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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보수혁명 원희룡

[뉴리더]‘보수혁명’ 꿈꾸는 뚝심의 승부사

뉴스메이커 651호

당내 ‘왕따’ 자처하는 ‘1등 인생’… ‘정치의 서브스리’ 목표 역동적 정치행보



한나라당에서 가장 한나라당답지 않은 정치인을 들라면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 원희룡 의원일 것이다. 한나라당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소신으로 당내 갈등을 빚는다든가 ‘톡톡 튀는’ 행동으로 대중적 관심을 사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그는 당내에서 ‘왕따’를 자초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간첩’ ‘박사모의 공적 1호’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듣고 있으며 심지어 “탈당하라”는 압박까지도 받는다. 실제로 그는 열린우리당에 가면 편하게(?) 정치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더 많이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의 정치적 목표가 한나라당에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발 원희룡표라는 정책상품을 만드는 공장장이 되겠다”는 게 그의 말이다.

바로 이 점이 그가 한나라당 보수파의 ‘집단 린치’에 못 이겨 탈당한 이른바 ‘독수리 5형제’와는 다른 면모다. 유약한 듯한 외모나 이력과 달리 그의 내면에는 강한 뚝심과 투지가 엿보인다. 그는 이제까지 1등 인생을 살았다. 학력고사 전국수석, 서울대 전체수석, 사법시험 수석합격이라는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검사, 변호사, 그리고 국회의원 재선을 거쳐 당내 ‘서열 3위’라고 할 수 있는 최연소 최고위원에 오른 정치이력도 비교적 순탄하다.

가슴에 박힌 ‘아크로폴리스의 장미’

이처럼 ‘귀한 집 도련님’ 이미지도 한 꺼풀 더 벗겨보면 그 내면에는 질풍노도의 과정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 역시 ‘정치인 원희룡’을 ‘정치 뉴리더 원희룡’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바탕이자 향후 ‘원희룡표 정치’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동력이 될 듯하다.

원 의원은 서울대 82학번이다. 그의 표현대로 ‘기구한 운명의 학번’이다.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 정권 하에서 속으로 칼을 갈며 대학생활을 보내다가 1984년 이른바 ‘유화국면’을 맞아 대중운동을 폭발시킨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많은 투옥자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이 무렵 전개된 학생들의 집단적인 공장 위장취업에 대거 동참한 것도 바로 이들 세대다.

‘제주도가 낳은 수재’ 원 의원도 이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순진한 공부벌레였던 그가 제 발로 운동권에 가담한 것은 입학한 지 석달도 되지 않았을 때다. 1982년 5월 27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1년 전 ‘전두환 물러가라’고 절규하며 중앙도서관 6층에서 투신한 김태훈(당시 경제학과 4) 추도식이었다. 원 의원의 운명을 뒤바꾼 ‘아크로폴리스의 장미’는 이날 시위의 가장 인상 깊은 후일담으로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의 변화는 ‘시간과의 싸움’

“아크로폴리스에 장미가 심어져 있었어요. 친구들이 시위하다가 흩어져 도망가던 중 장미 가시에 찔려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걸 보았어요. 그게 박혀서 평생을 가는 겁니다. 아크로폴리스에 심어진 장미 넝쿨, 거기에 찔려서….”

원 의원은 이 시위를 계기로 운동권 학생으로 변모한다. 당시 가장 투철한 투사로 알려진 1년 선배 이정우씨(현 변호사)를 찾아가 지하서클 사회복지연구회(사복회)의 일원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학과 공부는 아예 접고 야학·후진양성·위장취업 등 운동의 일선에 있었다.

여기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늘의 원희룡’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1989년 사회주의 몰락사태는 그에게 2년 가까운 방황을 안겨주었다. 믿었던 신념과 가치관이 무너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전국을 무전여행했다.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다양한 삶의 현장을 경험한 뒤 그는 생각을 바꿨다. 공개선언을 통해 ‘전향’을 한다는 것이 이미 후배 운동권에 ‘전설’이 돼 버린 ‘혁명투사 원희룡’으로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에서 온건사회주의까지’ 이념의 폭을 설정하고 자신을 어디에 세워야 할지 고민한 그는 결국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숙제를 푸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옛 소련과 북한식 사회주의는 실패작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학생 시절의 좌파적 노선은 청산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장미’는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박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을 택한 그의 정치적 좌표도 ‘보수혁명’이다. 그 말 속에는 기존 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국가운영전략을 세우고 그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좌파적 방법론이 아닌 우파적 방법론을 제시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하겠다.

원 의원이 보는 한나라당의 부정적 이미지는 크게 4가지다. 영남당(지역)·부자당(계층)·반공당(이념)·노인당(세대)이다. 한나라당은 이런 부정적인 장막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안주하려 한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이것이 그가 ‘독불장군’ ‘제2의 박찬종’이라는 말을 감수하면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다.

한나라당을 변모시키는 것, 원 의원은 이를 ‘시간과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간이 가면 자연히 해소될 부분도 있고, 국민이 채워줄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3명만 있으면 시간과의 싸움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 아니, 혼자서라도 가능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일관성과 내용”

아마추어 마라토너이기도 한 원 의원은 마라톤 풀코스에 7번 도전했다. 그 가운데 6번을 완주했다. 아직 4시간 벽도 깨지 못했지만 그는 서브스리(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를 꿈꾼다. 어릴 때 사고로 오른쪽 발가락이 기형인 그는 이 때문에 병역을 면제받았다. 마라토너에게는 치명적인 이 장애를 딛고 서브스리에 도전하듯 그는 ‘정치의 서브스리’도 쉽게 돌파할 수 있는 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 의원은 백두대간 등정에도 도전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50구간으로 나눠 2009년까지 완전 등정을 목표로 삼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카트라이더 등의 게임을 즐기며 프로게이머 임요환씨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자녀를 이해하고 젊은 세대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멋진 세계라는 게 그의 게임 예찬론이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튈 수밖에 없는 이런 그의 역동적 정치행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당내에서도 “잘 다듬으면 한나라당의 부정적인 벽을 뛰어넘을 차세대 주자로 키울 수 있다” “내용 없이 시류에 영합하고 있다”는 상반된 평가가 함께 한다.

원 의원은 사회주의권 몰락 후 이념적 정리를 한 뒤 1년 반 만에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했다. 주변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집중력으로 사법시험은 통과했지만 ‘정치의 서브스리’는 벼락치기로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말한다.

“아직 한참 젊은데 1년이면 어떻고, 10년이면 어떻습니까. 아직 노력할 여지가 많고 어차피 모자라는 점은 국민이 채워주는 힘을 받아서 해야 되는 건데….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가져갈 일관성과 내용 아니겠습니까.”


인터뷰/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한나라당 지지율 의미 없다”

-‘보수혁명’이란 말까지 하면서 한나라당의 체질개선을 주장하는데, 최근 당 지지율이 40%대로 상승하는 것은 뭘 의미한다고 보는가.

“한나라당에 대한 지금의 지지율을 무의미하다. 더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에 대한 거부율이다.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에 따르면 50% 정도의 거부율이 있다. 그렇게 된 요인은 크게 네 가지라고 본다. 영남당-지역, 부자당-계층, 반공당-이념, 노인당-세대다. 한나라당은 이런 거부율을 돌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의미 없는 지지율에 안주했다. 그래서 대세판단을 그르치고 되레 거부의 원인이 되는 것을 강화하는 쪽으로 갔다.”

-그렇게 따지면 열린우리당도 거부율이 만만찮을 것 같은데…

“물론 열린우리당도 거부율이 높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의 집권 여당은 거부율이 높아지면 당을 새로 만들어서 돌파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음번 대선은 절대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안 치를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표의 호남 구애는 긍정적으로 보는가.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호남의 거부는 원죄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신화나 종교에서 얘기하는 희생을 통한 번제와 속죄가 따라야 한다. 호남에 가서 악수하고 온다고 해서 표가 오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집권했을 때 5·18특별법을 만들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구속하지 않았는가.

“그 후로 ‘도로 민정당’ 소리가 나오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더 많이 노력했다면 표는 안 나와도 지금처럼 적대적이고 아예 외면하는, 극단적인 거부라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원 의원이 말하는 ‘보수혁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 가족에게 가는 삶의 질 개선이라는 핵심적인 가치를 가지고서 그 방법론으로서 중도우파적인 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우파라면 재벌이 공정한 게임을 안 하고 정경유착하고 특혜를 받는 점에 대해 누구보다 단호하게 매를 쳐야 한다. 북한 문제도 그렇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는 것이 우파가 갖는 민족주의적 가치와 부합한다. 친일파 청산, 이것도 우파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 복지 문제를 보더라도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고, 국민연금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도입하지 않았는가.”

-‘보수혁명’이 인적 청산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아닌가.

“인적 청산이라면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부정적인 요소를 청산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리더십과 국가를 이끌 수 있는 있는 실력과 준비태세를 갖춘 인재를 다발로 기라성 같이 만들어서 국민한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특히 잘못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 정부가 아젠다로 내놓은 게 약 30가지가 된다. 성장과 분배를 같이 가도록 하겠다, 동북아 허브를 하겠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 지역 균형발전 이루겠다 등등 좋은 얘기는 다 했다. 그런데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알 수 없다. 기자회견할 때마다 국정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 같다. 또 경제성장률 1% 올려봐야 그게 무슨 업적으로 남겠느냐, 내가 경제를 살릴 줄 알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건 아니지 않으냐, 지역감정 타파에 대통령직을 걸겠다, 이렇게 얘기한다. 이런 모습에 아연실색이다. 경제성장률 1%면 돈으로 치면 50조원이고, 일자리로 치면 60만개다. 정권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고, 국정의 최우선 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돼야 한다.”

<글/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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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동지 이해찬 vs 김근태

[화제]‘대권 2룡’의 아주 특별한 만남

뉴스메이커 633호

‘친정’에서 만난 이해찬 총리·김근태 장관… 미묘한 관계 의식 않고 태연한 표정



아무도 귀빈들의 결례를 탓하지 않았다. 언론사와 정부 산하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초청받아 축사를 하기로 한 국무총리와 장관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것은 결례를 넘어 무례로까지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최측이나 참석자나 여기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지난 7월 5일 오후 6시 30분께 두 고위인사는 노타이 차림으로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 들어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다른 사람의 역작을 축하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자리였다.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은 ‘우리 강물이 되어’(전2권, 경향신문사)의 저자인 소설가 유시춘·김남일씨, 이우재 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부의장, 자유기고가 유시주씨,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등이었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후원으로 2003년 4월부터 최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70·80년대 실록 민주화운동’을 묶은 것이다. 즉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은 유시춘씨 등 필자들이다. 하지만 이 총리와 김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 등장하는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는 두 사람 외에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박선숙 환경부 차관, 문학진·유기홍·유시민·유승희 의원, 이길재 전 의원 등 정·관계 인사가 다수 참석했다. 주최측인 민주화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과 문국주 상임이사 등을 비롯해 이해동 목사, 조성우 민화협 상임의장 등 옛 재야인사와 현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또 다른 주최측인 경향신문 강신철 전무, 김지영 상무, 송영승 논설실장, 이영만 편집국장 등을 위시해 원로언론인 임재경씨, 서명숙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서영석 서프라이즈 전 대표 등 언론인도 자리를 함께 했다.

운동권 ‘짠빱’은 김 장관이 선배

꼬스트홀을 메운 약 100명의 참석자 역시 대부분 민주화운동 ‘동지’로서 책 속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명동성당 문화관은 이들에게 감회서린 곳이기도 했다. 이상문 경향신문 상무는 발간사에서 “여기가 과거 명동성당 문화관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며 “그 현장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어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유시춘씨도 답례사를 통해 “6월항쟁 때 이곳에서 5박 6일 농성을 했다”며 “그때는 내 생전에 이런 자리가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 총리도 “옛날에는 여기서 모이면 반드시 중부서에 들렀다가 가야 했다”며 이곳이 민주화운동의 주요 근거지였음을 회상했다.

따라서 이 총리와 김 장관으로서는 ‘친정’이나 다름없는, 오랜만에 옛 동지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넥타이를 매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예의에 어긋날 법도 했다.

불편한 넥타이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차림으로 참석한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하며 굳건한 ‘동지애’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한 정치적 위치는 이날 연출한 우애 넘치는 분위기와 달리 편안하게만은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세간에서 지목하는 ‘대권 7룡’의 일원이다. 언젠가 서로 경쟁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두 사람은 열린우리당 내 재야, 그 중에서도 이른바 ‘비지그룹’(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 친동교동계 재야세력)으로서 오랜 기간 혈맹 관계를 유지해 왔다.

어느날 갑자기 뒤바뀐 ‘서열’도 두 사람의 과거를 잘 아는 참석자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참석자들에게는 김 장관이 이 총리보다 몇 단계 높은 대선배다. 김 장관은 서울상대 65학번이고, 이 총리는 서울문리대 72학번이다. 이 총리가 서울공대에 입학했다가 1년 후 다시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6년 차이가 난다.
김 장관의 본격적인 학생운동 경력은 1971년 2월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되면서였다. 장기 도피생활을 하던 중인 1975년 5월에는 서울대 5·22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재차 수배된다. 1970년대를 꼬박 수배생활로 보낸 김 장관이 첫 별을 단 것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폭로해 유명한 민청련 사건 때다. 이때 구속돼 1988년 6월까지 옥살이를 한다. 반면 이 총리는 학생 신분으로 두 번 투옥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였다.

두 사람이 재야에서 한솥밥을 먹은 것은 민청련 시절이다. 이때 김 장관은 의장을, 이 총리는 상임위 부위원장을 했다. 민통련 시절에는 김 장관은 투옥중이었지만 ‘재야 40대 4인방’ 중에 한 사람으로 불렸고, 이 총리는 총무국장을 지냈다.

민청련 시절 ‘한솥밥’ 동지

표면상으로 두 사람이 정치적 노선을 달리한 것은 1987년 대선 이후이다. 이 총리는 평민련 몫으로 평민당에 입당해 13대 총선에서 당선, 17대까지 내리 5선 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한다.

반면 김 장관은 재야에 남아 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두 번째 옥고를 치른다. 재야세력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기성정당을 디딤돌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데는 이 총리와 같은 처지였지만 개별 입당이 아닌 집단 입당으로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그 때문에 이 총리보다 7년 지각해 민주당에 입당, 15대 총선부터 지금까지 3선을 기록하고 있다.

김 장관은 정당정치에서 비록 국회 선수(選數)는 이 총리보다 아래지만 당 서열은 여전히 위였다. 민주당 시절 김 장관은 부총재, 이 총리는 당무기획실장을 지냈다. 국민회의에서도 김 장관이 부총재, 이 총리는 정책위 의장을 역임했다. 새천년민주당 시절에는 둘 다 최고위원직에 오른 바 있고, 열린우리당에서는 김 장관이 원내대표를 지냈다.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나이나 선후배, 사회에서의 서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척박한 토양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함께 싸운 세계에서의 동지적 위계질서는 정서적으로 쉽게 뒤바뀌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출판기념회에 동석한 두 운동권 출신의 ‘용’은 이런 미묘한 관계에도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주최측이 마련한 순서에 따라 먼저 축사를 한 이 총리는 사회자인 정재돈 전국농민연대 상임대표에게 한마디했다. 이 총리는 “민주화세력이 상당히 관료화된 것 같다”며 “내빈 소개를 하면서 총리·장관·의원 순으로 하고 민주화운동 열심히 한 분들은 나중에 하는 걸 보니 조만간 공무원이 되려는 모양이다”고 조크를 던진 것이다.

김 장관은 그동안 본격적으로 정리된 적 없는 민주화운동사 발간에 무척 고무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축사에 임했다. 김 장관은 “현재와 미래의 도전에 올바르게 응전하려면 지난날 살아온 내력을 잊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며 “이 자리가 사회 양극화 극복과 한반도 평화를 뿌리내리게 하는데 책임을 느끼는 자리가 되게 하자”고 말했다.

이 총리와 김 장관은 축사를 마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나란히 자리를 지켰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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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 해결사 정동영

[유인경이만난사람]“통일한국 그 날을 위해 기꺼이 도와야죠”

뉴스메이커 648호

‘퍼주기’ 논란에도 당당한 ‘통일문제 해결사’… ‘소통’ 중요시하는 그의 다음 무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초등학교 때부터 이렇게 노래했지만 ‘통일’은 판타지소설보다 더 추상적이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철저한 반공교육 탓에 북한 사람들은 피부는 빨갛고 머리에 뿔달린 사람들, 혹은 이승복 어린이를 죽인 무장공비나 양복입고 산에서 내려오는 간첩으로만 알았다. 북한은 지금도 비자가 필요한 외국이고 북한 동포는 외국인보다 더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들이었다. 우린 북한에 대해 너무 몰랐고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통일은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이들이나 학자들의 관심사로만 여겼다.

그러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소떼를 몰고 가는 드라마를 연출했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후, 통일문제는 현실이 됐다. '그리운 금강산'도 열렸고 아시안게임 응원단으로 온 북한 여성들의 무공해 미모에 넋을 잃어 통일되기 전에는 장가가지 않겠다는 총각들은 팬카페까지 만들었다. 청소년들은 북한의 핵보유도 ‘통일되면 결국 우리 것’이란 쿨(?)한 태도를 보였다. 수령님의 은혜로 잘 산다더니 탈북자들의 증언, 용천역 사건으로 해외뉴스에 소개된 북한 동포들은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6자회담, 경수로 등 경협문제 등이 긴박하게 펼쳐지며 온통 세계의 관심이 한반도에 쏠렸다. 지난 9월엔 전문가들조차 회의적 반응을 보였던 북핵 6자공동성명이 타결됐다. 늘 미국측으로부터 귀동냥으로 정보를 얻고 회담장 밖에서 얼쩡이던 정부 당국자와 기자들은 우리가 미국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당당히 밝히고도 회담 타결을 이끌어낸 것에 감격해했다. 감격도 잠시, 삐그덕거리는 북한관광, 장기수, 북한 동포들의 인권, 탈북자 문제 등이 연일 터져나왔다. 그리고 모두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찾았다.

그동안 통일부 장관은 ‘갈 수 없는 나라’북한을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게 주요업무인줄 알았더니 국방, 외교, 산업자원, 재정경제, 심지어 교육문제까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당 후보 중에는 항상 1등인 대권후보이고 그 전부터 스타였던 정 장관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뉴스거리 아닌가.

열린우리당의 10·26재선거 참패 후 언제 다시 당으로 복귀할지도 모르고, 11월 6자회담 재개를 앞두고 고뇌와 걱정이 많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정부종합청사 통일부 장관실에서 만났다.

볼륨 조절이 가능한 TV형 정치인

“평소 지면을 통해 글을 자주 읽고 있습니다.”

정 장관은 이렇게 인사를 시작해 점수를 땄다. 방송에 가끔 나오는 이유로 기자면서도 항상 ‘방송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란 인사를 들었던 억울함(?)이 풀렸다. 하지만 곧 이성을 회복해 공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지난 6자회담 타결은 국내외에서 놀라운 성과란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 장관은 너무 북한측의 입장만 옹호해 ‘김정일 대변인’ ‘북한 통일부 장관’이란 비난도 받으셨죠. 무엇보다 저는 7월의 중대제안 때 우리나라가 6조 원에서 13조 원에 이르는 핵폐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스럽더군요. 미군이 감축되거나 완전철수할 경우 자주국방비용까지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갈 텐데….”

“그 문제는 너무 비용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본질이 흐려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된 OECD국가이고, 이들 국가들은 못사는 빈곤국에 문명국으로서 해외무상원조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0개 가입국 중 가장 인색한 국가가 우리나라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타인종, 타민족에게도 인도적인 무상지원을 하는데 같은 핏줄이고 한민족인 북한에 원조를 해주는 것이 어떻게 ‘퍼주기’입니까.

지금도 국민 1인당 매년 1만2000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앞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그 보상과 전력 등 에너지를 제공하는 절차에 들어가는 비용이 13년간 그정도 규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언젠가 통일한국의 국민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그날에 대비해서도 북한 동포들을 도와야죠. ‘비용’으로 본질을 희석해 정치적 공세를 퍼붓는 이들에게 과연 그들이 제시할 내일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미래전략이고 국가를 이끄는 정치인이라면 발등의 문제보다 더 멀리, 더 넓게 보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에,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선 적절하게 볼륨을 키우고 다시 부드럽게 줄여 말하는 정 장관의 이야기를 들으며 13년간 들어간다는 비용을 국민 1인당, 얼마씩 내야 하는가를 계산해보니 매달 2000원 정도였다. 커피 한 잔값으로 언제 터질지도 모를 핵의 공포에서도 벗어나고, 북한 동포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더구나 우리만이 내는 게 아니라 미국, 일본도 다 함께 내니 말이다. 정 장관 주장대로 통일되어 함께 살려면 북한 동포들도 잘 먹어 건강해야 하고, 도로·통신·전기 등 북한의 기반시설도 튼튼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겨우 5분 만에 세뇌당했다. 나의 감수성이나 지능지수 탓도 있지만 인터뷰를 위해 정동영 장관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니 그는 북한 출신도 아니고 정치학자도 아닌데 한결같이 통일이나 북한 관련 정책에 관해 의견을 밝혔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때, 최고위원에 진출했을 때, 대선 직후의 인터뷰에서 항상 대북정책과 북핵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처럼 말을 바꾸지 않고 일관된 견해를 보였다.

그는 지난해 10월 미국측이 주한미군 감축시기를 2005년까지로 못박고자 했을 때도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만나 '지난 1년간 한국이 용산기지 이전, 미군 재배치와 감축, 이라크파병 등 무려 네 가지를 미국에 공헌했으니 이번엔 미국이 감축시기를 조정해달라'고 주장했다. 설득당한 럼즈펠드가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10월 6일 한국측 요구가 반영된 주한미군 감축계획이 발표됐다. 리처드 롤리스 부차관보는 “정 장관이 매우 큰 일을 했다”고 칭송했단다. 미국에는 항상 읍소나 애걸복걸만 하는 비굴한 모습에 익숙했던지라 그런 모습이 무척 멋있게 느껴졌다.

정동영 장관은 이런 늦가을에 ‘낙엽’ 같은 시를 읊는 게 어울릴 듯한 로맨티스트처럼 보인다. 그와 절친해 객관성을 잃은 이들은 “해맑게 웃는 모습은 귀공자 출신인 케네디 대통령 같다”고 표현한다. 게다가 기뻐도, 슬퍼도 자주 눈물을 보인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도 당당하고 북핵문제에도 겁을 내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일이관지’란 말을 즐겨 썼어요. 일관한다는 것의 덕목을 스스로 삶의 원칙으로 여깁니다. 학창시절이나 기자시절, 그리고 지금 정치인을 거쳐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처음 세운 뜻을 지키려고 하는 의지가 그런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범생이 아니라고 했다. 전주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삶의 중심을 잃은 듯해 수업 빼먹고 영화관에 드나들고 하숙방에서 막걸리만 마셨단다. 당연히 성적은 떨어졌고 대학시험에도 실패했다. 아들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는 오막살이 같은 집 단칸방에 재봉틀을 들여놓고 옷을 만들어 청계천시장에 내다팔았다. 올 5월 돌아가신 어머니의 49재도 군부대 총기사건의 유가족을 위로하러 가느라 참석하지 못했다.

다시 개통된 청계천을 걸으며 그는 종종걸음으로 청계천에 옷감 사러 가고 또 제값을 안 주는 상인들과 드잡이를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정 장관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어머니를 추모하며 ‘고애자(孤哀子)’란 말을 썼다.



‘피투성이’ 경선에서 얻은 것들

정동영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공신이다.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 때, 그는 꼴찌를 하면서도 완주했으며 국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전국을 돌며 목이 터져라 표를 호소했고 부산 자갈치시장 등을 누비며 돼지저금통을 나눠줬다.

정몽준 후보의 선거 전날 파기 역시 종로연설 당시에 정 장관이 단상에 올랐고, 노 대통령이 차기후보로 강조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도 ‘천신정’의 도움이 컸다.

“한국 정치 사상 초유인 여당의 국민경선은 항상 주장했던 쇄신운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남이 만든 트랙에 경주자로 참여했으면 당연히 포기했겠죠. 하지만 내가 트랙을 제안했고 설치하고 중심에 섰다는 책임감으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권투선수가 링위에 올라 게임마다 KO패를 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또 다음 게임에 서야 하는 심정을…. 하지만 틀을 내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끝까지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부 기자들조차 ‘페어플레이 상이 있다면 정동영의 몫’이라고 말할 만큼 국민경선에서 그의 의연한 모습은 비록 속으론 피투성이였을지 모르지만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처음의 믿음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한 발 더 내딛는 힘"이 자신을 지켜주고 오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연애도, 기자생활도, 정치도, 마음먹은 것은 다 이뤘다고 했다. 실연했다가 납치 끝에 한 결혼도 그렇고, 최고의 앵커로 인정받았고, 정치 입문 10년 만에 ‘통일문제 해결사’로 통하며 차기 대권후보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 그는 운도 좋은 편이다.

하지만 ‘컨텐츠가 뛰어난 지도자’ ‘모양새가 좋은 정치인’등의 찬사만 받는 것도 아니다. 비호감층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과잉 의식하는, 2% 부족한 정치인'이라거나 ‘지나치게 이미지에 의존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가 혼신을 다하는 남북화해 역시 김대중 정권 시절 불렀던 노래이며 6자회담의 솔로 주역도 아니라고도 한다.

전문가집단의 여론조사에선 항상 수위를 달리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지지도가 낮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 장관은 카메라만 돌아가면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는데 나는 카메라만 보면 딱딱하게 굳어진다"고 했다. 잘 생긴 외모에 현란한 웅변솜씨를 보이는 것이 어쩌면 정 장관에게는 득이 아니라 ‘연출’로 보여 실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카메라만 보면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는 평소에 말할 때도 표정이 매우 풍부하다. 입벌려 크게 웃고, 고뇌하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눈물을 감추는 듯 입술을 지그시 누르기도 하고, 연설할 땐 격앙된 모습으로 포효하고…. 가면을 쓴 듯 굳은 표정을 짓는 한국 남자들이 보기엔 풍부한 표정이 다소 역겨워 보일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그건 결국 그가 속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 타인에게 진심을 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앵커생활, 정치인으로 대중연설을 통해 느낀 것은 ‘소통의 중요함’입니다. 정치건 방송이건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죠. 국민들의 눈높이로 세상과 사물을 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남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진솔하게 했을 때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잘 전달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통의 능력을 가진 그가 곧 열릴 6자회담에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 파란만장한 열린우리당과는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 아직까지는 사랑부터 장관직까지 원하는 것은 다 이뤄졌지만 그 마법은 또 어디까지 효력이 있는지도….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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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수요모임 리더 박형준

[뉴리더]‘자유와 연대’ 깃발 든 학구적 정치인

뉴스메이커 653호

좌파 이론가에서 ‘우파적’ 실천가로… ‘수요모임’ 이끌며 패러다임 전환 모색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은 정계의 많은 학자·논객 가운데서도 특히 학구적 이미지가 강한 정치인이다. 한나라당 원내 소장파 토론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이하 수요모임)을 이끌고 한 달에 10차례 이상 세미나·강연에 나가는 등의 왕성한 ‘학구적 정치활동’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은 웅변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세력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과거의 방식으로 나오는 게 아니다. 다원화한 사회의 복잡한 흐름을 읽어내고 그 토대 위에서 국가 발전을 위한 창의적인 비전과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고 실행하는 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런 정치는 확고한 소신과 큰 목소리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시대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를 설득력 있게 정리해 널리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박형준 의원은 이 점에서 뉴리더십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만하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학자적 관점에서 사회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고, 그런 ‘고급스러운 지적 고민’을 정치권이 공유하도록 하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동아대 교수 출신이다. 정치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학계에 있을 때 사회 패러다임 변화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경력이 있다. 박사학위 논문이 우리 사회의 지식근로자층을 포착하고 처음으로 이론화한 점에서 눈길을 끈 ‘자동화에 의한 노동과정의 변화’다. 지금도 진보학계와 정치권의 중요한 논제가 되고 있는 ‘87년체제 논쟁’에 일찍이 불을 붙인 학자가 바로 박 의원이다.

좌파 소장학자였던 박 의원이 ‘우파적’ 정치인이 된 것은 치열한 학술적 고민과 논쟁의 결과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1959년 12월 21일생이다(호적에는 1960년 1월 19일로 돼 있다). 고려대 사회학과 78학번으로, 긴급조치 9호 세대 막내그룹에 속한다.

시대상황은 문학청년이던 그를 사회학도로, 다시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원래 문학을 하려고 사회학과에 갔다가 그 길을 끝까지 가게 됐다고 할까. 대학 3학년 때인 1980년 교지 ‘고대문화’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의 봄’ 때는 당시 복학생협의회장인 박계동 의원이 이끄는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섰다가 최루탄 유탄에 맞아 오른쪽 각막이 파열되기도 했다.

시대상황에 흘러간 학창시절

뒷날 민청련과 연결되는 소그룹 ‘호민회’에서 활동하던 그는 졸업 후 노동운동이 아니라 대학원을 택했다. 현장 활동보다는 이론적 지향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잠시 중앙일보에 몸담기도 했으나 1986년 박사과정에 들어간 뒤부터는 재야 학술운동에 헌신했다. 당시 진보학계에서 불붙은 여러 사회과학 논쟁에 참여해 소장논객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민중당 강령을 기초하는 데도 참여했다. 박 의원은 “그때의 민중당 강령이 지금의 민주노동당 강령보다 더 우파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박 의원이 본격적으로 ‘신사고’를 제창한 것은 1989년부터였다. 사회주의 몰락 후 우리 시민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닌 다원적 참여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아서였다. 운동권 전체의 사고의 전환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운동권으로부터는 ‘개량주의자’ ‘변절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패러다임 전환은 박 의원의 학술적 과제이자 정치적 꿈이 됐다. 동아대 교수 시절 매달린 연구 주제가 ‘국가의 미래 비전과 시민사회의 역할’이었다. 중도에 김영삼 정부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에 참여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간의 여러 논쟁에서 운동권이 정보화·세계화라는 새로운 경향에 눈뜰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던 터였다. 당시 김 대통령이 발표한 ‘세계화 구상과 전략’의 최종 집필자가 바로 박 의원이다.

2004년 총선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뛰어든 명분도 패러다임과 관련이 있다. 박 의원은 “앞으로 5년간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변화가 닥칠 수 있다”면서 “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선진화의 문턱에서 주저앉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권에 들어가 새로운 국가발전 세력을 모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민중당 강령 기초 닦은 논객

대통령 탄핵의 후폭풍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에 입당한 박 의원은 ‘뉴한나라당’ 비전과 강령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수요모임에 참여해서는 ‘뉴라이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나라당이든 열린우리당이든 ‘정쟁세력’이 아닌 새로운 국가경영 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박 의원이 볼 때 지금의 정치권은 신화와 전통을 먹고사는 ‘과거세력’에 머물러 있다. 한나라당은 산업화의 신화와 반공·자유주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역시 민주화의 신화와 그 테두리에 맴돌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세력이다.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의 신화,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은 지역주의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양상이다.

어떻게 하면 한국 정치가 과거세력에서 ‘미래세력’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바로 한국 정치 전체의 고민이자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게 박 의원의 생각이다. 그가 설정한 국가 아젠다는 선진화, 통일, 양극화 해소다. 정치세력은 이런 중요한 국가 아젠다에 대한 의지나 규범 수준이 아니라 능력을 보여주는 집단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즉 이 3가지 축을 누가 미래지향적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제대로 풀어갈 수 있느냐의 경쟁으로 가는 것이 우리 정치권의 미래세력화이자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얘기다.

박 의원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자유’로 삼고 있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자유의 가치를 신봉하는 세력은 연대(박 의원은 ‘평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이유는 자칫 획일적 평등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의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이 연대의 가치를 이해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자유의 가치를 이해하는 연대주의 세력으로 분화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구도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와 연대라는 두 가지 가치 속에서 새로운 성장·복지·통일모델에 대한 생산적인 대안을 내놓고 서로 경쟁하는 구도로 정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정치권은 모두 ‘과거세력’

지난 7월 박 의원은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당내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수요모임의 2기 대표를 맡았다. 최근 10·26재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3명이 가입, 수요모임은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숫자(20명)로 세력화했다. 이들은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한나라당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과거의 잣대로는 이들이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할 수준의 세력으로 보기 어렵지만 박 의원이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우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박 의원은 운동권·기자·교수, 시민단체(경실련)·국정(정책기획위원회) 참여 등 다양한 경험을 가진 정치인이다. 정치의 근거지인 부산에서는 방송토론 진행 등을 통해 높은 인지도를 얻었다. 이런 경험으로 쌓은 사고력과 정책기획력. 그리고 대중 전파력과 설득력 등이 그의 정치적 꿈인 ‘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국가경영 세력 구축’에 힘이 될 것이다.

그는 믿고 있다. 우리 정치가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때 만날 새로운 리더십은 어떤 모습일까.


[인터뷰]박형준 한나라당 의원

“대세론과 줄서기가 당을 망친다”

- 새정치수요모임의 지향점과 당내 역할은 무엇인가.

“기본적인 생각은 한국 정치가 바뀌려면 먼저 한나라당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나라당이 선진화를 위한 새로운 국가경영 세력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제일 먼저 ‘뉴라이트’가 필요하다고 내부에서 얘기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이 깨지기도 했지만 지난번처럼 혁신안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과거에도 당내 개혁파 모임이 있었지만 정작 선거와 같은 중대한 국면에서는 각자 정치적 이해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수요모임은 뭐가 다르다고 보는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대세론과 줄서기이다. 그렇게 되면 당이 굉장히 경직돼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박(反朴) 세력으로 비치는 이유도 4·30재보선 후 ‘박근혜 대세론’이 확산되려고 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서다. 마찬가지로 ‘MB(이명박) 대세론’이 나와도 똑같이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구성원이 대선국면에서 줄서기를 하게 되면 수요모임도 형해화된다. 그걸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 현실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우리는 대선주자들이 공정한 게임의 룰을 갖고 자기 콘텐츠로 승부를 하는 여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순간에는 각자 선택이 불가피하겠지만 2007년 경선 이전, 적어도 내년 말까지는 (줄서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같이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연대 등 과거로부터 우리가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 줄서기를 경선 전에 하든 후에 하든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내년 전당대회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방선거 후 대권·당권 분리 상태에서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요모임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고 모든 선출직에 출마할 생각이다. 그 과정에 당내 세력과 외부 영입인사들과 연대해 당의 컬러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1차적 목표다. 그때까지는 대권경쟁 구도 속에 우리를 위치시키지 않는다는 게 수요모임 의원들의 합의사항이다.”

- 그래도 결국은 다 줄서기를 하던데….

“본격적인 대권경쟁이 시작되면 개별 의원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분들 모두가 하나같이 한나라당이 크게 변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 우리가 자꾸 강요하는 것이다.”

- 김영삼 정부 정책 참여 경험으로 볼 때 노무현 정부 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국가 아젠다의 우선순위 설정이 우선 잘못됐다. 예를 들면 지난해 ‘4대악법’ 개정에 매진한 것이 그렇다. 그건 각자 조용하게 풀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거기에 매몰되다 보니까 그것도 실패하고 다른 중요한 것까지 놓친 것이다. 선진화와 관련된 중요한 아젠다 몇 개를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정말 하고 싶은 다른 개혁 과제의 추진하는 데 힘이 될 수 있었다.”

- 평소 개혁 과정의 관리(Process Management)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해왔는데…

“국가경영에는 고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개혁의 비전이나 목표도 중요하지만 개혁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김대중 정부나 참여정부가 그 점에서 제대로 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

<글/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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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중도통합 깃발든 반미자주화 1세대

[뉴리더]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뉴스메이커 652호

‘중도통합’ 깃발 든 반미·자주화 1세대
학생운동 넘어선 386 정치인… 민족경제공동체 향해 ‘미래를 조직’한다


임종석 의원 약력

1966년 4월 24일 전남 장흥 출생. 4형제 중 3남.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1985년 용문고 졸업.
1986년 한양대 입학(1995년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1987년 노래패 ‘소리새벽’에 가입, 6월항쟁 참여.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에 당선.
1989년 서총련 의장, 전대협 3기 의장.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평양축전 파견. 수배 중 10여 차례 기자회견, 12월 18일 검거됨. 3년 6개월 복역(1993년 5월 출소).
1994년 청년정보문화센터 창립. 부소장. 2~4기 소장.
1999년 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창립. 회원으로 참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민화협 청년위원장.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장·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2002년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 국회 여성위원회 위원,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2003년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국민참여운동본부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열린우리당 대변인.
현재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 열린우리당 연수원 부원장.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환상의 전술’로 시작해서 ‘신비의 탈출’로 끝난 6·30 한양대 투쟁으로 노태우 반통일 정권에 대하여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대협은 역사상 꺼지지 않는 불멸의 위훈을 세웠으며 전설적 신화를 창조하였다.”(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지음 ‘전대협’ 돌베개, 1991년)

‘임수경 대표 평양축전 참가투쟁’에 대한 전대협의 자체 평가다. 1989년 ‘임수경 방북 파문’은 ‘국내 세 번째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으로까지 불린 전대협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통일운동에 불을 지르는 한편 극심한 이념논쟁을 야기했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됐다. 학생운동사의 가장 화려한 장면이랄 수 있는 이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그들의 표현대로 ‘불멸의 위훈’을 세운 전대협 3기 의장이 임종석 의원이다.

집권 열린우리당 재선그룹의 일원인 임 의원의 정치적 자산은 ‘8할이 전대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사에 보기 드문 강력한 학생조직’이라는 전대협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구가한 전력 때문이다. ‘의장님’의 막강한 대중동원력과 ‘임길동’으로 불리기까지 한 신출귀몰한 행각은 전대협 세대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쉬이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다.

이런 이미지와 상징성이 임 의원에게 정치적 발판이 된 게 틀림없지만 정치적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금 세게 소신을 펴면 ‘학생운동가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비아냥을 듣고 정치적 타협을 하면 ‘변절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전대협 전성기 이끈 ‘의장님’

임 의원은 1966년생이다. ‘아직 486으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386세대다. 386세대, 전대협, 운동권 출신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가장 귀가 따가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너무 빨리 컸다’든가 ‘지름길로 왔다’는 등의 지적도 부담스럽다.
전대협 세대는 다른 학생운동 세대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 반미·자주화를 공개적으로 표방한 첫 세대로서 대중운동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들은 6월항쟁을 통해 ‘승리의 체험’을 맛보았고, 노무현 캠프에 집단적으로 참여한 2002년 대선을 통해 두 번째 정치적 승리까지 ‘쟁취’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반미에서 주사(주체사상)까지 운동권 선배세대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강한 이념과 노선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이들의 힘은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이런 점 때문에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안하게 보일 법도 한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에는 당연히 새로운 세대의 꿈과 비전이 담겨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의 공감과 신뢰를 얻는 것이 그 다음이다. 물론 꿈이나 비전을 세우는 것보다 그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실현 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임 의원은 ‘정치 뉴리더’에 부합하는 호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꿈과 비전은 젊은 세대의 그것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고, 이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임 의원은 당내 재선의원 그룹의 막내 축에 들지만 내년 초 전당대회를 통해 지도부 입성을 ‘권유’받는 입장이다. 다음 개각에서 통일부 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그는 입각에 대해서는 “기자들이 재미삼아 쓴 것 같다”며 “지금은 파격인사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전대와 관련해서는 당 쇄신을 위해 “재선그룹의 집단 출마도 한 방법”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가 학생운동가로서 워낙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정치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한 몸을 낮추면서 국민과 기성정치권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놓치지 않으려는 덕목이 균형감각과 책임감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전대협이나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왜곡·과장된 측면도 있다. 생각보다 튀지도 않고 생긴 것도 가까이서 보면 ‘순하기’ 이를 데 없다. 가장 투쟁적인 모습을 보인 때가 이라크 파병 결정 때 단식에 들어간 것 정도다. 그는 “원래 나는 단식 반대주의자”라며 “앞으로 단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 의원은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중도개혁’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파는 물론 좌파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우파는 과거지향적인 점에서, 좌파는 전세계적으로 주된 흐름을 역행하는 점에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국민은 중도세력에 훨씬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이를 규합해 ‘미래를 조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지금은 되돌아갈 수 없게 됐지만 임 의원의 원래 꿈은 과학자였다. 운동권에 입문한 것도 대학 2학년 때 6월항쟁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순진한 공학도였고, 성격도 내성적인 편이었다. 고교 때는 학내 활동 경력도 없다. “깡촌 출신인 데다 고등학교에 갈 무렵 1년 반 동안 신장염을 심하게 앓아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내성적인 공학도에서 ‘구국의 강철대오’를 지휘하는 학생운동 지도자가 되는 과정은 그래서 소설처럼 극적이기까지 하다. 재수해서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에 들어간 때가 1986년이었다.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등을 겪으며 심한 심적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과학자의 꿈을 접지는 않았다. 자신도 뭔가 ‘참여’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소리개벽’이라는 풍물패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걸쳤지만 언젠가는 다시 전공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정치 참여로 ‘통일’의 꿈 대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대학가는 집회·시위가 일상이 돼버렸다. 자연히 풍물패의 역할이 커지고 학생들에게 노출 빈도가 많아졌다. 이 와중에 그는 학생들의 눈에 띄었고, 1988년 여름 86학번 활동가 총회에서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서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총학생회장 출마는 곧 구속을 의미했다. 그는 이 제의를 수락하면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한양대 총학생회장, 서총련 의장, 전대협 의장에 연거푸 올라 1989년 12월 검거되기까지 약 1년 동안 현란한 활동을 펼쳤다. 5년형을 받고 3년 6개월 복역한 뒤 1993년 5월 출소한 그는 청년정보문화센터·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등을 결성, 전대협 세대 중심의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정치에 참여한 것도 전대협 세대의 집단적인 결정에 의해서였다. 그를 비롯한 전대협 1~3기 지도부 5명은 2000년 16대 총선에 새천년민주당 간판으로 출전했다. 그는 이 가운데 유일한 당선자가 됐다. 17대 국회에는 18명이 도전해 12명의 당선자를 냈다.

임 의원이 대변해야 할 이들의 꿈은 ‘통일’이다. 전대협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민주화 이후의 통일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앞날에 대한 그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그는 “우리 사회는 고도로 민주화한 사회라고 본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지역갈등이라든가 과도한 권력투쟁이 사회 주요 기관들까지 정치화하게 만드는 점 등 몇 가지 이분법적 갈등이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는 면이 있지만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임 의원의 꿈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 우리가 한 가지 더 이루고 싶은 것은 민족경제공동체다. 남북문제를 풀어야 우리가 선진국이 된다고 본다. 반북·반공 논리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이미 우리의 관심은 북을 어떻게 경영할 것이냐는 데까지 와 있다. 되도록 큰 부담 없이 북쪽을 자립할 수 있게 하고 개혁·개방할 수 있게 해서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그래서 우리가 대륙으로 북방경제시대를 열고… 관심이 그렇게 와 있는데 계속 우리한테 과거의 것을 물어본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인터뷰]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국민 신뢰얻는 노력부터 해야”

과거 전력 때문에 늘 두 가지 상충되는 주문을 받는 것 같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라’ ‘과거의 소신을 지켜라’ 가운데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가.

“시민단체나 재야운동을 하는 분들의 몫이 있고 정치인의 책임이 따로 있다. 정치에 와 있는 이상 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가치나 철학 등에서는 균형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깥에 있는 분들에게는 늘 모자라고 때로는 변절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도 있다. 지금까지 과격하다고 욕먹어 본 경험은 없는 것 같다. ‘너 변했다’, 이런 쪽이었던 같다.”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 자살사건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25를 통일전쟁이라고 한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고 공산당을 잡은 사람들은 구속시켰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난번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나 강정구 교수 발언 파문 때 당이나 정부가 조금 더 높은 목소리로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그 얘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가 하는 게 좋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하려고 의견조율을 하다가 시기를 놓쳤다. 그때 기자들이 물어서 나는 ‘완전히 정신 나간 소리’라고 했다. 문제는 정신 나간 사람의 인권은 어떻게 할 것이냐지…. 전체적으로는 얘기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당이나 정부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좀더 단호하고 분명하지 못했던 것이 케케묵은 논란을 초래한 빌미가 됐다. 지금 와서 반공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이성적이거나 지성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얘기해줄 필요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에 공감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나도 두 분 국정원장 구속에 대해 정치권에 들어와서 제일 독한 소리를 했다. 검찰에 대해 ‘편협하고 편파적이고 이중적인 싸구려 정치다’라고 했다. 특히나 두산그룹 일가에 대한 불구속 방침 직후에 이 건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정치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최근 중도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열린우리당의 목표가 혁신정당이라든가 선명한 개혁정당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완전히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시 국민의 신임을 받아서 집권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중도세력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민주당과 합하자,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안 풀린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북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돼가는 사회에 대한 따뜻한 철학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라 하면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 해소인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나라당 주도세력은 과거지향적이거나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본다. 진보운동, 소위 좌파운동하는 분들도 전 세계적인 주도흐름에 대해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지 현실에 닥쳐 있는 국가적인 문제, 국민들의 필요, 이런 것을 책임지고 국정운영을 해갈 수 있는 준비는 안 돼 있다. 그래서 중도세력의 대통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열린우리당이 하자는 것이다.”

<글/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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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조명]“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뉴스메이커 2005-11-04 11:42]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 출간한 안동일 변호사 “더 큰 희생 막으려 ‘거사’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10·26사건 주요 관련자들의 변호인으로서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봤던 안동일 변호사(65)가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랜덤하우스중앙)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10·26사태 26주년에 맞춰 나온 이 책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10·26사태의 성격과 김 전 부장의 ‘범행’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해주는 요소들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담당 변호인이 쓴 본격적인 역사 기록물이라는 데 있다. 이제까지 나온 10·26 관련 저작물은 재판기록이나 수사기록, 관련자의 증언에 의존해 취재기자나 작가가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달리 공판조서와 법정 메모, 피의자 면담 등을 토대로 한 안 변호사의 기록은 10·26의 실체와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10월 26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배재빌딩 사무실에서 안 변호사를 만나 10·26의 실체에 한걸음 더 접근해 보았다.

책을 보면 김 전 부장이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혁명가로 묘사돼 있는데….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이죠. 내가 그걸 혁명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발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것은 사실이에요. 유신 선포 이후부터 ‘이건 민주헌법이 아니다’라며 회의를 품었던 거죠. 1974년 건설부장관에 임명됐을 때는 권총을 넣고 들어갔는데, 바지 담배주머니가 불룩한 그때의 사진을 법정에 증거물로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되는 바람에 생각을 달리 한 겁니다.”

생각을 달리 했다는 건 무얼 의미합니까.

“그 전까지는 박정희와 자기가 같이 사라지자는 생각이었는데 중정부장이 되자 ‘아, 이건 선의로 해결할 수 있다’며 마음을 바꿔먹었어요. 모든 정보의 총책임자가 되고 항상 대통령과 독대하는 위치니까 유신체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중에 들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등식을 세우기를 박정희가 바로 유신의 핵이다, 박정희가 있는 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이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없어져야 된다, 이런 확신적인 등식을 하나 만들어 놓고….”

왜 선의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어요.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거지요. 차지철도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어요.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 본인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하니까…. 더 큰 국민의 희생을 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써 막자는 거였죠.”

그런 취지로 혁명을 위한 거사를 했다면 그 뒤의 행동과는 앞뒤가 맞지 않지 않습니까.

“착각한 거지요. 착각한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유신의 핵을 제거하면 7년여 동안의 유신체제, 더 나아가 박정희 18년 압제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모든 국민이 일제히 일어나 자기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본 거죠. 두 번째는 거사가 성공하면 틀림없이 미국이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한 겁니다.”

거사 직후 육본이 아니라 중정으로 갔다면 가능했을 법한데요. 김 전 부장의 판단이 순간적으로 흐려진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정승화씨를 믿었고, 또 육본으로 가도 계엄만 선포되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판단이 흐렸다기보다 치밀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죠.”

김 전 부장이 재직 시절 긴급조치 10호를 대통령에게 건의한 내용이 책에 나오는데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은 얘기 아닙니까.

“긴급조치 9호의 나쁜 점은 죄목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 조치를 비판조차 못하게 하고 헌법 개정 논의는 아예 안 되게 했으니….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걸 완화하고 두 가지 ‘시퍼런 칼날’을 추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노동계와 종교계를 규제할 수 있는 조항을 넣는 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표면적으로는 9호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중요한 알맹이를 빼는 것이었죠. 이게 거의 될 뻔했는데 내부 반발 때문에….”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부분에서 책과 진실위 중간발표 내용이 상치됩니다. 김 전 부장의 ‘작품’이 아니라고 확신합니까.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그해 10월 초입니다. 김재규씨의 말을 들으면 그걸 자기가 자체조사시켰다는 겁니다. 그 보고를 받지 못하고 10·26이 났죠. 자기가 한 일이라면 굳이 조사를 시켰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아주 분개했어요. 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이느냐고요.”

당시 역학관계상 김 전 부장이 그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김형욱 처리문제에 대해 항상 온건한 방법을 건의했었죠. ‘돈이 필요하면 돈이라도 줘서 막읍시다’ ‘신변 보장이라든가 자리를 요구하면 그렇게 해줍시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을 설득해놓으면 저쪽이 안 듣고 저쪽을 해놓으면 이쪽이 안 되고…. 그래서 안 됐다고 했어요.”

궁정동 안가에서 간 여성이 200명쯤 되고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다 불려갔으며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 박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한 내용이 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닌데…. 김재규씨도 '남자는 벨트 아래 얘기를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박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 돌아가신 다음에는 많이 흔들렸거든요. 권력이란 건 10년 이상 잡게 되면 그렇게 되나 봐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 전 부장의 명예회복 문제로 진통을 계속하고 있는데….

“내게도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요. 책을 쓰고 있는데 나는 이걸 자료로 주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어제 책을 보냈고요.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와 ‘패륜아의 우발적 범행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데 나는 그 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안 변호사는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으로 4·19시위 참여 후 민족통일연맹(민통)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에도 깊이 가담했다. 사단법인 4월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4·19세대다. 5·16쿠데타 직후 민통 관련자 일제 검거 때 도피하는 바람에 중형을 면한 그는 1980년 5월 10·26사건 대법원 확정판결 후에도 발 빠르게 잠적했다. 함께 변론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그때 연행돼 곤욕을 치렀다. 10·26 관련자들에 대한 변론을 너무 ‘열심히’ 한 괘씸죄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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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과 사민주의 연구 경향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 연구경향을 중심으로

목 차


1.머리말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1)독일사회민주주의 역사적 발전과정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


4.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한국의 연구경향


5. 맺음말


* 영문초록(Abstract)


* 참고문헌.


1. 머리말



최근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통해 급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19세기 중엽 이후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인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온 흐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는 최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자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관심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91년 이후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개가 활발하게 소개되어왔다. 이에 비해 사회민주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 발전해 왔는가를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개념,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과 한국에서의 연구 경향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보다 깊이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개념



1)독일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기에 앞서 독일사회민주주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고,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크게 3 단계의 시기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번째 단계는 1890년대 중반에 베른쉬타인이 제기하여 일어난 수정주의 논쟁 시기이다. 베른쉬타인은 1896년의 독일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에 제출했던 의견서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전면적 수정을 제기탖다. 베른슈타인은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에 따른 궁핍화 법칙, 자본주의 멸망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들 둘러싸고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경제민주주의의 구상을 둘러싼 시기이다. F. Naphtali가 경제민주주의 구상을 창안하였는 데, 이것은 공적 개입에 의한 경제의 민주화와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전제하는 자주관리형태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25년 독일노동자 총연맹 브레슬라우대회에서 제창되어, 1928년의 함부르크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세번째 단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전환을 둘러싼 논쟁 시기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공정한 사회질서의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보호하고 장려하려 한다. 사회화론을 부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1951년에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표와 임무'라는 제목의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강령] 등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2) 사회민주주의 개념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상황이 변화되어옴에 따라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을 담아왔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사회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다르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주의는 곧 맑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전통 위에서 현대적 상황의 변화를 담은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사회민주주의의 개념을 토마스 마이어(T. Meyer)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이어는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요한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사회주의는 윤리적 필연성이며, 사회주의는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정도에서만, 그리고 그 실천 형태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는 건설적 사회개혁과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노동자의 경험 및 지식의 증가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건설된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로의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이다. 세째,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사회화란 반드시 국유화나 전면적인 몰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생산수단에 대한 개별적 소유권을 다양한 사회적 이해의 담지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회화란 반드시 시장의 철폐를 의미하지 도 않는다. 네째,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기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주의의 일부이다. 다섯째, 사회주의적 원리의 의미에서, 사회구조는 폭력적, 혁명적 반란에 의해서 건설적으로 개조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사회 관계의 창조적 건설은, 민주주의 속에서만 점진적으로, 또한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된다.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 동향


  그럼 독일사회민주의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사회민주주의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베른쉬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의 검토는 베른슈타인 당대의 수정주의논쟁에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의 기본적인 틀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19세기 후반 수정주의논쟁의 제공자인 베른슈타인의 기본 입장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베른쉬타인은 자신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1896-1898년 사이에 걸쳐 {신시대(Die Neue Zeit)}지에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문제]라는 연재기사에서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보다 보충되어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로 출판되었다. 베른쉬타인은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맑스주의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하려 했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의 이론적 전제와 독일사회민주당의 실천 사이에 하나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 진부하고 공상적으로 된 이론을 검토하여 당의 실천 정책들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단점으로 지나친 추상성과 이 추상성으로 인한 이론편향적 경향들을 지적하였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현실분석 중 맞지 않는 것으로 붕괴론을, 즉,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체제가 그 속성상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견해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붕괴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내재한 본질적인 오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 본질적 오류로 헤겔주의류의 변증법적인 선험적 연역론과 유물론적인 역사관, 운명론 및 결정론 등을 들었다. 베른쉬타인은 또한 사회의 양극화이론, 즉 점증하는 빈곤화와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이론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점진적인 심화와 그에 따르는 혁명적 긴장의 고조에 대한 개념들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러한 테제들이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현실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의 진행이 맑스가 희망하고 예견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는 생산의 집중도 없었고, 대규모기업에 의한 소규모기업의 소멸도 없었다. 상업과 산업에서도 집중은 매우 느리게 발생했고, 농업에서 소규모 생산단위의 소멸 역시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간층이 프롤레타리아화 하지도 않았으며,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양극화 현상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이 수정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자, 일련의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바이레른 사회주의자이며 가장 열렬한 베른쉬타인 옹호자가 된 폴마르(Georg von Vollmar), 제국의회 의원과 바이마르 때 국회의장을 역임한 농업이론가 다비드(David),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적극적인 활동을 자원한 이상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인 프랑크(Ludwig Frank), 윤리적 사회주의자인 아이스너(Kurt Eisner), 가치이론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경제학자인 콘라드 슈미트, 그리고 독자적으로 베른쉬타인과 유사한 논점에 도달한 캄프마이어(Paul Kampmeyer) 등이 그들이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간 사회주의(Sozialistische Manlatshefte)}를 통해 자신들의 집장을 피력하였다. 비록 다양한 논제에 걸친 논문, 평론, 단상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폭력에 대한 반대, 윤리의 강조, 개량적 활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 여성해방, 노조활동의 고무, 교육환경의 증진 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연합전선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비슷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던 개혁주의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을 지지하게 되면서, 수정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지적 비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윤리적인 사회민주적 세계관을 구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개량주의와 구별된다. 개량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수정주의 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레기엔(Legien), 라이파르트(Leipart), 팀(Tim), 움브라이트(Umbreit), 엘름( von Elm) 등과 같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정책 수준에 머물렀다. 두 번째 부류는 에버트(Friedrich Ebert)같은 당직자들이다. 그들은노동조직의 성장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정책간의 타협을 중요시하였다. 세 번째 부류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 입장을 보였던 쉬펠(Schppell), 칼베르(Calwer), 힐데브란트(Hildebrand) 등과 같은 보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선택적 관세에 대한 지지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대전 중의 가장 극단적인 사회제국주의로 완결된다. 이러한 입장들은 베른쉬타인의 기본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른쉬타인은 사회제국주의와 명백히 다른 입장에 서있다.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는 지지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도 받았다. 카우츠키와 로자 룩젬부르크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섰다. 이중에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뽑히고 있고, 이후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로자 룩젬부르크의 견해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제문제]시리즈에 주목하다가 {전제}가 출판되자 수정주의의 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사회개혁과 혁명을 사회민주주의 사상 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그리고 개혁을 수단으로 혁명을 목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녀는 이에 비해 수정주의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회혁명 - 사회민주당의 목적인 - 을 폐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면서 비판하였다. 궁극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심장이므로, 그러한 목표를 폐기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술적 수정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 모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했으며 관념론으로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체제 분석이 그의 관념론의 지주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평가절하하면서 그것을 "적응성", "지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주의의 적응성에 대한 베른쉬타인의 주장은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전례없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했던 신용의 증가와 국제화는 실제로는 전유방법과 생산방법을 더욱 단절시키고,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더욱 괴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자본주의의 몰락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카르텔과 트러스트와 관련해서도 베른쉬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의 안정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현상 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의 최종국면의 징후로 보았다. 그녀는 더욱이 공황이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베른쉬타인의 주장을 유치한 오류로 비판하였다. 1890년대의 상대적 번영이 장차 도래할 자본주의 대격동의 그림자를 가릴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번영은 생산과 교환간의 최후의 모순을 위한 전제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출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부분적이고 국지적인 공황이 무제적한적인 세계공황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수정주의의 기초를 검토한 룩젬부르크가 제출한 결론은 수정주의는 사회주의적 이론이 아니라 절충주의 철학을 지닌 부르주아 개량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전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적 활동, 사회개혁, 그리고 현대국가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세 가지 동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한다. 룩젬부르크는 이러한 세가지 전술 모두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첫째, 노동조합은 맑스의 임금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를 폐지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 세력이 무한히 확대될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낙관론은 근거가 없다. 노조는 그들이 ?하는 대로 생산계획에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는 생산의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 방법에도 관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은 수정주의자들이 산정했던 바의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두번째, 사회개량은 장기적인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한게가 있다.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양립될 수 있는 한에서는 개량을 허용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더 이상 개량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룩젬부르크는 사회개량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러한 착취에 질서와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라고 보았다. 세번째, 수정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성숙에 의존하고 있는 데, 그러한 민주화과정은 식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허용되며, 지배계급들이 위협당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된다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 다음처럼 결론을 내렸다. 수정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에 다름아니며, 그 전술은 사회주의적 승리를 잉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승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권력장악으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베른쉬타인의 전술은 결코 현존 체제 내에서의 사소한 개량이상을 끌어낼 수 없기때문에 수정주의자들의 목표는 급진파의 궁극목표와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수정주의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가 없으면 그 지위가 한층 더 상승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과 베른슈타인의 지지자들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이러한 비판은 형성중에 있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약점을 통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나찌즘의 대두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룩젬부르그의 비판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룩젬부르크의 입장은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사회주의 이론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한 분파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릭케(Dieter Fricke), 라쉬짜(Annelies Laschiza), 라드뽅(Gunter Radczun), 그리고 테뵉(Manfred Tetzel)등이 이어 받어 발전시겼다.


1950년대초 이전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으로 선호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심지어 베른슈타인이이라는 커다란 명성에도 불구하고, 베른슈타인의 원저작들이 전집형태로 정리되지도 못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초 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과정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하나의 독창적인 새로운 포괄적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 대표적 학자로 피터 게이를 들 수 있다. 게이는 19세기 후반에 수정주의는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베른슈타인의 공적이라고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만약 베른쉬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독일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개량주의적 이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진기한 이론이라고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상황의 이론적 인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수정주의가 즉각적인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론이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주고 아울러 맑스주의가 그랬던 것 처럼 논리적인 체계로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쟁적인 개념구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터 게이는 베른슈타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던베른슈타인에 대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을 재비판하였다. 피터 게이는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비판을 가하였다.


첫째,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폐기'를 너무 멀리까지 끌고가 버렸다. 사실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주의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는 투쟁 자체를 문제시하는 쉬펠(Schipell)과 베른쉬타인의 이론 비판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이론적 주장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베른쉬타인의 이론구조가 그 취약성으로 곤란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현실감각은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파급된 번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세번째, 로자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은 독일은 물론이고 여타 국가에 대해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경직된 혁명적 사고 패턴은 영국노동계급의 평화적인 권력획득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득권 계급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담보를 과소평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리하여 베른슈타인이 독일적 상황에 대해 오판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영국적 상황을 오판했던 것이다. 네째, 혁명적 전술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옹호는 대책없는 모순들을 잉태한다. 그녀는 특정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염두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블랑키주의적 쿠데타는 노동계급에게 심각한 불행을 안겨주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장악 시기, 혁명의 형태 등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베른슈타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사상 속에서도 혁명이라는 난제와 개혁이라는 난제 간의 딜레마는 결코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한 피터 게이의 이러한 반비판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이외에 그노이스(Gneuss)도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체계화의 산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유로코뮤니즘과 유럽사회주의가 대두된 1970년대에 바우어(O. BGauer) 르네상스와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사회민주주의 연구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바우어 르네상스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에 따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재평가와 관련이 있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는 1969년 이후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베른쉬타인 연구는 1970년대 초 이전까지는 매우 적었으나, 197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활성화되었다. 1977년에 베른쉬타인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이것을 입증해준다. 이 대회 의장을 맡았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의 하나인 토마스 마이어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20세기의 전환기에 가장 올바른 입장으로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회중의의 원리와 실천 간의 괴리가 점점 커지는 상황속에서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의 내부로부터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의 모순을, 이론적 기반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실제적 발전과의 현실적 관련에 기반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수정주의는 결코 반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건설적인 개량작업을 방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는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단순히 수동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역사적 시대상황에 적응하기위해 고안된 진일보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새로운 평가들을 미 출판된 초고와 편지들을 통해서 뒷받침하는 작업들과 정통적 입장에서 계속 비판하는 시각들이 서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다.



4.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 연구 동향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여러가지 요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공간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압도되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1950 년대에는 조봉암의 진보당을 통해 사민주의적 입장이 잠시 현실화되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좌초되었다. 5.16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마저도 부인되는 열악한 현실 상황에서 사민주의는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연구되기 어려웠다. 다만 이 시기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참여하기 위한 일환으로 관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한국사회가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사회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 이에 따라 한국에서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같은 '개량'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 논의는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국에서 수입되는 과정 속에서 , 그리고 90년대 초 현존사회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현실 영역에서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과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사회민주주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김윤환, 안병직 등이 열악한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이후 사민주의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전문적으로 이루저어지기 시작했다. 나라 별로는 스웨덴, 영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중에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엽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연구자들로 박호성, 강신준, 강철구, 최영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사민당일반에 대한 개설적 연구이거나 한 특정부분에 관한 부분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사민당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민주의 초기의 핵심적 문제의 하나인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형성과정과 쟁점 들을 둘러싼 논의들은 거의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맺음말



이상으로 독일과 한국에서의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았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통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1990년 대 초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기회주의, 개량주의, 그리고 독창적인 내용이 없는 절충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견해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 동시에 독일사회민주주의의 원조가 되는 베른쉬타인을 하나의 독창성있는 포괄적인 체계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이후의 급변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지니는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는 이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확인되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부분이 채워진다면 20세기 사회사상사를 한국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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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

Eduard Bernstein



                

0. 들어가며


1989년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민주적 통제의 부재, 경직된 경제체제와 자율적 참여로부터 단절된 정치체제 등의 문제점을 핵심적 모순으로 하여 붕괴되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프란시스 후꾸야마는 ꡐ역사는 끝났다ꡑ며 시장경제의 영원한 승리를 선언했고, 90년대는 개방, 탈규제화, 단일 시장화의 시대로 되면서 전세계는 신자유주의의 세상이 되었다. 소련의 국가주도의 사회주의가 경직성과 그에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외부적 충격으로 붕괴되었다면,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닌 또 다른 한 축인 사회민주주의는 어떠한가.

80년대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유럽 좌파정당의 실각과 미국과 유럽, 그리고 영국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경우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의 변혁이 가능하리라는 이념 자체의 문제와 궁극 목적과 수단과의 딜레마, 또한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의 동요 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득표기반의 확대와 연립정부에의 참여가 가져온 제약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의 탈과격화와 자기정체성의 동요를 가져온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민당들이 민영화 등 시장경제적 요소를 과감히 도입하고 복지수당 삭감을 비롯한 긴축정책을 표명하며 좌파정당에서 탈피해 사실상 중도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토론과 득표활동, 의회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권력장악이라는 목적과 민주적 방법을 통한다는 원칙 사이에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헤롤드 라스키는 ꡒ자본제적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돌발적 행위를 통해 유권자가 섣부르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결정하는 것까지 용납하진 않을 것ꡓ Herold Laski, 1935, 'Democracy in crisis',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두 경로가 이와 같이 모두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질서는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폭력적 방식에 의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자유시장제도에 의한 여러 가지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과제물에서 체제대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최초로 이념적 정식화한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념적 근원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1. 생애


베를린 시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1850년 1월 6일 베를린 중하층계급 거주지에서, 배관공이었다가 후에 철도 기관사가 된 쟈코프 베른슈타인(Jakob Bernstein)의 일곱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베른슈타인은 명석한 학생이었지만 김나지움을 졸업하지는 못하고, 열 여섯 되는 나이에 베를린 은행의 수습사원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두게 된다. 그 후로 공식 교육 없이 혼자 공부하는데, 그것이 대학출신 지식인들로 이뤄진 사회주의 운동권 내에서 이론가로 활동하는데 큰 걸림돌은 되지 않았다. 1869년 말 수습사원을 마치고 다른 은행에서 행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878년 독일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870년대 초, 그와 몇몇의 동료들은 ꡐ유토피아ꡑ라는 이름의 소그룹 토론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이론을 얕은 수준에서나마 접한 베른슈타인은 당시 라살레주의자들과 치열하게 다투고 있던 아이제나허에 입당했다. 1872년 2월의 일이다.

베른슈타인이 사회민주당원으로 첫발을 내딛던 1870년대 초반 독일 사회주의는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로 분열되어 소모적인 싸움을 하던 시기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정책 1871년 이후 물가상승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개되자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발의하고 노동자조직과 좌파 출판물에 체계적이고 전횡적인 탄압을 가했다. Franz Mehring, Geschichte der deutschen sozialdemokratie, Ⅳ, pp.39-48.

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는데, 그 결과 1874년 선거에서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 베른슈타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연설 활동으로 당 지도부 내에서 교제범위를 넓혀 나갔고 베벨과도 친교를 갖게 된다. 이론적인 차이를 넘어 서로에 대해 저열한 인신공격까지 퍼부었던 두 분파는 1874년 제국의회 선거결과를 두고 통합을 고려하게 된다. 마침내 1875년 2월 14일과 15일에 걸쳐 고타(Gotha)에서 최종적으로 당대회가 열리고 5월 22일에서 27일에 걸쳐 통합당대회를 개최하고 고타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통합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이 출범했다. 엥겔스는 고타강령 초안을 보고 맑스주의 원리가 위태롭게 된다는 견지에서 통합에 반대하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고 마르크스는 브라케에 보낸 ꡐ고타강령 비판ꡑ에서 ꡐ이 강령은 훌륭하기는커녕 라살레주의에 대한 신앙을 떨쳐내지도 못했다ꡑ고 논평했다.

후에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이론적 수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대체로 당시의 아이제나허들은 맑스의 이론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기본이념의 깊은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사회주의관은 이론적으로 맑스보다는 라살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그들이 라살레가 요구하고 제안했던 어떤 것들을 거부하긴 했지만, 이들은 라살레의 사상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주장, 즉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 시기에서 유래하는 주장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고타 강령은 맑스가 말했던 종류의 라살레주의자들의 승리가 아니라, 아이제나허들이 가지고 있던 불충분한 이론적 통찰의 결과였다. Bernstein, Sozialdemokratische Lehrjahre, pp.45-46



신당은 비스마르크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1877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베를린, 함부르크등 도심지에서 우세를 보이며 9%의 득표율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동안에 베른슈타인은 은행원으로 계속 일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877년 선거에서도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1878년 빌헬름 1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구실로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고, 마침내 1878년 9월 19일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입법되었다. 1878년 11월, 베를린에 준계엄이 포고되고 78명의 사회민주당 당원이 수도에서 추방되었다.


쥬리히 시대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발효되기 직전, 스위스에 있던 부유한 청년 사회주의자 회흐베르크로부터 비서직을 제의 받고 1878년 10월 12일 베를린을 떠나 스위스의 루가노로 이주했다. 회흐베르크는 엥겔스의 조소의 대상이 될 만큼 별 볼일 없는 공상가였는데, 그런 그의 일면은 사회주의가 인텔리겐차를 변화시킴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발상에서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발상에 신랄한 비난을 퍼부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법화된 당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에 나설 필요를 느꼈는데, 이러한 필요에서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쥬리히에 파견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주목하고, 쥬리히에서 중앙당신문을 창간할 것을 제안했다. 베른슈타인은 1879년 쥬리히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가 창간될 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81년 1월 편집장으로 임명되면서 편집자로서의 경력을 쌓는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베른슈타인의 일시적 외국체류를 망명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쥬리히는 런던과 더불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중심지여서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과 사회민주주의 활동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불법화된 상황에서 외국에서 비밀당대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활동을 벌인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당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후에 엥겔스가 언급한 대로 ꡐ당 역사상 최고의 신문ꡑ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또, 사회주의자 탄압법 기간 중 처음으로 진행된 1881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12명의 의원을 진출시키며 승리를 거두고, 이에 자극 받은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입법에 의한 노동자의 복지향상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1883년 의료보험 입법, 1884년 사고보험법, 1889 노후보험법을 입법한다. 모든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884년 선거에서도 승리한 사회민주당은 그러나 곧 당내 좌우파간 분열이 노골화된다. 분열은 독일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식민지 팽창에 대한 입장에서 불거져 나왔는데, 다수파는 식민지 확장이 독일노동자들의 고용기회를 창출한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선로 건조에 찬성했고, 베벨을 포함한 소수파는 모든 선로개척에 반대했다. 베른슈타인의 ꡐ사회민주주의자ꡑ또한 소수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분열양상은 나중에 사회민주당을 심각한 분열에 빠뜨릴 제국주의의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저널리스트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1886년 결혼을 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1887년 의회선거에서 다시 한번 10%의 득표율을 보이며 승리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에 있는 스위스 대사에게 압력을 가하고, 곧 있을 독일-스위스간 무역협정 개정에서 스위스 측에 양보를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쥬리히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베른슈타인은 런던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계속 발행하기 위해 1888년 5월 12일 스위스를 떠났다.


런던 시대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체류하는 기간, 마르크스주의에 최초의 체계적, 이론적 수정을 가하면서 국제적 인사가 되었으며, 17세기 영국 내전에 대한 뛰어난 역사저작을 간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런던에 체류한 기간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런던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스마르크는 실각하고,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1890년 폐지되기에 이른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더 이상 해외에서 당 기관지를 발행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수배자였던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머물면서 ꡐ전진ꡑ의 런던 통신원과 카우츠키가 발행하던 이론지인 ꡐ신세대ꡑ의 정규 기고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주요조항이 폐지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몇 가지 결과를 낳았다. 그 중 하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탄압기를 거치면서 득표수를 3배 이상 증가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민주당이 의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당으로 된 것이다. 새로워진 합법정당은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20% 득표수를 보이며 경의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점차로 개량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개량화의 움직임을 감지한 베벨은 1891년 에어푸르트 당대회에서 기존의 라살레주의적 요소들을 일소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게 한다. 에어푸르트 강령의 이론부분은 카우츠키가, 전술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책임집필했으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견지해 불과 몇 년 후 시작될 수정주의 공세에 저항해 스스로를 지탱할 기반이 되었다.

1890년대는 베른슈타인이 그의 수정주의 이론을 만들어낸 중요한 시기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유언 집행인으로 지목될 만큼 엥겔스의 신임을 받았던 그가 베른슈타인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는 최초의 논문을 엥겔스의 사망 1년 후인 1896년에 낸 것으로 보아 엥겔스와의 관계 때문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이탈이 늦어졌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피터 게이, ꡐ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ꡑ 한울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계기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영국의 개량주의적 분위기를 들 수 있는데, 베른슈타인은 자기 조국과는 달리 공장법이 제정되어 있고 경찰이 파업을 파괴하지 않는 영국의 상황을 보면서 평화적으로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1890년대 유럽은 근현대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기였고, 영국의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또한 페이비언들의 점진적인 방법이 그가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의 기술에서 수정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점에 그의 고민을 들여 볼 수 있다.


저의 이러한 ꡐ털갈이ꡑ는 바로 장구한 이론적 진전의 결과이며, 이러한 전환이 특정주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자체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까지 오랜 고민이 있었습니다. 2년 전까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가르침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실천적 현실에 끼워맞추고자 했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론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것은 우둔한 짓입니다.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Bernstein to Bebel, 1898. 10.20., Bernstein Archives


ꡐ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ꡑ을 분별하고자 했던 베른슈타인의 사고의 전환은 1896년에서 1898년까지 ꡐ신세대ꡑ지에 게재된 ꡐ사회주의의 제문제ꡑ라는 논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헤겔주의의 문제, 헤겔주의 대신에 윤리적 측면을 강조할 것, 프롤레타리아 궁핍화 테제, 자본주의 붕괴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의 논조는 비교적 조심스러웠으나, 그의 논문이 사회주의의 궁극 목적을 무시하고 있다는 영국의 사회주의자 벨포트-백스의 지적에 대해 ꡐ나는 사회주의의 궁극목적에 관심이 없다. 다만 내게 의미있는 것은 단지 운동 자체이다.ꡑ라고 대답함으로써 폭풍 같은 논쟁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격렬하게 진행되는 논쟁 속에서 카우츠키와 베벨에게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라는 요구를 받고 1899년 3월에 ꡐ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ꡑ라는 책을 내게 된다. 후에 이 책은 수정주의의 경전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베벨과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의 ꡐ수정ꡑ을 격렬히 비판하고, 스스로 당을 떠나주기를 요구했으나 끝내 그를 제명하지는 않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국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으로 남은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 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이 현안이 되어 있던 1901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귀국한 베른슈타인은 1902년 3월 선거에 출마해 의회로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12년 외교정책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는 의회에서 별로 주목받는 인사가 아니었다. 계속된 수정주의 논쟁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당내 급진파들은 베른슈타인의 제명을 요구했으나, 토론 끝에 급진파는 제지당하고 또한 수정주의자도 견책을 받는 등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행동은 수정주의식으로 하고 동시에 수정주의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급진파와 가까워지게 된다. 이는 베른슈타인이 대부분의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달리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베른슈타인은 황제가 주장하는 ꡐ영국의 위협ꡑ이라는 것은 조작된 것이고 독일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군비증강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동맹이라고 주장, 외교정책 논쟁에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일어난 1914년, 그는 전시공채 발행에 대한 태도에서 판단착오를 일으킨다. 베른슈타인은 사라예보 암살사건과 프랑스 사회주의자인 조레스 피살사건의 배후를 러시아로 보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전 초기의 유유부단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전쟁에 대한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전시공채 발행 투표에서 기권하는 등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한참을 망설이면서까지 당이 분열되기를 원치 않았던 베른슈타인은 그러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제 2인터네셔널을 붕괴시키고 온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정권을 지지한 독일 사회민주당과 1916년 3월24일 결별하게 된다.

말년의 베른슈타인은 점차로 고립되어 갔다. 당으로 복귀했으나 당 지도부와의 접촉도 단절되고 1920년에 의회에 다시 들어갔지만 주된 활동은 집필활동과 후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말년에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그는 히틀러 집권 6개월 전인 1932년 12월 18일 눈을 감았다.



2. 사상


수정주의 등장의 배경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변화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실천과 대비되는 개량주의적 실천의 이론적 기반으로 자리잡게 된 사상체계라고 규정할 수 있다. 송 병헌, 1999, p90-91, 당대

또한 그에게서 파생된 사회민주주의는 ꡒ사회주의를 목표로서 주장하고 그러한 사회주의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이상적 정치과정으로서 의회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운동을 가르킨다ꡓ Wilde, L. 1994, Modern european socialism. Aldershot: Dartmouth publishing company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ꡐ수정ꡑ하게된 계기를 베른슈타인 개인의 성향과 그가 망명생활을 하던 영국의 개량적 분위기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수정하겠다고 나서기 이전부터 이미 독일 사회민주당의 활동은 개량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를 들고나서자마자 많은 수의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남부 독일지역 당원들의 경우, 1890년대 초반의 농업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선거인의 다수가 소농이기 때문에 소농에 대한 지원방침을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개량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정주의의 등장배경을 좀 더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적 사고를 하게 되는 1800년대 후반에는 자본주의가 성숙되면서 마르크스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그것은 사회보험에 포괄되는 인원의 증가, 신 중간계층의 등장, 노동자층의 생활수준의 향상 등이었는데 이러한 현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적 붕괴론에 대해 의심을 갖게 했다. 이런 측면에서 수정주의를 1890년대의 경제적 호황기의 이론적 반영이라고 하는 평가도 있다. Steinberg, 1976, Sozialismus und deutsche Sozialdemokratie. s. 37

또한 정치적으로는 비스마르크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의회 내에서 세력을 성장해 나간 상황에서 전술적으로 의회활동에 점차 더욱 치중하게 되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890년대이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국가로의 통합가능성에 공감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개량적 조류의 확산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 라살레주의, 페이비언주의도 베른슈타인에게 영향을 준 조류들이다. 거기에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일부 부분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인용하고 재해석,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부르조아지 및 정부는 노동자당의 비합법적 활동보다는 합법적 활동을, 반란의 모든 결과보다는 각 선거의 결과들을 훨씬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또한 투쟁의 조건들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였다. 1848년까지 모든 곳에서 최종적인 승패를 결정하였던 구식의 폭동이나 바리케이트를 친 시가전은 상당한 정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

                                            -엥겔스, 1895, ꡐ프랑스 계급투쟁ꡑ에 붙인 서문.


결론적으로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실재하는 의회내에서 벌이는 개량적 활동과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경직된 이론에 수정을 가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주의의 이론적 전개

에어푸르트 강령의 예상과는 달리 19세기 말 자본주의는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있었다. 1893년에서 1902년 독일의 산업생산률은 45% 증가했는데 이는 186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상황과 더불어 선거에서의 계속되는 승리를 보며, 붕괴론적 전망을 기본으로 한 에어푸르트 강령의 사회혁명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달성 할 것이라는 개량주의적 전술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합법적 틀 안에서 다양한 계층들을 노동자와 사민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되었고, 또한 이론은 변화된 현실에 맞추어 ꡐ수정ꡑ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변화된 현실이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의 집중과정을 통해 소기업이 몰락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생, 유산자와 무산자의 차이가 확대되어 마침내 붕괴한다는 것인데,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현실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기업의 집중화가 일어나긴 했으나, 소기업이 몰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광범한 중간계급과 새로운 소기업의 등장으로 붕괴론적 예견과 어긋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ꡒ더 이상 붕괴론적 사회관은 현재의 발전하는 사회에 전혀 맞지 않는다ꡓ E.Bernstein, 1908, 'Zum Reformismus'. Sozialistische Monatshefte, ?,3, S. 1402

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상황에 대해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론을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계층변화의 양상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카우츠키식의, 혹은 더 나아가 마르크스-엥겔스의 계급관점에서 이탈하는 것인데, 결정적으로 정통이론의 계급 양극화론과 프롤레타리아트 궁핍화론을 부정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보기에는 계급의 양극화론은 현실을 무시한 극도로 단순한 관점이며, 현실의 상황은 오히려 자본주의 집중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숫자가 늘어나며, 궁핍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체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베른슈타인은 자본가와 고소득자를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ꡒ현실에서 자본가의 수는 경제기업의 강력한 집중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 증가해 왔다. 따라서 프로이센에서는 50만 마르크 이상의 재산 소유자 수가, 소득통계가 최초로 이루어진 1895년부터 1914년까지 50%이상 증가했으며, 최상위 소득계층은 더욱더 강력하게 늘어났다.ꡓ Bernstein, 1923, 'Die nachsten moglichen Verwirk- lichungen Sozialismus' Der Sozialismus einst und jetzt. S. 129

이렇게 자본가의 개념을 확장시키다 보니, 시민계급의 내용을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한 사회의 상당수 구성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계급투쟁론에서도 ꡐ계급투쟁과 타협은 결코 절대적 대립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운동의 형태들이며 운동만이 영원한 것이다ꡑ Bernstein, 1901, 'Classenkampf und Compromise' S.162

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만약 현실에서 중간계층이 소멸하지도 않고 오히려 증가한다면 노동자-자본가 계급대립이 첨예화되어 전통적 의미의 산업노동자들의 숫적 증가에 의한 정권장악이라는 에어푸르트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전망의 타당성에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에게는 노동자는 아직 사회주의를 달성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인구의 작은 부분이며, 단일한 이해와 요구를 지닌 그러한 덩어리도 아니었다. 이런 발상에서 베른슈타인의 현실 개량적인 전략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사회주의 달성의 대안적인 전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확대였다. ꡒ민주주의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 곧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획득하는 수단이며,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형태이다.ꡓ Bernstein, 1977,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 Berlin: J.W.H. Dietz S. 134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속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공장법의 제정을 두고 보통선거권의 획득에 의해 노동자 권리의 현실적 성장이 가능해졌으며, 좋은 공장법에는 공장 전체를 국유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회주의가 들어있다고 언급했다. 베른슈타인이 이처럼 중요하게 여겼고 사회주의 실현의 방도라고 본 개량은 과연 어떤 개념인지는 다음 언급에 나와 있다.


바로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작은 활동이다. 현대 노동운동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센세이셔널한 전투가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씩 더 강인해지는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다가오는 지위이다. Bernstein, 1901, 'Zusammenbruchstheorie und Colonialpolotik: Nachtrag' Zur Geschichte und Theorie des Socialismus: Gesammelte Abhandlungen. S. 246, 247



또한 그는 사회주의의 달성이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에 따른 긴박한 붕괴상황이 아닌 작은 규모의 현실적 진전에서 반드시 올 수 있다며 개량 가능성에 대해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동시에 사회에 대한 진화론적 신념이 수반된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수정주의적 전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윤리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붕괴론을 부정한 그는 사적 소유권이 보장된 상태에서의 일종의 혼합된 사회주의 개념을 내세웠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서처럼 필연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ꡐ윤리적 요소ꡑ에 의지한 것이다. 그는 정의에 대한 관념이나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를 이끌어 내는 추동력이며 지속적인 대중행동을 위해서는 ꡐ도덕적 충동ꡑ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주의 개념규정은 정치, 사회조직에 대한 규정보다는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의 형태로 보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주의를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회주의 규정은 자유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듯이 사회주의 달성에서 시민사회에서 독립적인 집단간의 연대성이 그토록 중요하며, 개인의 권리, 동등한 자유와 특권의 폐지 등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자유주의와 이념적으로 무척 유사한 것이 된다.


수정주의 비판

베른슈타인이 상정한 수정주의적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한 입법으로 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이뤄내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적 발전과 더불어 ꡐ사회적 연대ꡑ로써 점진적으로 그러한 이상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는 진화론적 신념을 담은 것이다. 그러한 그의 수정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지점은 무엇인가.

먼저 진화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개량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들 수 있다. 그는 기존 질서 안에서 개량적인 활동이 ꡐ누적ꡑ되어 가는 것에 대해 과대평가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질적 단절점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주의라는 목적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관점은 생산 및 소유 관계에 따르는 계급모순을 무시한 것으로, 역사를 경제적 진보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진화론적 관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또, 그의 진화론적 관점은 식민주의에 대한 긍정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발달된 선진 공업국가에서 의회주의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후진지역에서의 사회주의 성립의 가능성이나, 제3세계 식민지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베른슈타인에게 식민주의는 선진국의 제도와 산업을 식민국가에 이전시킴으로써 식민지에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발상이다. 한국의 경우에서는 6,70년대 파시즘적 성장을 옹호하는 경제사가들이 역사발전에 있어서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양적 성장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 시기를 성장의 시기, 근대화의 시기, 6,70년대의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되는 시기로 규정하면서 긍정적이며 진보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른슈타인의 사상과 부르조아적 자유주의와의 친화성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베른슈타인의 계급관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자본가를 생산수단 소유의 관점이 아닌 화폐의 소유여부에서 바라보아, 시민계급과 자본가를 결정적으로 혼동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중산계층의 계급적 지위와 역할,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고, 신 중간계층의 진보성에 대해 근거없이 낙관함으로써 노동자-자본가간의 원천적 모순을 간과했다. 게다가 그는 노동계급에 대한 이상화된 관념- 부르조아지, 성숙한 노동자, 중간계급간의 사회적 연대라는-을 지녔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실 예로, 그가 사망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나찌가 집권했는데, 이는 신 중간계급의 진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것이며 얼마나 유동적인 것인지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상의 추상성과 모호함, 그리고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는 개념은 독일 사민당의 체제 안주적인 실천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결국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 구상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주의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낙관론적 신념에 포박되어 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한 현실정치적 고려와 계급정치적 고려를 결여한 ꡐ진화론적 개량주의ꡑ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p243




3. 나오며


지금까지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수정주의적 사상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서유럽 사민당의 사상적 좌표가 되어 왔고, 현재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 상실과, 목표와 수단간의 딜레마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개량주의적 경향은 비단 서유럽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 지면상의 한계와 본인의 역량의 한계로 학생운동권에 한해, 베른슈타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으로 이 과제를 마치고자 한다.

한국의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먼저 제3세계 국가로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이 변혁운동에서 승리하는 과정은 주로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통일전선체와 주로 외세와 결탁된 소수의 지배세력간의 싸움에서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반외세 진영이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근거로 지배세력을 정치적으로 왜소하게 만들고, 전민봉기를 통한 것이었다. 물론 2000년대 한국의 상황을 베트남이나, 대장정 당시의 중국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나,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서유럽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운동권 사이에서는 ꡐ의회환상ꡑ이 일정정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른바 민족해방계열이나, 21세기 진보학생연합 계열, 민주민주계열을 상관하지 않고 나타나는 경향이다. 한국사회를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되어 있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에도 비교적 독립적인 시민사회로 보는 관점에서 섣부르게 의회주의로 이행한 것인데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 구체적 사례를 한 두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97년 대통령 선거, 그리고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우리 국민들의 변화된,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소중한 바램대로 싸워야만 합니다. 국민들의 바램대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민중들이 믿을 수 있는 민주적 정권을 세우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염원과 같이 진정한 국민들의 편,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국민의 대안으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정치세력화를 해야 합니다. 97년 대통령 선거,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를 추대하여 선거에 임하고 여기에서 얻은 성과와 신뢰를 바탕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정당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당을 중심으로 투쟁하며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집권을 향해 뛰어야 합니다.

내년 대선 투쟁.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이 공동추대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와 함께 합시다. 우리의 후보와 함께, 국민들과 함께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선전합시다. 그리고 모든 진보진영이 철통같이 단결해 투쟁해서 8%이상을 득표합시다. 이렇게 투쟁하면 내년 대선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진영 정치세력화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1996, 40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민중과 함께 승리하는 한총련ꡑ 김경수, 박상진 선거운동본부, p41 


이들은 민족해방계열 내에서 ꡐ사람사랑계열ꡑ이라고 불리는 소수의견을 내놓았던 사람들로, 92년 대선 까지는 비판적 지지론을 폈으나, 96년 4.11 총선에서는 민족민주운동이 ꡐ국민정당ꡑ건설로 일대 도약을 이뤄낼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역별로 ꡐ진보적ꡑ인 후보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97년 대선에서는 국민승리21 지원사업을 하며 민족해방주류의 입장과 차이를 보였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96년 4.11총선은 정치세력화의 발판이며, 97년 대선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민족민주운동권이 정치세력화 했음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2000년대에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단계론적 구상을 보였다.


...하지만 총파업투쟁 이후 초기 사회세력화에 성공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보정치세력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민중들의 요구들을 반영하지 못하는 보수정치의 균열은 이제 더 이상 봉합되지 않는다. 97년 대선, 98년 지자체, 그리고 2000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 건설을 향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막힘 없이 흘러갈 것이다.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정치세력화, 중앙정치구도의 보수/진보구도로의 개편은 국민승리21의 진군과 함께 가속화될 것이다. 1997,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Power of one 세상을 바꾸는 힘ꡑ 박종화, 감동완 선거운동본부, p21


위의 글은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서 ꡐ21세기 진보학생연합ꡑ이 펼친 주장의 일부이다. 이들은 90년대 들어 학생운동권에 나타나기 시작한 수정주의적 경향의 대표적인 세력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특히 ꡐPower of one', 즉 개인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다분히 개인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구호를 들고 나왔으며, 올해에는 ꡐ충동ꡑ이라는 구호를 들고 선거에 출마해, 베른슈타인의 ꡐ개인의 도덕적 충동이 사회변혁의 추동력ꡑ이라는 말과 연관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사회적 모순을 보수, 진보의 대립으로 보고 그러한 형태로 전선을 재편하는 것이 한국사회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민중당의 실패에서 보듯 -또한 김문수, 이재오, 이부영의 최근 행보로 볼 때- 한국사회에서 보수, 진보의 구도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또한 한국사회가 서유럽과 다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또한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지원 사업을 벌여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들이 지지하는, 혹은 지지했던 국민승리21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국민승리21의 성격을 함부로 규정해 버렸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이 글에서 국민승리21의 성격을 말할 때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는 최초로 총파업을 호소하는 대선후보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과연 그랬는가는 구체적 정책, 선거운동 방식, 내걸었던 구호 -사민주의적 정책, 전철역에서 유럽좌파의 상징인 장미꽃을 나눠주고, TV토론회나 선거 팜플렛에서 지나치게 표를 의식하는 점, ꡐ일어나라 코리아!ꡑ라는 구호- 를 미뤄 봤을 때 의문의 여지가 많으며, 오히려 대중추수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난 대선을 평가하면서 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와 97년 권영길 후보의 득표수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백기완 후보는 주로 도시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를 보인 반면, 권영길 후보는 울산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노동자층이 두터운 지역에서 선전했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들의 계급정치적 의식의 확대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자의적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울산지역의 높은 득표수가 과연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울산지역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ꡐ민주노총 위원장ꡑ인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장 노조, 혹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되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에피소드를 지적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이것은 과연 진보정당의 행보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97년 초 정국을 강타했던 총파업이 시일을 끌면서 민주노총 상층에 부담을 주게 된다. 나중에 국민승리21을 구성하게 되는 일부 민주노총 상층은 그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ꡐ수요일파업ꡑ이라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지침을 내리게되는데, 물론 결과는 처참하게 끝났다. 이러한 지침은 아무리 봐도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파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희생을 요구하며 어떤 성과를 남기며 준비과정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타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노동악법이 날치기 통과된 상황에서 파업은 어떤 의미였을까. 파업은 노동자의 요구를 내세우는 가장 강경한 수단이고 힘의 균형에서 한번 밀려나기 시작하면 작년 4.19 지하철 파업에서 보았듯이 노조에 상당한 피해를 가져오는 방법이며 그것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는 아무리 강력한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업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이른바 ꡐ국민여론ꡑ에 대한 부담과 계속 파업을 조직화 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현장의 요구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민주의의 딜레마와 관련해서 한번 음미했으면 하는 일화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피터 게이, 김 용권 옮김 (1994) 「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한울

보 구스타프손, 홍 성방 옮김 (1996)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사회주의」 새남

강 경성 (1992) 「베른슈타인의 맑스주의 수정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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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그람시 - 이종래

Antonio Gramsci의 생애와 사상 -노동운동과 그람시

                                                 


                                           이종래(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1. 들어가면서: 그람시 사상의 배경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반도의 최남단인 자르디니아 지방인 알레스(Ales)에서 1891년 출생하여 1937년에 죽었다. 이태리 공산당 활동을 한 대가로 1927년부터 1937년까지 만 10년간의 수형생활을 하였으며 이 기간에 '옥중수고'라는 저작을 남긴 맑스주의자이다. 그의 아버지가 낮은 직위의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던 사실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질병으로 점철되어 있다. 즉 그는 어린시절 얻은 질병으로 인해 곱추라는 신체적 장애까지 얻게 되지만 당시 맑스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소아병적 편협에서 비롯된 사상적, 정신적 불구에서 벗어난 사상가로 평가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그람시의 정치적 입장은 너무나 예외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예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생애사적 연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람시의 출생지역인 남부 이태리의 사회적 상황을 먼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남부 이태리는 산업화된 북부와는 판이한 농업지역이다. 그람시 스스로가  강조한 '남부 이태리 문제'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경제적인 갈등을 봉합하는 현상에서 출발한다. 이 지역에서 카톨릭이라는 종교는 사회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된 북부의 노자간의 계급대립과 달리 봉건적인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여전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그람시는 남부 이태리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인습과 관념과의 투쟁 없이 불가능한 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남부 이태리 문제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사회주의 운동 전체로 이전되면서 이른바 전략과 전술의 수립으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 사회구조와 행위주체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의식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그람시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일상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변혁적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의 도입은 주체의 자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람시가 자신의 인생을 "3배 혹은 4배로 뒤떨어진 지방민"이기 때문에 "후진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옥중수고 15: §19)1)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자평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서의 인식과 활동을 변화시키는 계기의 문제를 문화와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그람시를 문화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칭호를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람시의 이런 시도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나온 경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람시는 경험에서 체득된 생활의 원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과 질서로 사회화되는 장을 '시민사회'(società civile)로 개념화한다.2) 하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사회의 차이를 시민사회의 역사적 존재유무로 구분하였다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협소화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의 본래적 모습인 실천가로서의 모습보다 그에 대한 평가가 이론가로서 국한될 가능성이 커지기도 하지만 그람시의 본래적 관심사는 노동자 계급운동이었다는 사실이 호도될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저 그람시의 생애를 짧게나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된 '옥중수고'에서 '남부 이태리문제'에 관한 글들은 이태리에 국한되는 문제를 가진 반면 서유럽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한 '포드주의' 혹은 '아메리카주의'라고 표현한 주제들은 국내에 소개조차 변변히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가로서 안토니오 그람시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2. 청년기의 그람시: 대학시절



그람시의 청년기는 1912년 투린 대학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3) 그람시는 이태리??그리스 문학, 역사학, 철학, 언어학, 법학(사법)을 전공과목으로 택한다. 이 과목 중에서 언어학을 첫 번째 전공으로 한다. 이후 자신의 정치이론에서 대표적인 개념으로 알려진 '헤게모니'도 언어학에서 차용된 개념이라는 사실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전공과목의 선택으로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전공과목들의 선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인문학에 대한 그람시의 높은 관심과 반대로 경제학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학시절 전공과목들의 조합은 이후 2차 인터내셔날 시기에도 그람시가 경제주의로 기울지 않고 문화적 관심을 강조한 이유를 밝혀주는 논거로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시 노동자계급 운동에서 경제주의적으로 환원하는 우파와 문화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좌파로 쉽게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람시의 독자성은 두드러진다. 그람시의 이런 독자성은 유년시절의 경험과 함께 대학시절의 학업과 정치활동에서 토양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후 그람시의 사상을 가능하게 한 토대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대학시절 새로운 지식습득과 더불어 실천 활동을 병행한다. 1913년 이래 그람시는 이태리 사회당(PSI)의 당원이었고, 1914년 그는 사회당내 '변혁적 좌파그룹'에 합류한다. 1915년 그는 졸업이후 대학이나 중등학교에서 이미 보장된 교수나 교장과 같은 좋은 직장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지만, 사회당 중앙위원회에서 발간하던 잡지 'Avanti'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 사회당 기관지에 지방정치, 시사문제 그리고 각종 문화 비평적인 글을 주로 발표한다. 그람시가 1916년에서 1920년 사이 170편에 달하는 연극평론을 발표한 것도 바로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으로 보여 진다.


그람시는 1915년 키엔탈(Kienthal)과 1916년 짐머발트(Zimmerwald)에서 열린 반전회의에서 레닌의 정치적 입장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정통 맑스주의와 교감을 시작한다. 물론 이전의 시기에도 그람시는 속류 맑시스트들의 글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통 맑시스트의 이론을 처음으로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통 맑스주의와의 만남이후 그람시는 맑스의 글을 정독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1918년 5월 4일 사회당 투리노 시지부의 주간지에 맑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된 '우리의 맑스'에서 그람시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자신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람시는 먼저 정치경제학에 담겨진 이념이 순수한 진실로서 의미가 있기보다 그 이념이 경제적 현실의 부당성을 알리고 폭로하는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정치경제학적 이념은 "자의적인 성격"과 "허구로 가득 찬 종교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추상"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Gramsci, 1918: 37).


여기서 우리는 2차 인터내셔날 시기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붕괴에 따른 국가소멸론이 유행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람시의 주장이 지닌 의미성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경제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자본주의가 자연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보다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인 경제적 착취 구조를 널리 알려 사회적 설득력을 높여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실천적 활동이 당면과제라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인식은 맑스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종교적인 진리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활동을 밑받침할 수 있는 정당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탁월성은 존재한다고 그람시는 주장한다. 그람시의 이런 맑스주의 해석은 주의주의(Voluntarismus)적 전통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노동자 계급운동에서 자신의 입장은 주의주의적 운동과 거리를 분명히 두면서 자신만의 독자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3. 노동운동가로서 그람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혁명5)이 일어난 1917년에 그람시는 세계 1차대전(1914-1918)으로 야기된 자본주의 위기국면에서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개입은 절박할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 '화해할 수 없는 혁명 그룹'에 가입한다. 그람시의 이런 정치적 입장은 당시 사회당이 취한 전쟁 불개입이라는 소극적 태도에 대한 명확한 반대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이 혁명 그룹의 조직원이자 이태리 사회당 투린 시지부의 책임자로서 1919년 6월 기업내부 노동자 조직을 러시아의 소비에트 모형에 따라 재편할 것을 제안한다. 즉 그람시는 이태리에서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제안한 것이다. 그람시의 이런 제안은 1920년 투린 시에서 2십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으로 현실화되지만, 그람시가 주도한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독일의 칼 립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와 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 1871-1919)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6).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가진 급진적인 '기동전'에 반대하여 '진지전'적인 사고를 그람시는 이미 그 당시에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만 한정되었다면 그람시는 이 운동을 문화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즉 이태리 '노동자평의회'운동의 기관지인 'Ordine Nuovo'는 정치적인 선전??선동잡지가 아니라 문화 잡지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 운동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동자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라는 점이다. 여기서 기존의 지배질서가 묻어 있는 사고와 표현방식, 태도가 아닌 노동자적인 혁명적인 사고, 표현방식과 태도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혁명의 관건이라는 그람시의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단을 모태로 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18/19년에 독일 공산당(KPD)을 만드는 계기로 되듯이, 이태리에서도 노동자평의회운동은 1921년 이태리 공산당(PCI)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초석이라는 점에서 두 운동의 공통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조직건설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혁명의 방식이 일반화되던 시기에 이른바 전위정당 건설이 시대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에서 이해가 되긴 하지만, 노동자평의회운동의 활동내용의 차이는 이후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에서 전위정당의 역할과 내용을 두고 논쟁거리로 된다.



4. 정치가로서 그람시



1921년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의 지도 아래에서 이태리 공산당(PCI)이 건설된다. 당시 이태리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운동이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파시즘을 특별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당시 이태리 공산당 지도부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차피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사회이기 때문에 파시즘은 그 다지 대단한 위협이 아니라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변종일 뿐인 것이다. 이런 정세인식에 따라 보르디가의 이태리 공산당은 볼셰비키 혁명과 같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는 전위정당화가 주요한 당면과제라고 보았다. 즉 파시즘에 반대하는 계급연합의 결성이 당면한 일차적인 과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보르디가는 부르조아적인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계급연합 보다 노동자 계급내부의 단결력과 응집력을 높이는 도구로서 전위조직의 건설이 당면 과제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보르디가의 이런 정세인식과 달리 그람시는 노동운동에 대해 파시즘이 지닌 위협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대중의 동원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파시즘 반대를 위한 대중동원 투쟁은 사회당, 부르조아 민주주의자와의 연합으로 더욱 사회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 나오게 된다. 바로 이렇게 해당 시기의 단기적인 정세에 대한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식과 운동전망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명목적인 이런 차이는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실제적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람시가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주도하였을 때 그의 정치적 입장은 1차 대전이라는 자본주의 위기상황을 방관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좌파 주류세력에 반대하여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투쟁을 조직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주의주의적 전통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이 주의주의적 흐름이 급진화된 소수 전위정당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그람시는 대중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의주의적 흐름과 일정 정도 차이를 분명히 한다. 대중이 주체가 된 투쟁이 없으면 서유럽 사회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그람시적인 인식은 바로 이 시기에 획득된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을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의 단순한 표현양태로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반동의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인식은 시대를 앞선 그람시만이 가진 탁월성이다.


그람시가 미리 예측한 노동운동의 위기상황은 1922년 10월 무솔리니가 '로마로의 행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사실로 드러난다.7)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1926년까지 의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긴 했지만 이태리 공산당에 대한 합법??반합법??불법적인 백색테러를 벌인다. 이런 정세에서 그람시는 1922년 이태리 공산당 대표로 임명되어 코민테른의 본부로 이동하여 잠시 화를 면하지만, 1923년 파쇼정권은 공산당 지도부인 보르디가와 그람시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탄압을 본격화한다. 파쇼정권의 탄압으로 당의 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1924년 4월 그람시는 면책특권을 지닌 의원 신분을 가지고 이태리로 돌아온다. 같은 해 코모(Como)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태리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그람시는 보르디가의 종파주의적 노선을 강력히 비판하지만, 대의원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같은 해 8월 코민테른에 의해 이태리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된다. 이로서 그람시는 정치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람시는 당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반파쇼 연합을 위해 야당들에게 '반(Anti)의회'를 제안하지만 성사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람시는 반파쇼 연합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주장하였고 농민과 노동자의 계급연대를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이 노력은 1926년에 당내에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즉 그람시의 노선이 이태리 공산당 3차 전당대회에서 다수파의 지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태리 공산당은 전위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의 전환을 하게 되었지만, 파쇼정권은 같은 해에 의회를 해산하면서 공산당을 불법화한다. 그람시는 1928년 재판에서 20년의 형을 판결 받는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람시는 1928년부터 집필허가를 얻어 사상의 편린이 담긴 짧은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짧은 그들의 모음집이 이후 '옥중수고'로 출판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로 된다.8)


    


4. 사상가로서 그람시



그람시가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끼친 공헌과 평가는 우선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그람시는 서유럽 맑스주의의 원조로서 이야기된다. 이전의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 사회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그람시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이후 정통 맑스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지금의 상황에서 그람시 연구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 정통 맑스주의와 서유럽 맑스주의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대비해 봄으로써 지금의 노동운동이 처한 대안 상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람시 연구를 통해 노동운동에게 하나의 대안적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그람시 연구는 그람시의 사상적 공헌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새롭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그람시가 맑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차용한 많은 개념들이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회자되면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과학에서 학문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 개념인 '시민사회', '헤게모니', '역사적 블록', '진지전', '기동전', '포드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람시가 개발한 개념들 중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분석을 위한 개념보다 문화에 대한 개념이 현대사회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9) 그람시하면 문화주의자라는 애칭이 의례적으로 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통속적인 분류법은 그람시 이해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그람시가 문화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시 노동자 계급의식과 노동조합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화적 접근법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람시는 자본주의적 생산력발전이 가져오는 상부구조의 변화는 노동자 계급의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람시는 현대자본주의 발전은 노동자 계급운동에 부정과 긍정이라는 이중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시의 속류 맑스주의자들은 기술발전에 무한한 신뢰를 주었지만 그람시는 기술발전에 부응한 생산력 상승이 계급운동의 성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람시는 기술발전이 노동자 운동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면서 기술발전에 대한 신뢰는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논박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탁월성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의 전망에 대한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먼저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에 대한 짧은 글들에서 파편적으로 실려 있다. 그람시는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고임금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그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이 산업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에 대해 먼저 반론을 제기한다. 그 이유로 그는 포드기업 종사자의 높은 이동성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빈번한 직장이동이 일어나는 포드기업의 고임금정책은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과 결과를 가지는지에 주목한다. 먼저 그람시는 포드의 고임금정책은 노동자 계급의 내부분화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즉 기업은 평균노동시간이 동일한 조건에서 생산성 증가를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유형의 숙련 그리고 노동력의 양과 사용방식의 변화를 강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드 자동차회사의 고임금을 그람시의 표현대로 하면 "기업이 노동자들에게서 차별성을 요구"(옥중수고 9: 1129)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인식에서 그람시는 포드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합리화를 꾀한 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포드주의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그람시는 포드주의적 대량생산방식이 기업과 노동조직의 합리화로 이어져 생산체제의 변화를 수반하지만 이것이 노동자의 삶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자본운동이 전환하는 사회적 이행과정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은 심화되면서도 기술발전으로 인한 물질적 분배는 더욱 용이해져 노동자 계급의 체제내 포섭이 강화되는 이중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노동자들을 체제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자본주의의 본래적 모순은 더욱 은폐될 수도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의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다는 그람시의 지적은 미국주의적 문화적 비평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람시는 유럽과 미국사회의 차이를 먼저 개인주의적 전통의 유무에서 구한다. 유럽사회에서 이해관계에 기초한 경제적 개인주의는 다양한 이해집단을 형성하는 근거가 된다. 즉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성직자, 관료, 대지주, 대상인과 같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집단의 형성이 불가피한 반면, 미국에서 이해집단은 생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노동자와 자본가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10) 다시 말해 구체제의 잔존물인 사회집단이 부재한 미국은 자본운동의 진행에 따라 사회적 재편이 그 만큼 더욱 용이할 수도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유럽과 비교하여 산업생산에 기초한 금융자본의 분배와 축적의 기제가 미국에서는 더욱 쉽게 적용되면서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이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자본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 중심으로 이행하면서 자본운동의 고도화는 진행된다. 금융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수와 양의 계산에 바탕을 둔 자본 합리성으로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이 단계에서 자본운동은 시장의 무계획성까지 조절 예측하려 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가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시장의 비예측적인 성향 역시 제어될 수 있다는 평가한 그람시는 당시 서구자본주의를 '계획된 경제'로의 진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람시의 이런 평가는 당시 힐퍼딩(Hilferding)이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자본운동이 중심이 이동하면서 자본주의는 자신의 얼굴을 '조직된 자본주의'(Organisierter Kapitalismus)로 바꾼다는 주장과 동일한 맥락에 놓인다. 쉽게 말해 금융자본이 중심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자본 합리성에 의해 운용될 수밖에 없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수요에 대한 예측에 기초한 대량생산방식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노동자가 개성을 상실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고 본다. 노동자의 운명이 테일러가 말했듯이 마치 '옷 입은 고릴라'와 같은 대량생산 노동자로 전락할 가능성을 그람시는 미국에서 본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비관적 전망과 더불어 그람시는 미국주의의 유럽적 적용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또 다른 변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걱정과 염려를 한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 노동자 계급의 탈계급화 현상은 또 다시 굴절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람시는 평가한다. 즉 미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적 세력인 대토지를 소유한 전통적인 지주계급과 대자본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간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고 그람시는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통적 부르조아지와 신생 부르조아지간의 계급연합이 형성되면서 파시즘적인 국가조합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람시의 파시즘에 대한 해석은 정통 맑스주의적 해석과 달리한다. 즉 파시즘의 등장을 자본주의가 지닌 내재적 모순의 결과로 해석하는 정통적 해석과 달리 그람시는 자본과 전통적 지배세력이 야합하는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지배계급 내부의 타협은 자본주의의 체제위기를 극대화하려는 노동운동의 급진성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가지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람시가 당시 코민테른의 지배적 견해와 달리 이태리에 등장하기 시작한 파시즘을 노동운동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파시즘의 도발에 대해 노동자 계급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보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체제의 유지가 당면의 과제라고 그람시는 강조한다. 전통적 지배계급과 신흥 지배세력이 연합하여 사회적으로 세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운동은 우선 권위적 국가조합주의의 대응형태인 '사회적 조합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람시는 본 것이다. 이런 '사회적 조합주의'의 건설이 노동자 계급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람시는 전통적 맑스주의 내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개량과 변혁이라는 이분법적 인식구조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발전은 노동자 계급에게 의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개량이 아닌 변혁적 내용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람시는 주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 포드주의가 일반화하면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이 순환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생활방식은 '물질적 궁핍'(Knappheit: Marx)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노동자의 전투적이고 적대적인 계급의식은 시민사회적인 규범과 질서의식으로 바뀔 수도 있다. 즉 생산방식의 변화는 노동자 계급에게 바로 동전의 양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수동혁명'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소비에트 혁명과 같이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여 주체적으로 '능동혁명'을 이룩하는 것과 반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화에 순응 혹은 적응하면서 계급적 자의식을 상실한 노동자 대중이 형성될 가능성을 그람시가 가장 먼저 본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집단주의적 전통이 경제적 개인주의와 접목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이 더 이상 확대 재생산되지 못하고 조직적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현재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람시의 우려가 기우가 아닌 현실로 벌어질 수 있는 고민임을 알 수 있다.


그람시가 말하는 포드주의란 단순반복 노동에 길들여진 테일러적인 노동자들이 대중화하면서 기계적인 노동에 길들여진 무리로서의 노동자들이 새로이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즉 노동력의 질과 조직이 평준화??균질화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집단성은 해체되면서 무리화되고, 이들의 존재양식은 자본운동에 종속되면서 노동자 계급내부의 직업구성은 더욱 분화, 전문화되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후 노동조합운동의 점진적 무력화와 더불어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층의 해체가 사실로서 증명된 서구 사회발전에서 그람시의 예측은 현실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람시가 서구 사회발전을 '포드주의'라는 짧은 용어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가로서 그람시의 면모를 숨김없이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비관적 예측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의 방향성까지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천가로서 그람시라는 또 다른 면모도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날 수 있다.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그람시는 현대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앞으로 더욱 연장될 수 있다고 전제면서 노동운동에게 새로운 대응을 요구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람시는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포드주의가 노동조합과 노동자에게 사회적 조건으로서 탈계급화의 경향성을 가져온다면, 이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은 새로이 형성된 공간에서 자신의 활동력을 강화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다. 즉 포드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상대적 고임금을 보장하면서 '강력한 내수시장'을 가져온다. 게다가 기업의 입장에서도 내수시장의 증대는 이윤확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반대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내수시장의 형성은 '비생산적인 부문에 종사하는 중간층'을 만들 수 있게 한다. 시민사회에서 자기 발언권을 지닌 시민층이 형성되면서 자본주의가 지닌 내재적 모순 혹은 노자대립에 따른 필연적 '재앙'은 완충되는 효과가 생긴다. 즉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국가조합주의가 우연이 아닌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중간층의 지지를 누가, 어떻게 획득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권력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기존의 지배세력이 중간층의 획득을 얻는다면, 자본주의는 중장기적으로 생존이 연장될 수 있다. 즉 당시 코민테른의 공식적 입장과 달리 그람시는 미국적인 포드주의가 유럽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고 전망하면서 노동운동의 대응은 소비에트 혁명과 같은 '기동전'이 아닌 장기적인 '진지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노동운동이 지도적 혹은 지배 계급으로 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계급연합의 체계인 '역사적 블록'을 만들어 내는데 달려 있게 된다. 하지만 그람시는 이 계급연합을 무조건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람시는 계급연합이 가능하려면 노동운동이 자본주의와 시민적인 국가에 반대하는 대중적 동원역시 허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11)


  


5. 결론: 그람시 다시보기



똘리아티는 1927년에 이미 그람시를 '노동자 계급의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똘리아티는 이태리 공산당기관지인 'Lo Stato operario'에서 그람시를 공개적으로 처음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당의 역사는 앞으로 계속해서 쓰여져야 할 것이다. 누가 이 역사를 쓰던지 간에 특별한 정치적 사건을 뛰어 넘으면서 전위로서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형성을 가능케 한 위대한 노선을 성립한 공헌은 안토니오 그람시에게 있다"(Togliatti, 1967). 똘리아티의 이런 평가와는 전혀 달리 그람시는 스스로를 남들에 비해 내세울 것 없는 3배 혹은 4배나 뒤떨어진 지방출신임을 스스럼없이 밝힌바 있다. 바로 이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체포된 이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 나는 조용히 다시 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게다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사람은 그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나의 도덕적 입장은 가장 훌륭하다고 본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나를 악마로 여기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나를 성자로 떠받들고 있지만 나는 순교자나 영웅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신념을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극히도 단순한 보통사람일 뿐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타인이 내리는 극찬에 대해 그람시 자신이 내리는 자신의 평가는 지극히도 담담하면서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평가와 달리 그람시의 진면목은 1989년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전의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정통인양 주장한 '기동전'의 비극적인 결과가 그대로 드러나면서 서구 사회과학계에서 그람시 다시보기가 이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이다. 게다가 동구권과 비교하여 서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지닌 특수성을 강조한 그람시의 사상적 편린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동구사회의 일반적 문제로 회자되고 있다.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원인 중에 이른바 시민사회의 부재가 이유로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시민권적인 권리마저 획득하지 못한 노동자 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에 앞장섰다는 역사적 역설마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자보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법??제도적으로 훨씬 나은 노동조건을 보장받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배신한 이 행동들의 기원은 시민사회의 부재보다 다른 이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주요한 이유는 현실과 이론과의 괴리에서 발생한 간극이 체제의 위기로 나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설명 가능하게 하는 이론의 구성은 그람시만의 고민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거쳐 간 모든 이들의 고민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그람시의 시도는 처음이 아니라 모두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람시 다시보기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이태리의 특수한 조건을 염두에 두면서도 매 시기마다 자신의 견해를 끊임없이 펼치는 그람시의 태도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태도일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일반적 의미조차 얻기 어려운 러시아적 모형을 반복 재생산하려는 일각의 시도가 무의미한 이유를 찾는 작업은 그람시 다시보기를 통해 쉽게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종교적 신념과 같은 믿음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려는 행위로 발현된다는 그람시적인 해석이 의미를 가진다. 노동자 계급의 행위는 하루아침에 변혁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일상생활에서 사고와 행위가 그물처럼 촘촘히 이어지면서 서서히 변화한다는 그람시의 평가에 이제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도 이제는 짧은 호흡보다 긴 호흡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평가와 기대는 우리 이전에 그람시가 이미 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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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 『Philosophie der Praxis』, Hamburg: Argument.


- , 1975, 『Gefängnis Hefte』, K. Bochmann??W. F. Haug(Hg.), Hamburg: Arg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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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b,「Antonio Gramsci (1891-1937)」, in 『Klassiker des Sozialismus II』, Walter Euchner(Hg.), München: C. H. Beck, pp. 209-222.



1) 인용의 편리를 위해 그람시의 옥중수고에 한해 앞으로 저자명이 아닌 책제목을 그대로 쓴다. 뒤에 나오는 수는 책의 권수를 의미한다. 특수문자인 §는 그람시의 옥중수고에 번호를 매기면서 생긴 표시인데 이것을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2) 그람시는 '실천의 철학'에서 "시민사회를 '사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조직체의 총체"라고 개념을 정의한다(Gramsci, 1967: 412). 공적인 지배도구인 국가와 달리 사적 영역이 개입된 규범과 질서는 시민사회의 발현물이라는 점이다. 국가가 아닌 바로 이 시민사회가 사회 유지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그람시의 사상적 독자성은 인정된다.   


3) 2차 대전이후 이태리 공산당(PCI)를 이끈 팔미로 똘리아티(Palmiro Togliatti)역시 자르디니아 출신이었고, 똘리아티와 그람시는 같은 해에 자르디니아 지역의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였다(Kebir, 1991a). 두 사람의 이런 특수한 관계는 그람시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4)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대학시절 스승인 언어학자 바르톨리(M. G, Bartoli)에게서 습득한 개념이다. 바르톨리는 프랑스 언어학자인 소쉬르(F. Saussure)의 영향을 받아 언어란 구체적 실체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한 언어의 발현능력은 문화와 기술적 문명화의 전파능력과 직접적으로 비례한다고 바르톨리는 주장하는데, 그람시는 이런 개념을 정치적인 개념으로 전환시켜 재해석한다(Kebir, 1991b).


5) 1917년에 일어난 소비에트혁명을 흔히 '2월 혁명' 이라는 고유명사로 일반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역사적인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달력으로 2월 27일에 일어난 혁명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일력으로는 3월 12일이 된다. '2월 혁명'이 아니라 '3월 혁명'이 맞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지만, 당시 러시아인들이 사용한 용어가 역사적 용어로 되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6)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노동자 계급이 작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자본가 계급인 관리자가 아닌 생산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권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평의회운동'은 공장점거 투쟁을 선호한다. 이런 투쟁방식은 노동자 계급에 의한 군사적인 위협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러시아적인 모형인 볼셰비키 혁명방식이 다른 국가에서도 차용된 결과의 하나이다. 하지만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운동은 베를린 시에서 이루어진 시가지 바리게이트전을 마지막으로 지도부인 룩셈부르그와 립크네히트가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즉결처형 됨으로써 패배한다.     


7) 무솔리니는 사회당 정치인이었던 경력을 이용하여 좌파적 선전요소를 자신의 정치선전에 사용한 최초의 우파 정치인이다. 그는 당시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사회주의적 이념을 우파의 언어로 재무장한다. 즉 그는 볼셰비키 혁명이후 유행어로 등장한 '혁명'을 '우파의 혁명'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런 우파 급진주의는 대중동원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모형을 창출하는데, 이것의 대표적 보기가 '로마로의 행진'이다(케비르, 1991b: 216). 하지만 파시즘이 발흥하던 시기 유럽의 정치지형에서 보면 무솔리니의 우파 급진주의를 이태리만의 특수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독일의 에른스트 융어(Ernst Jünger)로 대표되는 파시즘 이론의 원조들이 '청년 보수주의'(Jungkonservativ),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 '혁명적 보수주의'(Revolutionäre Konservatismus)를 부르짖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Gerstenberg, 1969). 즉 1930년대 자본주의적 체제위기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정치적 국수주의로 봉합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를 민족국가라는 정체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면서 각종의 '애국주의'가 대중화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8) 그람시가 1929년 감옥에서 기획한 '옥중수고'는 똘리아티의 각별한 관심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알려지기 어려웠다. 즉 역사의 바다에 한 알의 모래알처럼 잊혀질 위기에 처했던 그람시의 사상은 똘리아티의 관심과 노력으로 전후 복원된다. 이 편지글들은 '옥중수고'라는 이름으로 1947년부터 출판되어 이후 전 31권으로 구성된 미완성 유고집으로 발간된다. 하지만 '옥중수고'의 편지글들은 형식이 가진 한계로 인하여 그람시 사상의 편린과 단편을 종합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짧은 글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그람시 사상을 종합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화된 편지글에 불과하였던 옥중수고를 똘리아티가 다른 동료 당원들과 1938년부터 출판 가능하도록 바꾸는 작업에 들어간다(Gerratana, 1975: 37).     


9) 그람시의 문화개념은 문화산업에서 파생한 허위의식으로서 문화에 한정되지는 않고 막스 베버적인 전통 사회학적 해석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초점이 놓인다. 즉 그람시는 문화개념을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위적으로 산출되면서 조작되는 문화산업의 광기적 허구에 대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사회변혁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대중적 의식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해부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혁명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방식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봉건적 혹은 파쇼적인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이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탐문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람시의 관심은 이해가 될 수 있다.


10) 그람시의 이런 지적을 노동조합운동에 적용해 보면 설명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유럽사회에서 노조조직의 전통은 길드조직의 독점적 영업활동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영업권을 보장하기 위해 장인의 수를 제한한 길드조합의 독점적 지위 인정은 노동시장에 대한 인위적 규제 장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사회에서 초기 노조들의 조직대상은 전문 숙련공들이라는 점도 역시 고려해야 한다. 즉 노조조직의 성격은 시장경제의 무제한적 경쟁에 대항하여 시장 내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면서 획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노조운동에서 바로 이런 전통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발전의 맥락적 차이에서 노동자 계급의식의 굴절 가능성도 유추가 될 수 있다.


11) 바로 이 전제조건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연합의 유의미성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한국 노동운동 진영에도 상당한 정도로 세력을 형성한 비판적 지지가 의미를 상실해가는 과정역시 '국민의 정부'가 보여준 일방적인 계급성에 대한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정권과의 무차별성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시민적 권리마저 제대로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판적 지지란 무의미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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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차금붕

차금봉, 빈민 출신 노동자 그리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최규진(역사학 연구소 연구원, 성균관대 강사)


1. 신문에 기록된 어떤 편지와 한 운동가의 죽음

식민지 시대의 흐릿한 신문을 뒤적이다 보면, 일제 경찰에 검거된 수많은 운동
가와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다룬 큼지막한 기사들이 무슨 암호처럼 적혀있는 
것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굶어 죽은 사람과 가난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
은 사람, 그리고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찾아 헤메는 사람들에 대한 글도 드물
지 않다. 1929년 봄부터 번데기 장사가 나타났다는 별난 기사에도 식민지 민중
의 가난한 살림살이가 묻어 있다. 신문은 "굶주린 사람이 갑자기 번데기 많이 
먹으면 배탈. 그러나 계속 먹으면 괜찮아"라고 덧붙여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
런 기사를 읽다보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보게되고 못내 마음
이 무겁고 아리다. 더구나 일제가 조선의 '사상범'을 가둘 감옥을 더 짓고 경
찰 예산과 인원은 크게 늘린다는 기사 따위는 오늘날에도 섬뜩하다. 예나 지금
이나 엇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일들을 볼 때면, 조금은 사람사는 세상의 이치같
은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철지난 신문에 늘 심각한 것만 실려있는 것은 
아니다. 촌스럽고 다듬어지지 않은 그림들을 보는 것은 흘러버린 세월을 느낄 
수 있어 재미있다. 바르면 머잖아 머리카락이 나온다는 대머리 약이나 온갖 성
병을 간단하게 치료한다는 광고를 보면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신문은 특별한 사건이나 남다른 사연을 싣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중외일보』
의 어떤 기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안부편지를 소개하고 있어 오
히려 읽는 이의 눈길을 더 끈다.

윤호야 잘 있니. 할아버지 할머니 무사하고 엄마하고 동생하고 일가족 여러 어
른이 평안하시냐. 서너번 엽서는 받아보았으나 답할 근력도 없고 정신마저 완
전치 못하여 답장을 할 수 없었다. 윤호야 이번에 짓부스(장티프스)라는 열병
에 시달리다 하마터면 죽을걸 ··· 살아났다. (중외일보 1929년 3월 12일)

아들 윤호의 이름을 빌어 아내에게 쓴 이 사사로운 편지가 신문에 소개되었던 
까닭은 그 주인공이 남달랐기 때문이리라.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차금봉이
다. 무학대사가 "삼천명의 홀아비가 탄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곳에 세워
져 켜켜이 한을 쌓아둔 서대문 형무소. 그곳에서 가족을 그리며 차금봉이 편지
를 쓴 것은 1929년 초겨울이었다.
죽다 살아나 힘겹게 안부 편지를 썼던 차금봉은 끝내 가족을 보지 못한 
채, '심장성 각기증'으로 1929년 3월 10일 임시 독감방에서 죽고 말았다. 모
진 고문을 당한 끝에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63살되는 아버
지 차용진과 늙으신 어머니 이성녀, 24살의 부인 김씨, 그리고 네살배기 아들
과 두살배기 딸이 있었는데 ···
원산총파업의 거센 물결이 미처 가라앉지 않은 1929년 3월 14일, 나이 31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차금봉 장례식이 있었다. 일제는 만장과 요령을 압수하고 
말탄 경찰을 배치하여 그의 죽음길마저 가로막았다. 그들은 노동공제회와 노농
총동맹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장례대표 서정희를 서대문 경찰서에 소환했으
며,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400명을 모두 해산시켰다. 오랫동안 신문배달부를 
했던 차금봉 장례식에 신문배달부들이 와서 상여를 매는 것도 막았다. 그때 
{조선일보』는 일제 경찰이 영결식마저 못하도록 했다는 것 등을 크게 다루었
다.

차금봉, 그는 누구길래 이토록 죽음길까지 일제와 맞서야 했으며 신문에도 크
게 보도되었던 것일까. 줄여 말하면, 무엇보다 그는 노동자였고 조선공산당 책
임비서였으며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동안 훌륭한 독립운
동가였다고 믿어왔던 이런저런 사람이 사실은 친일파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
담한 마음이 들었다면, 차금봉의 삶에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겠다. 차금봉의 
삶을 뒤돌아본다면, 그동안 기억에서 지워야 했던 역사의 한자락을 어렴풋하게
나마 되살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 차금봉, 그의 삶이 곧 노동운동사

차금봉은 아직껏 민족해방운동가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뿐더러 그가 한 활
동마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동작동 국립묘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지
금 어디에 묻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차금봉. {중외일보』는 '어떤 중대사건
의 중요간부'였던 차금봉이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공부한 일은 별로 없으나 조
선 사회운동에서는 10년 이래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썼다. 그리고 노동공제
회 창립 때부터 집행위원을 했고 노농총동맹 창립부터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
맹으로 나뉘어 질 때까지 중앙상무위원으로 있었다고 소개했다. 또 그 신문은 
차금봉이 을축청년회 창립자이며 경성배달동맹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신간회 경
서지부(마포방면) 창립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
차금봉이 관계 맺었던 노동공제회, 노농총동맹, 신간회, '어떤 중대 사건'인 
조선공산당 사건 등은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큰 줄기였다. 그가 이 모든 조
직에 참여했다는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가 시대의 고민을 비껴가지 않
았던 실천적 운동가였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의 일생이 바로 노동운동사였다
는 그때의 신문기사는 그다지 부풀린 것이 아니었다.

차금봉은 1889년에 경성 화천동(和泉洞)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인전
기에 흔하게 나타나는 그럴싸한 태몽이 있었다거나 어렸을 때 아주 빼어났다
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14살에 미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역 철도기관의 화부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얼마 뒤에 기관사가 되었다. 그
는 집안도 보잘 것 없고 그다지 배운 것도 없이 어린 나이에 노동자로 사회생
활을 시작했다. 그런 차금봉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운동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19년 3.1운동이었다. 차금봉은 3.1운동이라는 '투쟁의 학
교'를 졸업하면서 선진노동자로 자라났다. 3월 1일부터 두달 남짓 격렬하게 일
어났던 3.1운동에서 노동계급도 빠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저마다 만세 시위
에 참여하거나 조직적인 파업투쟁을 벌였다. 차금봉은 1919년 노동자 시위와 
파업을 계획하다가 그것이 들통나 해고된 뒤 곧바로 용산철도공장, 정미공장, 
마차부 파업을 조직했다. 3월 27일 서울역 앞에서 '노동대회', '조선독립'이라
는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많은 노동자가 시위운동을 할 때 차금봉이 그것을 지도
했다. 조선에서 맨처음 일어나 파업시위로 알려진 이 3월 27일 투쟁에는 철도
국 노동자 800명이 참가했는데 차금봉 같은 선진노동자가 투쟁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만이 넘는 민중이 참가했던 3.1운동은 끝내 실패했다. 3.1운동에서 민중이 
크게 저항했는데도 일제를 물리칠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또 '문화정치'라는 거짓 개량에 휩쓸려 친일파가 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일제가 휘두르는 '채찍'에 겁먹었던 그들은 일제가 내미는 '당
근'에 더욱 솔깃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토록 많은 민중이 일제
에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는 사실에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차금봉처럼 3.1운동
을 '투쟁의 기억'으로 간직한 채, 더욱 힘차게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던 운동가
들은 새로운 운동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새로운 운동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폭넓게 받아들여졌으며 조직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노
동자 농민단체가 많이 생겼다.

1920년대의 노동단체의 첫걸음은 1920년 4월 11일에 서울 황금정(지금의 을지
로)에서 조직된 노동공제회에서 시작되었다. 노동공제회는 이 땅에 맨처음 나
타난 근대적 대중 노동단체였다. 물론 1920년 이전에도 30개 남짓한 노동단체
가 있어 노동계급에게 단결의 통로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노동자
를 소개하고 일자리를 구해주는 일종의 '노무공급기구' 노릇을 했다. 이에 견
주어 노동공제회는 노동자들의 친목과 상호부조만을 꾀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
자들의 계급의식을 높이고 전국 차원에서 노동자를 결속시킬 것을 목표로 삼
은 조직이었다.
노동공제회를 조직했을 때 회원이 678명이었고 1921년 3월에는 1만 7천명 가량
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 속에 소작인을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
라, "노동문제의 중심 대상은 소작인이다"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또 노동공제
회는 노동단체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회원은 개인자격으로 참가하여 그 구성이 
아주 복잡했다. 인텔리 출신과 노동자 출신 사이에 대립과 갈등도 있었다고도 
한다.

노동공제회 발기인 가운데 한사람인 차금봉은 초대 교양부 간사가 되었다. 이
미 그는 1920년 2월에 조선노동문제연구회 제1차 총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조직적인 노동운동에 첫발을 디뎠었다. 그는 1921년 3월, 노동공제회 제2회 정
기총회 예비총회에서 61명의 대표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뽑혔다. 차금봉은 최
상덕과 함께 노동자 출신을 대표하여 조선노동공제회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전에도 차금봉은 노동공제회 기관지인 {공제』 편집부와 자주 충
돌했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자기 뜻대로만 {공제』의 편집방향을 잡았기 때문
이었다. 각 파벌의 활동과 복잡하게 얽혀 있던 노동공제회 지도부는 1922년 가
을에 걷잡을 수 없는 분열에 휩싸였다. 차금봉 등이 지도부를 차지하자 윤덕
병 등의 또다른 그룹은 1922년 10월에 노동공제회 해체를 선언하고 노동연맹회
를 창립했다. 한 그룹이 떨어져 나간 노동공제회는 노동연맹회에 대립하면서 
1924년 노동총동맹에 합류할 때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는 못했다.
이 무렵 차금봉은 노동공제회를 지키면서 '조선노동공제회에 대하여', '현하
의 조선사회' 등의 강연을 했다. 차금봉의 강연은 많은 노동자에게 감명을 주
었다. 그가 노동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말솜씨 때문이 아니라 노
동현실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 때문이다. 그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노동
자들에게 큰 호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다른 보기를 들면, 노동공제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용산철도공장 노동자 김길인이 한 즉흥연설은 많은 사람에
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차금봉은 노동공제회의 '반인텔리투쟁'을 이끌었으며 사회주의자 정재달에게 
테러를 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에는 노동운동의 기본방향이나 인식도 채 갖
추어 지지 않았던 상태에서 노동운동가들 사이의 다툼도 심심찮게 생겼다. 누
가 올바르고 누가 잘못이었는지 가리기 힘들만큼 혼동된 시기였다. 그 혼동은 
운동가들이 3.1운동 이전의 낡은 운동방침을 부수고 새로운 운동 방침을 세워
야 할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차금봉은 바로 그때에 서울계와 관계
를 가지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 사상을 실천하려 했다.
차금봉은 1922년 9월 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된 뒤에는 1923년 전반까
지 조선금물직공조합, 경성신문배달조합이 창립되는 것을 지도했다. 그해 7월 
서울에서 유기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났을 때 지원했으며, 9월 서울계 사회주의
자들이 이끄는 조선노농대회의 발기인이 되기도 했다.

차금봉은 노농총동맹을 조직하는 데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24년 4월 18
일 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7명 기초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1920년
대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곳곳에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크게 성장하
고 노동자 농민들의 조직이 잇달아 나타났다. 이 조직들은 전국 조직으로 모아
야 한다는 요구가 차츰 커졌고 드디어 1924년 4월 20일에는 노농총동맹의 닻
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날 열린 회의에서 차금봉은 50명 중앙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는 노농총동맹을 매우 경계했다. 

이 동맹은 공산주의 선전기관의 의혹이 있음은 물론이며 그 강령 초안에 밝히
고 있는 것과 같이 단체의 위력을 가지고 계급제도를 파괴하고 공산사회의 실
현을 목적으로 하는 직접행동의 기관이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인정된다. 또 
오늘의 제도 아래에서 민족발전을 꾀하려는 동아일보계의 민족운동을 배척하
고 ··· 과격한 발언을 하는 등 치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으니 그 집회를 금
지하고 ···

일제가 노농총동맹을 '공산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파악한 것이 터
무니없지는 않았다. 노농총동맹의 강령은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새로운 사회
를 실현하고"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하며" "노동자 계급의 복리를 증진
하고 경제적 향상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노농총동맹이라는 공개된 노동조직
이 '공산주의 선전기관"의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노농총동맹을 조직하
기 얼마 전에도 전조선노동대회장에 낫과 망치를 엇걸어 그린 휘장이 나타날 
만큼 사회 분위기가 급진적이었고 사회주의 영향이 컸다.
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그 산하에 260여 단체를 거느리고 회원 총수는 5
만 3천명이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노농총동맹은 탄압 
속에서도 합법투쟁을 조직하려 했으나 일제는 이 동맹의 활동을 봉쇄해 버렸
다. 강연회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차금봉을 비롯한 서울계와 북풍회 그
리고 화요회계 사회주의자가 두루 참가하여 조직한 노농총동맹은 각 그룹 사이
의 결합이 느슨했다. 또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와 농민을 한 조직으로 
묶는 것도 한계였다. 그럼에도 노농총동맹 임시대회에서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선전하던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결의하자 동아일보의 모든 중역이 사표를 내야 
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차금봉은 노농총동맹에 적극 참여하여 간부를 맡
았을 뿐만 아니라, 1925년 10월에는 을축청년회의 집행위원이 되기도 했다.

노동공제회부터 노농총동맹에 이르기까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조직형태와 
노선이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발전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제대로 발맞
추기 위해 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
었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도 있었다. 일제가 노농총동맹을 탄압하고 
조선공산당원을 검거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1927년 9월에 두 조직으로 
분리되었다. 1926년 '3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927년 1월에 경기도를 책임
지는 자리를 맡았던 차금봉은 노농총동맹 분립과정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1927년 8월 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회에서 뽑은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
맹 선거위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물론 차금봉은 노동운동 쪽을 맡은 노총부 
위원이었다.
중앙기구 부서를 정비한 노동총동맹은 일제의 갖가지 탄압 속에서도 적잖은 파
업을 지도하거나 지원했다. 차금봉도 1927년 11월 밀양 양화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파업을 선동하고 확대시킨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속되기도 했다. 1928년 3월, 그는 신간회 경서지부 설립을 주도
하여 설립대회에서 간사가 되었으며 신간회 전국대회 출석대표위원으로 뽑혔
다. 조선공산당의 당원이 된 그는 신문배달로 생활을 하면서 신문배달부를 조
직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신문배달총동맹을 결성하고 그 집행위원장
이 되었다.

1928년 3월은 차금봉에게는 특별한 때이다. 이때 그는 '4차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와 경기도 책임자를 함께 맡게 되었다. 철도 노동자로 출발한 그가 비합
법 전위조직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1925년 4월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조선공
산당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기면서 거둔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거듭 무너졌지만 그
때마다 당을 다시 만들어 일제에 맞섰는데, 차금봉이 바로 마지막 조선공산당
의 책임비서를 맡은 것이다. '4차 조선공산당'은 신간회와 근우회 등에 관심
을 쏟았으며,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테제' 등을 마련하여 자신의 혁명노선
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4차 조선공산당'은 5개월이 채 안되어 170여명이 검
거됨으로써 활동이 거의 마비되고 말았다. 7월에 당중앙 간부와 지방간부 대부
분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차금봉은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몸을 피했으
나 일본 경찰에 곧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이다.


3. 마지막 투쟁,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

차금봉은 일제의 고문으로 살해되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그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제 경찰에 맞서 훌륭한 '수사
투쟁'을 벌였다. {차금봉 조서』에는 그의 마지막 투쟁을 엿볼 수 있는 다음
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질문)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무엇을 했나?
답변) 공산당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질문) 그렇다면 너는 책임비서로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는가?
답변) 어떤 방침이나 계획도 없었다.
질문) 공산당의 선언이나 강령을 아는가?
답변) 모른다.
질문) 말이 되는가?
답변) ···

질문과 답변 사이에 그리고 한 질문과 다른 질문 사이에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이 쏟아졌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차금봉은 그 고문을 견디면
서 자신이 지켜야할 그 무엇을 끝내 지키고 있었다. 잡동사니 말보다 침묵은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전한다. 구차한 삶보다 의로운 죽음이 더 생명이 긴 것
을 역사에서 본다.
빈 공간이 알맞게 자리잡은 그림이나 압축된 시가 오히려 넉넉한 느낌이 들고 
상상력도 부추긴다. 이것을 '여백의 미학'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보도검열에 
걸려 삭제된 차금봉 관련 기사에서도 '여백의 미학'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마침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체를 운반하여 들어오는데 그
로부터 부모는 물론이오 그의 부인의 애곡은 차마 듣지 못할 만큼 애를 끊었
다. 그의 어린 아들과 딸은 관 속에 들어있는 아버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
었는데 금봉의 부인은 목이 멘 소리로 ···(두 줄 삭제)···라고 부르짖
는 모양은 뜰앞에 모여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하였다.({중외일
보』 1929년 3월 12일)

운동가로 짧은 삶을 마친 남편의 주검 앞에서 젊은 부인은 도대체 무슨 말을 
외쳤을까. 일제는 왜 그 외침을 삭제해야 했는가. 이처럼 삭제된 기사는 읽은 
이의 상상력을 북돋운다. 그리고 식민지 민중의 한과 울분을 더욱 깊이 생각하
게 만들면서 '사실보다 더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워진 것은 신문 기사만이 아니다. 일제는 더 살아야 할 차금봉의 삶을 고문
으로 없앴고 우리는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발자취를 역
사에서 오랫동안 지웠다.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노동운동사는 이미 '여백의 미
학'이 아니다. 그저 허전하게 비어 있을 따름이다. '집단적 기억상실증' 속에 
묻혀진 노동운동사를 들추어내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선진노동자
의 삶을 오늘에 되새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차금봉이 꿈꾸었던 '노동계급 
해방'이라는 새세상은 '오래된 미래'인가 아닌가. 우리가 오늘 비로소 차금봉
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떤 뜻에서인가. 차금봉의 삶과 죽음에는 이토록 긴 
여운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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