다.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서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간단한 사용 설명서가 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일상이 이러한데 다른 일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면 도대체 왜 현대인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현대 사회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 또는 다양하게 분화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선택과 결단을 많이 해야 하며 그것에 필요한 정보의 양이 많아지며 사람들의 머리는 복잡해지고 몸은 그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이 이렇게 복잡해지는데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사람이 아무리 환경에 잘 적응하는 존재라지만 이렇게 급변하는 것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현대 사회에는 온갖 이상 심리적 증후가 난무한다. 흔히 하는 말로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그걸 해결하기가 어려워졌다. 자신의 머리와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아지다보니 의존성이 더 심해졌다. 알콜중독자가 늘어나고 점보러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등도 문명의 발달과 사회의 분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과연 현대 사회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보기 위해 단순한 사회와 간단하게 비교를 해보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 바로 앞서 있었던 조선 시대를 생각해보자. 조선 시대는 농경사회였다. 거의 대다수의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사짓는 사람과 글을 읽어 관직에 나가는 사람만이 공식적으로 사람취급을 받았다. 농사를 짓는 일이 생업이다보니 알아야 할 것은 농사에 관련된 것밖에 없었다. 사는게 어려울게 없다. 하늘이 잘 도와주면 농사는 잘되는거고 관리들이 괴롭히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한 세상 살만했다. 자기 머리를 굴려서 결정해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결혼은 집안에서 시키는대로 하면 되는거고 아이는 생기는대로 낳으면 되는거고, 그 아이들 교육도 새삼스럽게 시킬게 없었다. 조금 크면 들판에 일나갈때 함께 데리고 가면 끝났다. 죽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다 땅파고 묻어주었다. 제사는 자식들이 알아서 지내주었다. 글 읽어서 관직에 나가는 사람들이야 알아야 할 게 많았겠지만 오늘날 알아야 할 것에 비하면 얼마나 되었겠는가? 당대의 석학이라는 퇴계나 율곡이라해도 오늘날 대학에서 교양 과목 수준의 지식이 있었을까. 사회가 단순하다보니 관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토지제도 제대로 만들고, 세금 제대로 부과하면 된다.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사회가 들썩들썩한 것은 그 당시 정치인들의 수준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단순하게 살았던게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불과 100년 전 일이다. 그러다 한국은 느닷없이 복잡한 사회가 되었다. 서양 사람들이라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단순한 사회에서 복잡한 사회로 넘어온 것이 200년이 넘질 않는다. 단순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이 몇가지 되지 않으므로 아주 느긋하다. 나름대로 복잡한 일이 있겠지만 공동체의 어른들에게 물어보거나 아예 마을 회의를 열어서 결정하든지 하면 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세상살이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고 있다. 어른을 공경하는 일이 강요된 덕목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므로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익히지 않은채 나이만 먹으면 집단에서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이런 현상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속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똑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단순 사회에서 복잡한 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면 세계 어디에서는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태인 것이다. 과거 단순 사회에서의 노예가 어쩔 수 없이, 힘에 의해 만들어진 노예였다면 이제 현대인들은 그러한 변화에 쫓아가지 못한채 무기력에 빠진 반 자발적인 노예이다.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급기야는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싶어진다.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위력의 결정과 선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 그저 윗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명령'에 내 머리를 맡긴채 묵묵히 그것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일이 닥치면 우애로써 사람들을 돌보아주던 공동체가 그리워진다. 이거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안좋은 것이다. 이미 먹고 살아가는 구조가 다른데 공동체적 윤리 덕목이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나치 독일의 억압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했던 인간 군상들의 심리를 파헤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룬 책이다. 자유로운게 오히려 힘들다. 그냥 시키는대로 하고 사는 게 편하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문집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에 실린 몇몇 논문들은 일본 군국주의 치하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발적인 노예가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에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명령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소시민이 어떻게 해서 유태인 학살계획을 담담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리하여 아무 생각없는 평범함(banality)이 바로 현대인의 악의 원천임을, 즉 악의 평범성을 증언해주고 있다. 수많은 매스 미디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중들의 의식 조작에 관한 책들도 선택에 직면한 이들의 의식에 노예적인 심성을 심어주는 과정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아무 생각없는 이들이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의 악행마저 세계사적 영웅의 결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21세기적 인간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가 귀찮으면 단순한 사회로 돌아가라.


8 Sep.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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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나를 단련시킬 것이다.

삶의 믿어지지 않는 장난앞에서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깨지면, 세상이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내 삶을 보다 더 명확하고 치열하게 다룰 생각이다.

고난이 나를 단련시킬 것이다.

<우츄프라카치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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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논쟁이있어서

재밌는 논쟁이있어서 퍼왔다..
우리집에도 이진경의 노마디즘이 있지만
손도못대고있다..
해설서라는데
왜이리 난해한지..
 
 
 
無知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
논쟁서평:『유목聆풔?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실천문학사 刊 2006

2006년 04월 07일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이메일 보내기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
‘노마드’, ‘노마디즘’은 최근에 들어와 널리 회자되고 있고 심지어 TV 선전에까지 등장한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유목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유목적’이라는 말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아리송할 때가 많다.


한번 물어보자. 돈이 많아 고민하는 사람이 밤낮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과 월세를 마련하지 못해 밤낮 이사를 다니는 사람이 둘 다 ‘노마드’라면, 이 ‘노마드’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어떤 중학생이 밤낮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세계에 빠져 있다면, 이 학생은 ‘노마드’인가? 늘 자기 골방에 앉아 있는 이 학생이 어떤 뜻에서 ‘노마드’인 것일까? 역으로, 늘 어딘가로 헤매고 돌아다니지만 마음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노마드인가? 도대체 ‘유목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한번 물어보자. 책 뒤 표지를 보니 이 책의 저자는 농사꾼인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는 ‘농사꾼 철학자’라고 씌어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노마드인가? 농사와 철학의 경계를 허물고 ‘농사꾼 철학자’로서 살아가는 노마드, 또는 (역시 요새 유행하는 말로서) ‘하이브리드’인가? 그렇다면 저자는 ‘침략주의자’인가?


또 물어보자. 이 서평을 쓰는 사람은 한 평생 다양한 종류의 담론들을 가로지르면서 사유했지만, 외국땅이라고는 나이 45세에 처음 밟아 봤다. 그렇다면 서평자는 노마드인가 정주민인가?


한국에 노마드니, 유목주의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생각들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말 ‘사유’해 본 적이 있는가? 사유를 해 보고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노마디즘’이라는 게 무엇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천의 고원』을 논하면서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이 “그 어떤 철학교과서보다 지적 유희가 심했고 당연히 더 난해했다”고 말한다. 『천의 고원』을 ‘철학교과서’라고 표현한 것도 참 우습지만,  자신이 “겨우 페이지 수만 넘겨본” 책이 “지적 유희가 심”한지 어떤지 어떻게 판단한 것일까?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지적 유희가 심한 책인가? 저자는 이 책을 읽고서 스스로 “막연한 인상만”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번 물어보자. 도대체 어떤 책을 ‘읽고’서 막연한 인상만 가진 사람이 그 책을 ‘비판’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이 책에는 김지하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 ‘신유목주의’가 언급되고 있고 그것이 ‘비판’되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김지하의 글을 보니 좀 어이가 없다. “자동차, 휴대폰, 노트북, ...” 운운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도대체 이런 것이 들뢰즈/가타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런 것들은 들뢰즈가 ‘관리사회’라고 부른 현대 사회의 기술적 장치들 아닌가? 누군가가는 엉터리로 이야기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비판’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한국적 현상’ 아닐까?


“몽골의 초원길은 가타리와 들뢰즈의 말처럼 홈 파인 가로(街路)가 아니라 사방천지로 다 터진 매끄러운 길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방천지로 다 길을 트면 그것이 더욱 더 홈을 많이 파는 것이 아닌가? 들뢰즈/가타리에게서 ‘매끄러운 길’이라는 말이 도대체 성립하는가? 또 이들이 말하는 공간이 실제 공간만을 뜻하는 것인가?


“이동 마인드가 본질인 그들의 유목주의는 오늘날의 초국적 자본의 세계시장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충분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천의 고원』이 겨냥하는 주적이 ‘세계시장 제국주의’ 아닌가? ‘이동 마인드’라는 표현도 우스꽝스럽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이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가? 이동과 정지가 정도(degree)의 문제이지 어떻게 양자택일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저자는 방안에서 농사를 짓는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초국적 자본처럼 부지런히 옮겨다니자고 했다는 말인가? 초국적 자본이 어떻게 이동 마인드인가? 오히려 그것은 자본으로 모든 삶의 양식들을 포획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분열증은 억압적인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초자아로 벗어나는 탈중심화 과정이기 때문에, [...]” 들뢰즈와 가타리가 ‘정신’분열증 환자인가? ‘정신’분열증 환자가 철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듣는다.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초자아로 벗어나는 탈중심화”? 무슨 말일까? 초자아(=상징계)로 탈주한다? 아이들이 하는 말로 정말 ‘돌아버리겠다’.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파편화되면서 순간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분열된 주체, 즉 분열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과 재생산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이 세계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게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자유롭게 파편화된다”? 파편화되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파편화된다는 것은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 “순간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 들뢰즈가 ‘쾌락’ 때문에 푸코와 결별한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순간적 욕망을 추구하는 분열자가 자본주의를 위협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인간 아닌가! 이게 다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저자에게 묻고 싶다. 농사짓는 것을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명 저자는 펄쩍 뛸 것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에 대해 최소 몇 년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땅을 잘 이해하고 농사의 기본을 익혀야 한다. 도구들 쓰는 것, 계절을 읽는 것을 비롯한 많은 공부들, 그리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 자연에 대한 믿음과 헌신. 농사를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저자에게 말하고 싶다. 사유하고 말하고 글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천의 고원』 같은 책을 읽으려면 최소한 당신이 농사를 짓기 위해 들인 노력만한 노력은 들여야 한다고.


우선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어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하나의 외국어를 자기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잘 알 것이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물론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으며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철학이란 2500년 이상을 숙성해 온 학문이다. 그리스 철학과 제자백가를 터득하는 데에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역사가 2500년이 숙성해 온 학문이 철학이다. 그 끝에 『천의 고원』이 있다. 도대체 저자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나 말하는 것인가?


저자에게 물어보자. 철학이라는 게 무슨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 책 뒤표지에 ‘농사꾼 철학자’라고 버젓이 씌어져 있다. ‘철학자’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구 다마 잘 갈아 끼면 물리학자인가? 찌개를 잘 끓이면 화학자인가? 물건 사고 돈 계산 잘 하면 수학자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와 주체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의 얼굴’, ‘접힘과 펼쳐짐’, ‘사건의 철학’ 등이 있다.


©2006 Kyosu.net
Updated: 2006-04-03 12:03

 

 

철학자들, 노마디즘의 소비화에 一助
논평_노마드 특집(교수신문 제392호)을 읽고

2006년 05월 01일   김진석 인하대 이메일 보내기

혼돈 속의 노마디즘
 
기어코 ‘노마디즘’이 시끌시끌한 혼돈에 빠진 듯하다. 탈근대론의 한 자락과 한 가지를 형성했던 주제가 점점 확대되어, 마치 모든 사회적·국가적 구속을 초월하며 달아나는 사유로 확장되더니, 급기야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 속의 침략주의에 일조한다는 비난을 맞기에 이르렀다.


천규석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해 말한다. “몇 차례의 도전 끝에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유목론이 오늘날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하나의 대안 비슷한 것으로 논의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는 막연한 인상”과,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일 뿐 지속 가능한 생태주의와는 결코 양립할 수없다는 반감”만 남았다고. 이 말에서 그의 논점이 사실은 다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는 유목성을 철학적으로 다른 책에서 별 감흥이나 감동을 받지 못했다고, 무뚝뚝하고 거칠긴 하지만, 직설적 어투로 툭 털어놓는다.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직접 읽거나 인용하지 못하고 그 책에 대한 해설서를 인용하면서 유목주의를 비판하고 비난하려고 했다. 그 방식이 지적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이정우의 냉소적 비평은 바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대로 원전을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에 빠진 것이라고. 이정우의 관점은 여기서 알 수 있듯 전적으로 철학적 관점이다.


그런데 지금 문제되는 ‘유목주의’는 단순히 철학적인 것만은 아니고, 철학적 사상과 문화적·정치경제학적 이미지와 관습들이 뒤엉켜있는 덩어리다. 지적인 사람들은 그 말에 은근히 철학적 혹은 문화적 전위성을 부여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 말을 대충 실용적이거나 비유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사용한다. 여기서 혼돈이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광고카피는 후자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며, 별 문제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은유적 이미지가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범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적으로 중요하거나 심오한 의미를 부여받을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생태주의자가 열렬한 유목주의자가 된다면? 천규석은 한 때 열렬한 생태주의자였던 김지하 같은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텔레커뮤니케이션 유목주의에 열광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울화통이 터졌다고 고백한다.


농사꾼 철학자의 글도 유목주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침략과 파괴를 더 조장하는 시장의 권력을 부추기고 조장한다는 데 있다. 이 논점이 유목주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닐테지만, 생태주의자는 철학적 논의를 휙 건너뛰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생태주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천규석의 주장과 많건 적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도 사실이라면, 유목주의의 침략적 ‘뿌리’에 대해 성찰하는 것도 생각보다는 중요할 터이다.


90년대 초 소개된 탈근대론은 금방 초반기의 저항적이거나 대항적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소비문화를 탈정치적으로 확산시키는 분위기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술이나 매체가 이제 막 무서운 이동성을 보이기 시작한 당시에도, 한편에는 그것의 새로운 의미에 주의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벌써 ‘유목주의’라는 표현은 너무 날렸다. 탈현대론이 소비문화와 겹치는 과정에서 ‘유목주의’는 아주 광범위하고 모호한 문화적 소비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90년대 중반 이후 ‘유목주의’는 애초의 철학적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는 듯했다.

필자는 1994년에 ‘초월에서 포월로’를 썼는데, 그 글의 부제는 “새로운 유목성 넘어 새로운 정착성으로”였다. 지금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이었지만 당시에도 이동통신기계의 발달에 대한 찬양이 벌써 고조되고 있던 노마디즘적 상황이었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사람들은 이제 정착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목생활 시대로 들어선 듯하다. 사람들은 일종의 이동성 존재가 된 듯하다. 이름하여 새로운 노마드. 앞으로 한 동안 그런 삶의 양식에 대한 헌사가 쏟아질 것 같다. 그러나 엄격하게 보면, 이 새로운 유목성 혹은 이동성은 우리의 몸이 이제 땅의 무게에서 벗어나 가볍게 이동한다는 데 놓여있진 않다. 그 점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점만을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정착성이 생성된다는 데 있다. 다만, 과거의 정착성은 이동성과 반대되는 소극적인 현상인 반면에, 이 새 정착성은 최고도의 이동성을 확보한 상태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이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매우 느린데도 보통 빠름보다 빠른 더 빠른 상태…가만히 있어도, 가장 멀리 간 상태.”


그런데 ‘유목주의’가 소비문화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다름 아닌 철학의 이름을 내건 책들이 일조한 것은 아닐까. 한 예를 들면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사상을 대중화하는 성과를 이뤘지만, 동시에 ‘유목주의’라는 이미지로 단순화되기 어려운 책을 대중적으로 부드럽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 등의 책에서 ‘유목성’은 전쟁기계와 함께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핵심적이진 않다. 오히려 ‘전쟁기계’ 개념이 더 핵심적이며, 바로 그 개념에 의지해 저자들은 국가와의 관계를 풀어가려 했다. 아무리 국가의 포획에 반대한다 하지만 ‘전쟁기계’가 동시에 강조되지 않은 ‘유목주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으로 빠지기 십상인 듯하다. 더욱이 이진경은 ‘코뮨주의’를 말하는데, 이 경우 들뢰즈 등이 그렇게 강조한 ‘전쟁기계’의 까칠까칠한 현존은 희석된 채, ‘유목주의’는 부드러운 공동체의 이미지 속으로 포섭된 듯하다. 들뢰즈 등이 강조한 ‘전쟁기계적 노마드’가 일종의 공동체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은 기괴한 일이 아닐까. 이 혼동 속에서, 다시 그 책을 인용하며 유목주의를 비난하는 생태주의자도 지역공동체를 말하니, 기괴함은 배가된다.


‘노마디즘’은 왜 이런 혼돈에 빠진 것일까. 최소한 들뢰즈 등의 탓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포획장치가 강고하다는 경고와 함께, 분명하게 ‘노마디즘’이 ‘전쟁기계’와 합체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들뢰즈를 말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포획장치는 강조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전쟁기계’는 별로 말하지 않곤 했다. 그 결과 ‘노마디즘’은 무색무취한 디지털 소비문화에 포획되거나 혹은 무작정 국가로부터 도망간다는 낭만적 혹은 무정부주의적 뉘앙스를 많이 가지게 된 듯하다. 들뢰즈 등은 유목주의라도 무조건 국가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아니며 행정기계로서의 국가와 결합하면서도 다시, 또 다시, 이탈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로써 ‘유목주의’가 정말 침략적인가, 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정우나 이진경은 그 점을 완강히 혹은 완곡히 부인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나는 오히려 ‘노마디즘’이, 비록 시대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많은 경우에 공격성과 침략성을 띤다고 생각한다.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 실제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또 들뢰즈 해설자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혹은 ‘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하는데, 나는 그것이 들뢰즈 등의 관점을 제대로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본이 끝없이 흘러다니는 욕망임을 분명히 했으며, 꼭 자본주의를 주적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자꾸 확장시키며 한계를 극복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니까.    


그러니 유목주의는 모든 구속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사유이며 침략과 전혀 상관없다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관념성을 깨야 하지만, 유목주의의 침략성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역사 속의 모든 침략적 이동성을 비난하려고만 하는 맹목적 생태주의도 자신의 관념성을 깨야 할 듯하다. 복지사회의 이념조차 통째로 거부하는 ‘지역 자치공동체’가 다소 추상적이고 이상적 이념이라면,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지금 맞서 싸우려는 ‘유목주의’(대중적 이미지로 떠돌아다니는) 역시 비슷하다는 것이다. 흔히 그것은 어떤 공격성도 없이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고 소개되는데, 이 이해는 관념화된 철학의 자기만족이 아닌가 싶다.


침략적 이동성은 오늘날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판단은 단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오늘의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과거의 유목적 침략성에 쉽게 낙인을 찍을 수 없듯이, 현재의 세계화된 이동성에 대해서 판단하는 일도 오늘의 우리에게도 쉽지 않다. 한국인이 뿌듯하게 여기는 한류도 때로는 침략적이다. 국민기업이라는 삼성전자 및 국민은행의 주식을 60~80% 정도 차지한 외국자본이 토종 자본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그렇다면 그 ‘침략적’ 자본을 당장 내쳐야 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김진석 / 인하대·철학

필자는 하이델베르크대에서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해석학.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외에서 소내로’ 등의 저서가 있다.

 

이정우 교수의 비판을 읽고


김영현(소설가)

고등학교 때 나이 많은 괴짜 고전선생이 있었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 데카르트는 ‘미친 놈’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야말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생각 없이’ 멀쩡하게 잠을 자는 사람을 데카르트 식대로 하자면 ‘없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가 “방법서설”을 읽는 동안에 그이의 그 무지스런 말이 늘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생각한다, 회의한다’(cogito)는 물론 그이가 단순하게 이해해버린 개념과는 달리 매우 복잡하고 논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재의 근거를 ‘회의하는 자기’라는 자기 내부에서 찾았던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적 태도는 내게 존재의 객관성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떤 외연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 정체성은 오로지 신만이 (모세가 떨기나무 뒤의 불꽃을 향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신이 한 대답 즉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가 바로 신의 정의 중 가장 어렵고 완전한 것 중의 하나이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심하는 능력을 가진’ 자기 이성에 근거하여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연 그럴까. 괴짜 고전선생의 무데뽀 적인 단순성이 지닌 진리는 과연 없는 것일까. 단순화는 대체로 오해와 무지, 무지로부터 기인한 용기로부터 출발한다. 이를테면 알렉산더의 칼과 같은 것이다. 매듭을 풀어달라는 질문에 알렉산더는 칼로 매듭을 짤라버리는 것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알렉산더의 무지와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렉산더적 접근법이 때로는 사물을 분명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회색이 지배적일 때는 때때로 무지한 양단논법이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주기도 하는 법이다.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날카로움을 넘어 조롱적이고, 차갑고 경멸적이다. 도사의 눈에 비친 잘못 걸려든 ‘도사 앞에 요령 흔드는 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규석이 짚은 헛다리를, 감히 들뢰즈와 카타리를 논한 오버를, 거침없는 언어로 질책한다. 함부로 철학을 논하는 자에 대한 엄정한 철학 교수의 분노와 푸른 서슬이 느껴진다.
하지만 전공자라면 전공자다운 도량이 있어야 한다. 내가 전문 작가라 하여 내 앞에서 ‘소설’을 논하는 자에게 함부로 화를 부리지는 않는다. 충분히 듣고 천천히 따져서 고쳐주고 바로잡아 줄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주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리석은 비전공자’ 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달을 가르키며 흥분하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 모양을 가지고 흠을 잡아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이 책은 철학책도, 들뢰즈나 카타리를 논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천규석은 60년 초에 귀농을 하여 평생 동안 농사를 지으며 혼자 공부해온 사람이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지켜보았고, 지금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쌀개방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이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이 중의 하나이다. 그가 십년 전에 쓴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나 재작년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쌀의 민주주의>를 보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왔고 살아가는 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가속화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소농 두레 공동체’야 말로 하나의 대안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이번에 이정우가 조롱 섞인 언사로 비판해놓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에서도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정우의 비판은, 하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의 짧은 평문은, 그야말로 내가 이렇게 논해야할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지 의심스럽지만, ‘노마디즘’ ‘들뢰즈’ ‘철학’이라는 것들을 천규석이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하나, 하는 일종의 전문가적 핀찬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전공자는 아니지만, 천규석의 책을 내고 그의 책 뒤에 짧은 언사를 쓴 사람으로서, 그의 비판에 대한 나의 소견을 몇마디 적어보겠다.

먼저 유목주의로 해석되는 ‘노마디즘’에 대한 저간의 ‘허리멍텅한’ 이해와 나아가 몰이해에 대한 이정우의 비판이다. 천규석은 이 점에서 분명한 실책을 범하고 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고 단언하면서 먼저 개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이정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빈정거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나는 한평생 다양한 종류의 담론을 가로지르며 사유했지만, 외국 땅이라고는 나이 45세에 처음 밟아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노마드인가, 정주민인가?’ 그리고나서 그는 나아가, ‘한국에 노마드니 유목주의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정말 ’사유‘해본 적이 있는가? 사유를 하여 글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노마디즘이란 무엇인가?’ 하고 일갈하고 있다. 나는 개념의 엄밀함을 생명으로 하는 철학자다운 그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충분히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천규석의 잘못만은 아니다.

사실 지금처럼 ‘노마디즘’이란 말이 광범위하고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우스개말로는 ‘바람의 딸’이라는 한비야처럼 세계를 싸돌아다니는 것을 노마디즘의 표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고전선생의 말처럼 일말의 진실이 깃들여 있긴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의한 국경을 초월한 정보의 교류 형태나 전환된 사고방식을 의미하기도 하는가 하면, 좀 더 진지하게는 다원주의(pluralism)라는, 이것 역시 매우 복잡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것인데, 철학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진리의 무정형성 (들뢰즈적 표현을 쓰자면 진리의 리좀적 체계라고 하고, 나의 약간 문학적 해석에 의하면 진리의 윈도우적 체계, <도스적 체계에 대비하여>,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과 결부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이런 애매모호한 상태로 노마디즘이 우리 시대를 횡행하는 하나의 유행적 언어코드로 작용한지는 오래되었다. 여기서 천규석이 ‘어떤 노마디즘’을 침략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는 지는 엄밀하지는 않으나 책의 문맥을 통해 대충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다. 천규석이 이해하고 있는 노마디즘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양면의 얼굴을 지닌 세계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작고 가난하지만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유린하고 있는 그 모든 힘을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정우가 굳이 이를 비판하려면 다만 빈정거릴 것이 아니라 (그는 천규석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마디즘을 입에 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못마땅해 하고 있다!), 자신이 먼저 ‘진지하게’ 고민하며 정확하게 정립한 바른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천규석을 비판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들뢰즈에 대한 천규석의 비판에 대한 이정우의 비판이다. 이것은 천규석이 백번 들어도 옳은 지적일 터이다. 적어도 들뢰즈에 관한한 이정우가 틀림없이 ‘선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들뢰즈나 카타리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천규석이 ‘고전선생’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천규석이 ‘오해’한 들뢰즈가 과연 ‘없는’ 것일까. 이정우가 엄밀함으로 천규석이 잘못 읽은 문맥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당신 입 다물어!’하고 감히 소리칠 수 있는 것일까.
들뢰즈가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질 수 없는 철학자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신주단지처럼 철학교수들이 모셔두고 아껴야하는 대상은 물론 아니다. 칠십년대 중반 학번으로 헤겔의 세례를 받았던 (헤겔의 ‘대논리학’과 임석진 교수의 ‘헤겔에서의 노동의 개념’을 번역한 이을호군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헤겔의 전도사였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헤겔과 그의 제자들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더구나 실천을 요구하는 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오는 동안 헤겔이 뿌려놓은 개념은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매우중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한번도 밖에 대놓고 떠들지 않았지만, 그 헤겔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들뢰즈였다. 그와의 만남은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야말로 일대 충격이었다. 문학적 비유로 하자면 태양계라는 진리 체계 (헤겔의 철학 체계)에 살면서 그것을 우주로 생각해오던 사람이 어느날 은하계, 나아가서 초은하계와 우주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자유로움’과 동시에 막막한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나의 순진한 독서에 기인한 ‘오해’로부터 빚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면 나 역시 이정우 같은 이로부터 분노에 찬 ‘무지’에 의한 용기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조금 ‘해방’시켜준다면 우리는 자신의 ‘고백’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엄밀한 개념이 때때로 우리의 사유를 방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는 사유 역시 경험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철학 체계와 만나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는 그 사람의 경험이다. 개념이 ‘유리알 유희’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하여 그것 역시 경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문하는 자들의 독선적 경험이야말로 경계해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용기있게, 사족을 달자면 들뢰즈는 그저 들뢰즈일 뿐이다. 그는 서구 관념론이 이른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자 통로일 뿐이다. 우주와도 같은 막막한 심연 앞에 그는 우리를 끌고 갔지만 그는 자신의 절망을 벗어나지 못했고, 마침내 ‘자살’을 했다. 나는 오히려 전공 학자들, 말끝마다 들뢰즈를 들먹이며 난해한 언사를 늘어놓은 자들에게, 거꾸로 묻고 싶다. ‘너희들이 그의 막막함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느냐?’ ‘ 왜 너희들은 단 하나도 따라 죽은 사람이 없느냐?’
천규석을 굳지 변호하자면 그는 단지 들뢰즈에게 ‘기대어’ 국적없이 돌아다니며 공동체를 마구 해체하고 짓밟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기대어’ 선 곳이 바로 이정우 같은 사람에게 무례하고 무식하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 어디에도 철학책이라는 말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철학에 대한 옹호 부분이다. ‘2500년간 숙성된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전공자의 준엄한 명예선언이다. 누가 감히 철학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가, 하는 투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데 대한 항의라면 길거리에 있는 ‘철학원’을 보고 분개하는 것이 더 맞을는지 모른다. 사실 철학이란 말은 오랫동안 참으로 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스개말로 철학과 학생들은 철학과에 들어갈 때도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면 질문에 시달리다가 졸업할 때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철학을 논리학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헤겔 철학은 헤겔의 논리학이고, 칸트 철학은 칸트의 논리학이며, 불교철학은 불교 논리학이라는 식으로), 어떤 사람은 사물에 대한 설명방식, 혹은 해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정립하려고 애쓴 사람도 있다. 나아가서는 (별로 신통치는 않지만) 생의 지혜,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긴 그 속에 세계에 대한 자기 방식의 이해와 해석이 존재하는 것일테지만.) 어떤 사람은 극히 좁고 엄밀한 체계로서의 형이상학 내지는 메타학을 지칭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천의 고원”이 서구 관념 철학이 최종적으로 이른 하나의 탈출구라는 점에 대해서는, 비록 순진한 오해일는지는 모르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철학’에 대해 우리들이 떠들어대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누구나 조금씩의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면 ‘그것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길거리의 ‘철학원’이 대학의 철학보다 못하다고, 비교거리는 아니지만, 할 것도 하나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한 이정우 교수는 우리시대에 드물게 보는 철학자이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지금처럼 ‘진리의 보편성과 객관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목말라하는 후학들에게 참으로 귀한 지침이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규석 선생은 평생동안 농촌을 지키며 소농공동체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어쩌면 그의 삶은 들뢰즈가 그토록 증오하던 강고한 중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유와 맞닿아있을 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무엇을 고민하고 사유하고 있는지는 참으로 알기 어렵지만 그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진지하게 말을 꺼낼 때는 그가 하고 하는 말의 핵심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예수를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예수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이 말을 하고 다녔다. 처음엔 예수를 측근에서 모시고 경험했던 제자들은 그런 그가 무척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것이 만인의 철학이다. (끝)

 

 

 

홍윤기교수, 이정우 대표에 직격탄… 노마디즘논쟁 가세

 
[서울신문 2006-06-01 09:00]
 
[서울신문]“학문 패권주의를 그대로 반영한 비열한 인물평을 쏘아대는 가운데 한국과 지구 사회에서 철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가 망하는 길을, 그것도 그런 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마구 내뱉고 있다.” 한마디로 제 멋에 취해 자기가 무슨 소리하는지도 모른다는 비판이다.‘우아한 말의 성찬’만 있을 법한 철학계에 이처럼 날선 비판이라니, 이거 보통 아니다.‘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천규석 지음·실천문학사 펴냄)에 대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비판에,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가한 재비판이다.

경과는 이렇다. 천규석은 그의 책을 통해, 요즘 지식인들이 되뇌는 유목주의(노마디즘),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결국 제국주의·침략주의 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들뢰즈·가타리가 만들어낸 유목주의와 현실에서 유통되고 있는 유목주의는 어째 어긋나 보인다. 박정희 찬양자이자 극우논객으로 꼽히는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가 90년대 후반 ‘몽골벨트 취재보고’ 기사를 연재한 것은 그 징조의 하나였다. 생명사상을 부르짖던 김지하가 유목주의를 언급하는 순간 ‘박정희식 파시즘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도 한 예다. 무슨 텔레콤이니 경제연구소니 하는 곳에서 최신 디지털 기기 좀 팔아보겠다고 ‘디지털노마드’ 운운하는 현상은 또 다른 차원의 예다.

이정우 “유목주의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

이에 프랑스 철학에 천착해오던 이정우 대표는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를 통해 천규석을 격렬하게 비판했다.‘그것들과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와는 무관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한다.’는 게 요지다.

홍윤기 “들뢰즈·가타리가 개념 정리 안한 탓”

홍 교수가 비판의 포문을 여는 지점은 여기서부터다.‘알지도 못하면 입다물라.’는 서평은 “도저히 ‘철학한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쓸 서평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원전을 읽고 오랫동안 철학해온 사람만 들뢰즈·가타리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원서 패권주의’이자 ‘전공자 독점주의’다. 비유하자면 “농사꾼이 농사를 아는 사람들만 자기가 농사지은 쌀을 먹으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진지하게 철학하려는 태도만 있다면 약간 미숙하고 불안하더라도 도와줘야지,‘네가 뭘 알아.’하고 쏘아붙일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홍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천규석이 유목주의를 이해 못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마디즘 해설서를 써냈던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조차 ‘명확한 개념정의가 없다.’고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천규석도 들뢰즈·가타리가 핵심개념을 정리해두지 않았다 비판한다는 것이다. 즉,‘개념도 정확히 모른다.’는 이 대표의 비판은 천규석이 아니라 들뢰즈·가타리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은 천규석 아닌 들뢰즈·가타리에게”

홍 교수는 “국가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는 천규석의 급진적 생태주의가, 이정우의 학문권력의식과 철학파시즘 때문에 제대로 해독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내용을 담은 홍 교수의 ‘철학에서의 파시즘과 철학할 권리’는 이번에 발간된 계간지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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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홍윤기 교수의 비판(황해문화 여름호) 등에 답한다
"들뢰즈/가타리 반대로 뒤집어 왜곡"

2006년 06월 05일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이메일 보내기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수목형 사유란 나무가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중심으로 끌어들여 동일화하고 포개는 사유, 유일한 중심을 상정한 사유를 의미함-편집자)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와 주체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의 얼굴’, ‘접힘과 펼쳐짐’, ‘사건의 철학’ 등이 있다.


 

 

노마디즘 문제의식, 농사꾼 철학자가 원전 파쇼보다 정확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2006년 06월 05일   홍윤기 동국대 이메일 보내기

▲홍윤기 교수의 글이 실린 황해문화 최근호 ©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서울신문에 보도된 노마디즘 논쟁 관련 기사 ©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등의 공저와 ‘의사소통의 철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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