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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야릇한 선택의 괴로움
양철모의 ‘이등병’에 부쳐

김 우 룡 / 의미의 경쟁, 사진의 문법 역자

나는 우리 이름들이 가진 항렬이라는 근엄한 습속을 안다. 하지만 양철모는 양철도 되고 철모도 되는 약간 희한한 이름이다. 그렇기는 하나 서양 이름 부시(Bush)나 부쳐(Butcher)처럼의 희한함이나 타나카(田中)나 키노시타(木下)같은 일본 이름들의 희한함보다는 양철모의 희한함은 함의적이다. 세상에 양철로 된 철모야 장난감 아니고야 있으리요마는 양철모에는 재료와 제품이 함께 들어있다. 좀 어렵게 말하면 질료와 형상이 함께 섞인 이름이다. 섞인 것에는 또 다른 것도 있다. 서양말에서 주제는 subject이다. 어떤 작업이나 생각의 축약된 줄거리 혹은 표현하고자 하는 요점을 이를 때 이 말이 쓰인다. 그러나 종종 이 말은 작업의 질료가 되는 대상을 지시하기도 하는데, 소위 object와 같은 뜻으로 씌어져서 까다로운 독해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생짜의 대상이 object라면 작가의 선택이 가미된 대상을 subject라 변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양철모라는 이름에는 이런 약간은 깊고, 야릇하고, 헷갈리게 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 무슨 야릇한 시대의 야릇한 군대란 말인가. 한 쪽에선 인민을 굶어 죽이는 사회주의가 있고 다른 한 쪽은 민족과는 무관한 중립의 세계화가 있다(여기서의 중립은 방탕과 통한다). 선군(先軍) 정치의 이상한 사회주의는 민족을 내세우면서 그 민족을 볼모로 자신의 독재를 연명하고, 이제 좀 살게 되었다는 다른 한 쪽 자본주의는 감질나게 주머니 돈만 보여주면서 목적지 없는 유혹을 계속하고 있다. 단재 선생이 인용하던 ‘콩대를 태워 콩을 볶는다’는 옛 중국의 싯귀는 오늘도 이 땅에서 현실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군대와 군인의 일상은 우리에게 예술적 중립이나 탐미적 미학으로 들여다보는 행위를 조금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 하기사 이 땅에서 일어나는 어느 일인들 그러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요는 생짜가 아닌 것을 생짜의 대상만이라고 우김에서 아름다움이 핀다고 믿는 우리 무연한 예술적 아취의 고고함에는 물질과 자본이 무한 성장하리라는 장밋빛 기대가 최면의 난향처럼 서려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군대의 일을 대상으로 카메라를 들이댈 때, 적어도 이 땅의 경우, 이 땅의 군대가 가지는 야릇함에 대한 ‘선택’임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겁먹은 신병들의 모습이 젤라틴을 입힌 은가루에 고정되어 있다. 하루아침에 개인에서 부분품으로 전환된 젊은이들은 강철같은 이 땅의 야릇함에 대해 군소리를 할 수 없다. 유예된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거대하고 동일한 체념이 개인의 상상력을 평균화하는 익명성으로 체화되는 시간들이다. 그 초입에 선 이등병들을 이제는 고참이 되어 출구에 서있는사람이 카메라라는 도구로 고정시키고 있다. 하잘 것 없는 시간에서의 허무한 서열은 권력이 되어 사람들을 얼어 붙이고 있다. 대상들의 얼굴은 한결같다. 한결같음에는 언제나 파시즘의 냄새가 묻어난다. 위압 때문에 상상력을 팔아치워야 하는 세상은 생각하기에도 끔찍하다. 열아홉 장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선택’에서 우리는 이런 끔찍함을 읽어낼 수도 있다. 우리는 감정이라는 내장을 쏙 뽑아내고 생짜 그대로의 대상을 미라처럼 고정시킬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가혹한 요구일 것이다. 무연해지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가.

어찌 보면 작가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던은 선(禪)과 닮았을지 모른다. 마르셀 뒤샹에서 이미 그 전조가 보여진 작가의 부재 증명은 대상 자체에 대한 명징한 이해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에 보다 근접할 때 유의하다. 그것은 자아의 끈을 놓음으로 궁극에 도달하려는 선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없을지 모른다. 짐짓 없어진 듯한 작가의 존재는 사냥감을 노리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 오히려 더 큰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 있기 전의 사진이야말로 그 작업의 대상인 제재(題材, subject matter)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다시, 사진에 있어 포스트모던을 연 것처럼 여겨지는 에드워드 루샤의 말처럼, ‘사진은 그 자체로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고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주유소들’인지도 모른다. 유형학 역시 같은 궤에 있다. 사진이 그것 자체로서 무화(無化)될 때, 사진의 의미가 생겨난다는 이 역설은 지금의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것인가. 드물고 고담한 선의 경지처럼 어렵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이 작업에 서양의 유형학을 끌어들여야 하는 인용적 해석의 괴로움은 이 작업 뿐 아니라 우리 사진의 뿌리 깊은 염병과 잇대어있다. 베끼기 만에도 바쁘고 베끼기 만에도 야무지지 못하다. 만약 저들의 원안적 실천을 있게 한 동기에 대한 학습마저 부실하다면, 그리하여 드러난 표면의 모사에만 그친다면, 우리의 이 이상한 전용 작업(appropriation)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변명될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병장이 되어 제대를 앞둔 작가는 이제 갓 입대한 이등병들을 자신 앞에 세우고 카메라를 견준다. 마치 동물원 우리에 갇힌 짐승들 같다. 슬프고 또 겁에 질린 눈들이다. 삶의 긴 시간에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썩둑 잘려진 한 토막을 이들은 번호 매긴 벽돌로 다시 나누어 낡은 막사 앞 무채색의 그늘에 가지런히 쌓아두었다. 어둠과 어리석음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조금도 앞으로 나갈 줄 모르고 제 자리에서 맴도는 세상의 이쪽 바깥. 그러나 눈감고 입 막고, 갇힌 짐승의 습관을 익히기만 하면 가장 착실히 흐르는 세월이 있는 곳. 가학과 피학이 대물림되는 곳. 논리가 허락되지 않는 복종만의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전형(archetype)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에 우리는 선뜻 이 사진들을 건넬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이 작가는 이 작업의 분깃만큼 성공한 것이다. 이제 이렇게 맺어보자. 관객인 당신은 이 작업에 어떤 반응으로 참여할 것인가고. 당신은 어떤 선택으로 우리의 이 야릇함을 되받아칠 것인가고.

양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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