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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호 투쟁 평가서

현장에서 희망을 여는 노동자회 평가서입니다
제출용 자료와 내부토론으로 결론내린 자료입니다
【노동열사 고 배달호동지 분신사망 투쟁 보고 및 평가회 관련 제출용】
63일간의 투쟁,
누가 감히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평가에 들어가며
배달호 열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온 몸을 불살라 죽음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63일간의 투쟁이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이 투쟁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계승해야 하는가?
투쟁평가는 평가주체에 의해 그 내용이 달라진다. 더구나 그 투쟁이 전국적 쟁점을 이루고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투쟁을 바라보는 입장과 위치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배달호 열사의 투쟁은 대책위, 민주노총, 금속연맹, 금속노조, 지회, 현장조합원 등 여러 단위에 따라 각각의 입장의 차이가 있다.
배달호 열사의 분신은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충격이었지만 금속노조, 금속연맹, 민주노총 등 민주노조운동의 핵심단위에서는 조직의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배달호 열사 분신과 이후 벌어진 투쟁 상황은 현재 민주노조운동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투쟁이었다.
산별노조를 지향한다는 금속노조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일부에서는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였기 때문에 이번 투쟁이 가능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이었나?
배달호 열사는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그리고 손배가압류 철회, 해고자 복직, 노조탄압분쇄 등 두산중공업의 현실, 나아가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을 정면으로 고발하며 분신하였다.
적어도 금속노조의 건설은 기업별 노조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여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투쟁의 중심은 명백히 금속노조여야 했다.
그런데 과연 이번 투쟁에서 금속노조는 주체였는가?
대책위는 “산별노조의 조직력과 집중력이 이번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향후 산별노조로의 확대 강화에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다” “이번 투쟁으로 산별노조가 중요한 교섭의 당사자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평가한다.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금속노조가 이번 투쟁을 위해 비상 대의원대회, 비상총회 등 조직적 움직임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지속적 조직동원이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대책위 집행위에서 지침식으로 하달되는 책임할당식 간부중심의 인원동원이 중심이었고, 대의원이든 중앙위원이든 조직적 의사결정에 따른 현장을 조직하려는 실천적인 활동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금속노조가 투쟁의 중심이 아니라 대책위의 지침에 따른 인원동원 책임단위로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금속노조가 대책위의 이름으로 자신의 책임을 떠넘긴 것은 아니었는가?
금속노조가 실천적으로 현장을 조직하는 투쟁을 이끌어가지 못하면서 대책위가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거나 참가조직들의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로 나가지 못하고 집행위 중심의 정치적 협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구조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의 금속노조가 안고 있는 조합원들의 무관심 ,금속노조 제일주의 등 많은 문제들을 상층부 중심의 교섭력 인정등으로 해결해보려는 조직형식주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연대투쟁에서 모범을 보여준 투쟁인가?
이번 투쟁은 일관되게(?) 투쟁을 회피하고 협상에 의지하는 투쟁이었다. 투쟁의 주체였던 두산중공업지회는 투쟁을 철저히 외면했다. 결국 지역, 전국의 활동가들이 대리투쟁을 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자발적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공식적인 지도부지침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며 누구도 책임의 문제를 비껴가려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총연맹을 포함한 각 조직에서 내부적으로 조직적 참여,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월 18일 투쟁에서는 지도부의 노력과 대중들의 열정이 나타나 연대투쟁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연대투쟁의 에너지를 형식적 투쟁의 압박용 전술로만 받아들임으로서 이후 현장을 조직하기 보다는 동원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일천 결사대 철회의 결과로 연결되었다.
결국 금속노조와 대책위, 민주노총의 지속적인 협상중심의 합법적인 기조는 사실상 연대투쟁의 진출과 확산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손배가압류 총파업 결의, 강력한 연대투쟁을 결의했던 일천결사대 투쟁을 하루 전 날에 타결을 기정사실화 한 지도부에 의해 취소된 사건 !
4/2 총파업의 철회에서 발생한 조직적 혼란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3월 11일 정오까지로 협상 시한을 분명히 정해 놓고 1천결사대 투쟁에 임했는데, 노동부장관이 내려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러한 원칙을 완전히 저버렸으며, 당일 밤 늦게까지 아직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1천결사대는 이미 취소하는 것으로 연락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연 그러한 결정을 한 단위는 어떤 단위인가? 타결도 되지 않았는데 타결이라고 보도한 연합뉴스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1일 밤 10시 일천결사대를 취소해 놓고 다음날 7시 합의할 때 까지 협상에 매달리지 않았는가?!
결국 일천결사대 취소사건은 두산 자본 측이나, 정부 못지않게 대책위, 금속노조가 얼마나 연대투쟁의 확산을 두려워 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대책위는 일천 결사대를 통해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교섭의 압박용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결사대의 조직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사대의 위상과 역할, 활동내용 등에 대한 조합원 조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인원할당식으로 지침이 내려왔다. 그나마 현장에서는 일천 결사대를 열심히 조직하고 있을 때, 지도부에서는 조합원 대중과의 약속은 외면하고 협상용 카드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누가 감히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이 상황에서 이 정도면 잘한 것 아닌가?”에 대하여
우리가 배달호 열사 투쟁평가 할 때 많이 나오는 말이다.
과연 그러한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란 것이 무엇인가? 두산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이 없는 상황을 말한다. 현장의 투
쟁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버텨서(?) 협상을 이끌어 낸 것이 대단한 성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두산중공업에 투쟁동력이 없었는가? 우리는 배달호 열사 분신한 후 며칠간 수백 명에 달하는 현장의 조합원 동지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집회에 참석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왜 시간이 지나면서 투쟁의 현장을 외면하게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두산중공업 지회 집행부가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산중공업은 이후에 폭로된 불법 사찰에서도 드러나듯이 현장조합원들은 엄청난 감시와 탄압의 한복판에 있었다.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현장순회조차 제대로 안하는 집행부, 열사의 시신이 공장 안에 누워있고, 사측의 온갖 회유, 협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제대로된 파업지침 조차 내리지 않는 집행부, 현장의 감시와 탄압을 뚫고 집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조합원들에게 이런 두산중공업 지회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이에 대해 금속노조는 지회 집행부가 문제인데 어떻게 할 수 있나며 투쟁의 책임을 미루었다. 뿐만 아니라 금속노조는 대공장인 지회집행부에 대해 올바른 비판조차 제대로 못하고 눈치보기식의 행동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두산중공업 지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투쟁회피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나가는데 방조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 상황”이다.
결국 투쟁동력이 없었다는 식의 두산중공업 상황평가는 배달호 열사의 분신항거 투쟁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조합원 동지들의 싹을 자르고 뭉개버린 두산중공업지회 집행부의 투쟁회피적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며, 이러한 심각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공장 지회집행부의 눈치를 보면서 끌려다닌 금속노조 지도부의 방기를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2) “이 정도면 그래도 결과가 좋은 것 아닌가?”에 대하여
이번 투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금속노조 차원에서는 그동안 금속노조를 인정하지 않던 두산중공업이 김창근위원장을 상대로 타결당사자로서 합의를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치 두산중공업 조합원들이 그동안 산별노조에 갖고 있던 불신감을 상당부분 해소하게된 근거라도 되는 듯 평가하고 있다.
또 손배가압류에 대한 쟁점화와 제도개선, 연대투쟁에 모범을 보여준 투쟁,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 해고자 복직의 토대 마련, 두산중공업 현장조직력 복원의 토대마련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번 두산중공업 투쟁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개인 손배가압류는 철회되었다. 그러나 40%에 달하는 조합비에 대해서는 합의로서 가압류를 인정하여 노동조합에서는 아직도 조합비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측의 억지에 의해 만들어진 가압류를 노조가 합의로서 인정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다.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발생한 이번 분신투쟁은 사회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두산중공업 사측이 불법사찰, 한중인수와 처리 문제, 재벌상속의 부도덕성 문제, 부당내부거래 등 전형적인 재벌들의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결국 이러한 조건은 흔히 나타나는 시신탈취, 공권력 투입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으며, 최상의 조건에서 투쟁에 임하게 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도 두산중공업 내부의 투쟁동력을 세워내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측과 정부에 대한 협상에 매달리고 그 결과 조합비 가압류 인정, 해고자 일부분만 복직, 불법사찰 등 명백히 드러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재발방지 대책 등이 없는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과연 무엇이 그래도 괜찮은 결과란 말인가?
18명의 해고 동지들 중 5명의 복직합의가 과연 성과인가?
무엇을 근거로 두산중공업 현장 조직력 복원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두산중공업 사측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을 파트너로 인정해서 합의서에 같이 서명해 준 것이 그렇게도 자랑할 만한 것인가?
5. 결론에 대신하여
우리는 지난 60여 일간 눈물겨운 투쟁을 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너무 초라해 허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확인했다. 두산 자본, 그리고 현 정권이 기를 쓰고 배달호 열사의 투쟁을 축소, 은폐시키려 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워던 것은 바로 뻔히 보이는 그들의 작태를 철저히 부숴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투쟁 과정에서 현재 민주노총, 금속연맹, 금속노조 지도부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했다. 철저히 깨져버린 비참한 투쟁을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 “연대투쟁의 모범”으로 미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담함을 느낀다. 결국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는 현장에서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다시 한번 힘차게 투쟁의 출발을 선언해야 한다.
63일간의 배달호열사 투쟁 평가
1. 배달호열사는 왜 분신하였는가?
1)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손배가압류
열사의 죽음은 단지 두산자본의 악랄한 노동탄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속에서 총자본이 휘두른 서슬 퍼런 현장통제의 칼날이 열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한국중공업이라는 공기업이 민영화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산으로 민영화되지 않았거나 설사 공기업으로 유지되었다고 해도 구조조정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현장통제의 강화도 필연적인 것이다.
구조조정에 의한 현장통제 강화는 개별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다. 정권은 언제나 그래왔지만 IMF를 기점으로 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숨김없이 대변하며 구조조정의 선봉대로서 노동자를 탄압해왔다. 나아가 입법부, 사법부는 물론이고 언론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흐름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나갔다.
이러한 것들이 두산중공업에서 현장통제, 블랙리스트, 징계해고, 구속수배, 손배가압류, 식당하도급화, 사택매각 등으로 나타난 것이며, 이는 열사의 유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번 투쟁에서 손배가압류는 사회쟁점으로 떠올랐다.
손배가압류는 멀리 무노동무임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노동무임금은 파업에 대하여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자본의 논리로서 87년에서 89년으로 이어지는 노동자투쟁속에서 노동자들의 파업대오를 분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임금도 없다'말은 다시 말하면 '임금은 노동의 댓가이다'라는 것으로 당시 전노협의 임금인상 투쟁의 기본논리였던 '임금은 노동력의 댓가'라는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자본은 무노동무임금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임금만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파업기간에 대한 손실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파업기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초기에는 조합간부에 대해 손배청구를 하였지만 나중에는 노동조합과 조합원을 직접겨냥하기 시작했다. 손배소송에 이은 가압류는 법과 제도가 얼마만큼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노동무임금에서 손배가압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철저히 자신들의 논리와 통제에 따라
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단결투쟁과 파업을 통해 쟁취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며 생산성향상과 노동자간 경쟁을 통해 자본에게 인정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손배가압류는 단지 법과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의 단결투쟁을 저지하려는 총자본의 전술로 봐야하며, 손배가압류에 의해 빼앗긴 노동자의 생존권과 파업권은 제도개선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총단결투쟁과 총파업투쟁을 복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2) 민주노조운동의 대응
이번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한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열사투쟁 기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게 스스로 '죄인'이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죄값은 개인이 받을 수 있어도 조직에 대한 평가 없이는 과연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는 되돌아 볼 수 없다.
열사가 분신으로 항거한 것은 장엄한 투쟁이었으며, 한 사람의 투사가 이 사회속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적 투쟁의 최후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투사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조직적 투쟁의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병폐가 노동자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가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 이번 열사의 죽음이었다면, 동시에 열사는 민주노조운동속에서 그러한 상황을 뜰고나갈 어떠한 조직적 투쟁의 전망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제기한 것이다.
(1)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통한 구조조정분쇄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비록 결과는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96년 12월 노동법날치기 통과 당시 총파업투쟁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항한 투쟁은 총파업투쟁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그 동력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작년 발전노조투쟁 당시 4/2 총파업투쟁 철회에서 나타난 것처럼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저지시키기 위한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투쟁현장으로부터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임원진 사퇴라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총파업이 철회된 이후의 상황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에 대항한 노동조합의 투쟁은 단일한 대오를 형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본의 분리전술에 따라 각개격파를 당할 수밖에 없다. 전국의 모든 구조조정 사업장은 단위노조, 지회의 고립된 역량으로 구조조정 싸움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년 두산중공업 지회의 47파업에서 두중 노동자들이 감당했어야 할 그 투쟁의 무게가 민주노총의 4/2 총파업 철회와 과연 무관한 것인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 금속노조의 조직형식주의적 전술배치
작년 집단교섭 당시 두산중공업은 집단교섭에 불참하였다. 그렇지만 경남1지부의 경우 집단교섭이 성사된 것으로 보고 두산중공업 지회만 남겨둔 채로 집단교섭을 진행하였다. 집단교섭과 대각선 교섭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투쟁이 형식적 배치로 나아갔다. 금속노조 전체적으로 그렇게 잡아나가게 되었고, 자본은 지회에 대해 더욱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집단교섭과 투쟁은 결국 지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집단교섭은 궁극적으로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집단교섭, 산별교섭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지 올해나 내년에 얼마만큼 많은 사업장에서 사측이 교섭대표를 파견했는가를 기준으로 삼거나 교섭 테이블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산별교섭이 노동자들의 계급적 총단결을 위한 것이라면 현시기 집단교섭은 금속노동자의 단결투쟁을 조직화해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작년 집단교섭의 경우, 금속노조 차원에서 집단교섭이 성사되었다는 형식적 성과를 남기는 것에 무게가 실리면서 두산중공업지회처럼 철저히 고립되어 집단교섭에 응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한 타격투쟁이 형식적 배치로 머물렀다. 이런 상태에서 여타의 사업장은 집단교섭을 진행해버리고 이 집단교섭마저도 원칙도 없이 대각선교섭과 병행함으로써 애초에 상정하였던 원칙과 의미를 살리지 못했다.
즉, 집단교섭을 통한 금속노동자 단결투쟁의 강화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투쟁을 펼쳐나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원칙도 없었고, 투쟁의 계획도 부재하였다.
두산중공업 지회의 경우, 작년 47파업이 투쟁의 전술적 측면에서 올바랐는가 잘못되었는가는 이와 같은 금속노조 전체의 문제점이 우선적으로 지적된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즉, 금속노조가 투쟁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동력이 떨어져 있는 두산중공업 지회가 과연 '자본과 금속노조의 대리전이다'라고 얘기되었을 정도의 투쟁을 감당해낼 수 있었는가의 문제가 평가될 필요가 있다.
(3) 두산중공업지회의 현장동력 부재
두산중공업 내부적으로 보자면, 이후 통합지도부가 탄생하였으나 임단협 타결안에 대해 뚜렷한 평가도 되지 못하고 당위적인 통합지도부의 틀속에서 그 결과는 결국 받아들여지게 됐다. 반면 임단협 타결안에 대한 문제의식은 완전히 묻혀버리게 되었다. 공기업하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탄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도 부재하고 민영화에 대해 그 투쟁을 평가하고 반성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장은 그야말로 얼어붙어 있었다.
한편, 현장활동 부재의 문제는 두산중공업 지회의 문제만은 아니며 대부분의 민주노조가 현시기 공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일부 대공장의 경우에는 대의원의 반 이상을 사측에서 장악한 상태이다. 두산중공업 지회의 현장동력의 문제는 두산중공업 지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민주노조 운동의 현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비롯한 모든 민주노조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투쟁으로 돌파하겠다는 분명한 계획을 가지지 못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사는 어떠한 전망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2. 투쟁의 과정과 타결에 대한 평가
1)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싸움이었다.
이번 배달호 열사투쟁은 현장을 조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소식지, 분향소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도 노력이 없었으며 투쟁의 기간 중에 지역에서 투쟁의 조직화를 위한 대의원대회도 없었으며, 이미 열사투쟁과 무관하게 계획상에 있었던 통합대의원대회에서 안건을 첨가하는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다. 중앙차원에서도 대의원대회 같은 책임성 있는 회의체계를 통한 조직화로 가지는 못하고 전국지회장결의대회로 대체하였다. 물론 여태껏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지역동지들의 철농참가는 성과로 평가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간부들 선에서 머물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조합원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현장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역연대가 간부중심이 철농으로 배치되면서 현장 조합원들을 연대투쟁으로 이끌기 위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철농마저도 초기에 비해 이후에는 거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대책위가 이번 싸움을 현장을 조직하여 그 동력으로써 투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해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정권교체기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중되었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도 노동부장관의 직접중재에 대해 '한편으로는 이번 두산 중공업 문제에 대한 계속적인 정치권에 대한 입장전달 및 조직화가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 내었던 상황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꿈적도 않는 악랄한 두산을 상대로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투쟁방법이나 역량을 통해서 상황을 협상국면 돌파해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뒤가 거꾸로 되어 있다. 지역만 놓고 본다고 했을 때도 현장을 조직하려는 계획과 의지가 있었는가를 분명히 되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신사수투쟁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이에 대한 평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번 투쟁의 중요한 문제는 두산중공업의 현장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였다. 장례식에 조합원 참석을 보았을 때 현장을 살렸다는 성과가 없다. 두산중공업 조합원들은 이번 싸움은 금속노조가 대신 싸웠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데 향후 실제 투쟁이 자신의 문제로 닥쳐왔을 때 나설 수 있겠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 만큼 현장을 조직하는 문제는 절대적인 과제였다.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이 자발적 시신사수를 보아도 초기에 현장을 치고 들어가서 붙으면 가능성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방향성 없고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후반기에는 금속
노조 위원장, 지부 및 지회 임원, 민주노총경남본부장 등이 역할을 분담하여 현장순회와 토론회, 아침조회를 실시하였으나 투쟁의 기조가 분명하지 못한 상태 속에서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노동열사 고 배달호동지 분신사망 대책위는 투쟁대책위로서 금속노조의 위상과 역할이 분명했음에도 대책위가 전국과 지역연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현장을 조직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두산중공업 현장과 조합원의 상태가 이번 투쟁의 한계였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2월달 들어서는 투쟁전술의 배치가 없었으며 고작 노동부 집회가 고작이었다. 노동부집회에서도 그나마 집회 참석자들은 투쟁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대책위가 이를 자제시키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후 지역동지들은 '집회참석하기도 싫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사태로 이어졌다.
2월에 우리가 유리한 국면에서 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정권교체기라는 국면에서 정치권을 이용하려는 방식으로 나가게 되었다. 실제로 대책위 내부에서는 노무현정권에 대한 희망적 기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방식으로 인해 특히 2월에 들어서서 폭로가 대책위의 주요 활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두산자본에 대한 폭로는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손배가압류에 대한 폭로는 그동안 노동자의 삶에 관심도 없던 거대언론에 크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아감으로 인해 손배가압류의 본질보다는 '어떻게 두산은 저렇게 비인간적으로 월급도 안줄 수가 있는가'는 식의 노동자 개인의 고통의 문제로만 국한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열사의 분신으로 이미 손배가압류는 여론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책위의 중심과제는 여론화가 아니라 어떻게 싸움을 조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동정어린 시각으로 한 가장의 죽음, 경제적 궁핍, 한없는 슬픔 등을 다루었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을 뿐이었다. 손배가압류가 노동자의 생존권뿐만 아니라 노조활동의 자유, 파업권, 노동권을 얼마나 침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역대 정권과 입법부, 사법부에 의해 그리고 언론 스스로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여론은 3/12 노사합의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개인가압류는 해지하였지만, 노조활동의 자유와 관련된 조합비가압류의 문제, 해고자복직의 문제, 부당노동행위처벌에 관한 문제 등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조합비 가압류를 인정한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책위의 전술이 가지는 문제점이 그대로 합의안의 한계로 나타난 것이다.
노동부 특별조사가 시작되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기자회견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두산중공업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의 통제가 이완되어 이를 계기로 현장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 계기를 살려서 현장조직화로 나가지 못하였고, 폭로와 고소고발에 그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현장투쟁으로 가자고 했을 때 '과연 그게 가능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장을 조직하는 문제는 그 결과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되었는가와 무관하게 투쟁전술로서 충분히 가능했으며 이번 투쟁과정에서 분명히 성과로 남겼어야 했다. 대책위가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은 대책위의 조직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책위는 참가조직들의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로 나가지 못하고 집행위 중심으로 나가게 되었다. 의사결정이 참가조직과 일선실무단위들의 의견수렴과 토론에 기초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정이 대책위 집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장 투쟁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는 의사결정구조보다는 정치적 협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3/20 총파업은 조합원들의 찬반투표에 의해 결정된 사안이다. 총파업의 조직화는 중앙에서 지침을 내려서 현장에서 투표를 진행한다고 그냥 통과되는 것이 아니다. 현장조합원들에게 총파업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을 시켜야하는 것이며 특히 작년 4/2 총파업의 철회는 조합원들에게 총파업을 설득시키는데 힘든 요소가 되어있다.
총파업을 가결시키는데는 현장에서는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타결과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언제부터인가 총파업 결정은 조합원이 하고, 파업중단과 철회는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 않은 단위에서 알아서 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민주노조의 명백한 의사결정구조의 문제를 시간이 없다는 등의 실무적인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연대투쟁에 대한 평가
비단 우리지역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창지역은 금속노조에서 결정이 안되면 어떠한 사업이나 활동이 집행이 안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연대투쟁을 만들어나가는데 있어 자발적인 움직임이 축소되어가고 공식적인 지도부 지침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려 하며, 누구도 책임의 문제를 비껴가려 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전에는 연대가 활발하던 것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합법화 과정의 시기와 맞물리면서 활동가를 키워내는 틀이 없어지고 교육도 본조에서 강사섭외까지 관장하여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운영위에서 결정나면 지침을 수행하는 것이 지역활동이 되고 있다.
2월25일 경남1지부 홍지욱 조직부장에게 용역깡패들이 폭행테러를 저질렀을 때 지역의 동지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두산중공업 정문으로 달려왔다. 이를 계기로 지역의 연대를 살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지도부의 분명한 방침의 부재로 인해 정문과 중문을 부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본관으로 올라가면 본관이 작살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두번째 문제이고, 그 날 상황은 반드시 본관으로 올라가 본관에서 철야농성을 진행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25일 상황에서 지역동지들은 두산자본에 대한 분노와 함께 투쟁을 이끌고 있는 지도부에 대한 분노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25일 대책위의 무력대응의 문제는 단순한 폭력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이미 열사의 죽음 자체가 경찰과 검찰을 비롯한 정권, 국회, 검찰, 사법부까지 동원된 총자본의 악랄한 보이지 않는 폭력테러에 의한 것이고, 두산자본은 2/24 노동부 1차중재안이 나온 후 대책위가 일정부분 긍정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폭력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두중지회든지 금속노조든지 이러한 상황에서 무력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항복선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25일의 무력대응은 우리 사회속에서 총자본의 강요에 의해 노동조합이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고 필수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합활동과 연대투쟁의 일부분인 것이다.
2/25 당일 농성장은 많은 지역동지들이 자리를 지켰고, 다음날 아침 선전전에도 대개 참석하였다. 그러나 26일 항의규탄집회가 아무런 내용 없이 본관 앞에서 조용히 마무리 집회를 하는 것으로 끝나면서 당일 농성장은 그야말로 썰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텅비어 있었다. 형식적인 철농과 집회로는 지역의 연대를 추동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확고한 투쟁의 기조속에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투쟁에 임해야 한다. 2/25 상황은 새로운 연대투쟁의 조건을 형성시켜 당시까지의 투쟁의 흐름을 바꾸어줄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그러함에도 대책위가 25일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투쟁의 전선을 조직하지 않은 것은 전날 발표된 노동부 1차중재안에 대해 대책위가 조건부거부로 입장을 정리한 것과 직결되어 있다.
조건부거부로 정리한 상태에서 그것이 '조건부거부'인지 '조건부수용'인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향후 일정을 투쟁을 재조직하는 것으로 가기에는 상황이 이미 너무나도 확연한 마무리 협상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즉, 중재안에 대해 얼마를 더 따낼 것인가에 대한 국면이었으며, 대책위로서는 25일 상황이 더 확대되었을 때 그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가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27일 창원 상공회의소 앞 집회가 취소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대책위 평가초안에서는 25일 상황에 대해 '두산중공업 사태를 더 이상 끌고 가기에는 서로가 부담스러운 무거운 과제를 정치권과 노동, 자본진영, 여론에 던져준 계기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1천결사대에 대한 평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천결사대 취소에 대해서도 분명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는 '가장 기본적인 노사자율협상이나 타결의 가능성은 60일을 넘기면서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노동부장관의 중재에 나서는 것을 누구도 마다할 사항이 아니었다. 노동부 역시 사전에 두산에 의사타진을 해본 결과 노조측과의 의견을 좁히거나 타결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재에 나설 계획이 없었지만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중재에 뛰어 들었고, 노동부 장관이 생각하는 타결지점은 노조가 생각한 것 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재협상을 통해서 최대한 유리한 타결로 이끌어 가는
것이 현실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어쨌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중재협상을 임함으로서 그나마 합의안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고 본다'라고 평가를 했는데 이것을 '벼랑끝 전술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책위는 1천결사대를 통해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교섭전술상의 압박용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결사대의 조직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사대의 위상과 역할, 활동내용 등에 대한 조합원 조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인원할당식으로 지침이 내려왔다.이것은 중앙과 현장의 완벽한 괴리현상으로 현장에서는 1천결사대 조직을 고민하고 있을 때, 중앙에서는 협상용 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1천결사대투쟁의 조직화는 현장동력의 복구를 통한 연대투쟁의 위상을 가지면서 2003년 투쟁의 힘찬 출발점이 되었어야 했다.
또한, 작년 4/2 총파업의 철회에서 발생한 조직적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3/11 정오까지로 협상 시한을 분명히 정해 놓고 1천결사대 투쟁에 임했는데, 노동부장관이 내려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러한 원칙을 완전히 저버렸다. 지난 투쟁의 평가를 통해 정한 원칙을 스스로 간단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또한 11일 밤 아직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1천결사대는 이미 취소하는 것으로 연락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연 그러한 결정을 한 단위는 어떤 단위인가? 앞서 말한 대책위의 의사결정 구조는 어떠했는가를 다시 짚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날 12일 새벽, 협상이 결렬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는데 11일 늦은 밤 상황에서 과연 1천결사대를 취소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타결됐다고 보도한 연합뉴스나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타결될 것으로 보고 1천결사대를 취소한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3) 교섭의 비민주성
대책위가 구성되고 대책위의 요구가 확정된 이후 교섭의 과정에서 요구가 구체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요구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공유가 되지 않았다.
대책위 구성조직의 각급 회의단위서는 물론이고 대책위 실무자선에서도 공개되지가 않았다. 특히, 노동부 1차중재안이 나오고 난 이후에 대책위 내에서 조건부거부로 정리된 이후부터 노동부장관의 중재까지의 시기에서 대책위 요구안이 정리되는 과정이 전혀 공유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동부 장관의 중재가 진행되는 도중, 지역방송의 보도에 보도된 내용조차 실제로 대책위가 그런 요구안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초기 대책위 구성시 유족의 동의, 대책위, 지역, 지회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합의한다는 타결에 대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지역차원에서 협상의 마지노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는 점과 노동부 1차중재안에 대한 조건부거부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반성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부장관 중재 당시 내부 혼란으로 단일화되었지만, 협상에 있어 공식적 통로와 비공식적 통로를 동시에 가동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과연 비공식 라인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의 필요성은 있었는가? 비공식 접촉에서는 무엇을 다루었는가? 마찬가지로 비공식적 정치권과의 협상 등에 대해서도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민주노조에서 요구안의 확정과 교섭, 타결과정은 철저히 공개되어야 한다. 이번 대책위의 협상과정의 비공개는 민주노조의 원칙에 따르면 완전히 불신임 대상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4) 합의안에 대하여
합의안은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싸움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개인손배가압류는 해결이 되었으나 여타의 조합활동의 자유와 파업권, 노동권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서는 이번 투쟁의 성과로서 개별사업장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을 성과로 보면서 '쟁의권의 정치사회쟁점화와 제도개선'을 이끌어 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방용석 전 노동부장관의 합법파업발언은 부하직원인 노동부 관료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으며 이번 합의에
서 47파업에 대한 합법여부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단지 방용석 전 장관의 합법파업발언을 놓고서 '제도개선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하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이번 열사투쟁을 통해 개별사업장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은 수많은 사업장의 손배가압류가 실제로 무력화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이 성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열사투쟁이라는 틀 속에서조차 개별사업장의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켰을 뿐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이번 열사투쟁속에서 한번의 토론회를 빼고는 전국의 수많은 손배가압류사업장의 연대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더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며 사실 이 한계가 더 중요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대책위 평가초안에서는 '해고자복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해고자 18명이 모도 부당해고자이고 특히 3-4명 정도는 이번 투쟁이 아니었어도 해고무효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충분히 복직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고자 복직의 문제가 투쟁의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쟁점으로 제기되지 못하고 마무리 시점에서야 논의가 되었다.
따라서 단지 합의안에 5명 복직을 명시했다고 향후 해고자 복직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을 부각되지는 않으며 '해고자 복직의 토대 마련'이라는 평가는 형식적 평가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책위 평가 초안처럼 '비록 합의내용은 부족하였지만 그 동안의 투쟁으로 인해 현장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였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문구에 불과하다.
과연 63일간의 투쟁을 돌아보았을 때, 어떠한 토대가 형성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되어야 한다. 두산중공업 현장동력의 문제는 일관되게 제기된 문제였으며, 타결에 즈음한 시점에서 진행된 두중지회 파업에 확대간부를 포함하여 60여명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번 투쟁을 계기로 소위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번 투쟁에서 가장 정치적 성과를 얻은 것은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자신의 기반으로 한다. 자칫 배달호 열사의 투쟁으로 인해 그러한 정치적 성격이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폭로될 수 있는 위기에서 정치적 협상을 통해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낙관론이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노무현 정권 하에서 민주노총이 단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투쟁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3. 향후과제
열사부인께서는 금속노조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는지, 왜 금속노조의 분명한 방향설정을 하지 못했지를 평가해봐야 한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이번 투쟁을 계기로 인적 물적 집중력, 지속성, 그리고 조직력에 있어서 산별노조의 위력이 발휘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를 구체적 자료와 사실, 지역의 동지들의 평가를 가지고서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책위 평가 초안은 '특히 두산중공업 지회의 경우 조합원들이 그동안 산별노조에 대하여 갖고 있던 불신감은 이번 투쟁을 통하여 상당부분 해소되었다고 판단된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두중지회 조합원들이 금속노조와 대책위에 대해 이전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은 일부분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신 싸워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계급적으로 함께 단결하여 함께 투쟁하는 '산별노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열사투쟁이 끝나고 산별 확대보다 반대현상으로 가고 있다.
산별노조를 표방하지만 열사부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금속노조 위원장이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위원장이 권한을 가졌다하더라도 지침을 하달했을 때 현장동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중앙에서도 힘을 쓸 수가 없다. 지금 상태는 현장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지침을 내리고 그
지침을 수행하는 것으로 활동이 되고 있다. 지금 구조로서는 지회는 중앙에 대해서, 중앙은 지회에 대해서 서로 핑계를 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장이 강화되어야 지역이 강화되고 지부가 제대로 설 수 있다. 각 지회가 어떻게 강화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지부와 지회의 역할에 대한 고민속에서 사업의 성과가 축적되고 훈련되지 않는다면 지부를 제대로 세울 수 없다. 이러한 속에서 금속노조를 현장동력에 기반한 노동자의 투쟁조직으로 새롭게 재편하여야 한다.
또한, 금속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사업장과의 연대의 문제에 있어 금속연맹과 금속노조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공동투쟁의 조직화라는 관점에서 의견을 모아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현장에서는 현장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자발적 모임들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동시에 상호 연대와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한편 이번 투쟁을 통해 향후 민주노조운동이 노무현정권에 대한 분명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기되었다. 열사투쟁을 평가해볼 때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있으며 이것이 정치적 협상으로 가는 판단의 근거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은 분명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그러한 노선에서 한 발치도 물러섬이 없으며 이번 열사투쟁에서 과연 정권이 허용해주는 선 이상을 넘어섰는지 평가를 해야한다. 이것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면 향후 5년간의 민주노총의 투쟁은 단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투쟁전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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